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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87화 (8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7화

최수빈은 태화의 대답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조연 캐스팅이 아니라고?”

“그래. 조연 정도는 네가 아니라도 대체할 사람 구할 수 있어.”

“그럼?”

최수빈은 태화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태화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최수빈은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 캐스팅이라는 거 혹시…….”

“그래. 그 혹시가 맞아. 우리 영화의 히로인. 심수영 역이다. 난 수빈이 널 심수영 역에 캐스팅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야.”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바로 앞에서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뭐? 그게 말이 돼?”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너 장난치는 거지?”

“내가 너한테 장난이나 치려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겠냐?”

“…….”

“그리고 너하고 나. 장난치고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안 그래?”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너하고 나는 그…… 뭐냐. 장난치고 그럴 사이는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최수빈. 다시 한번 말할게. 너한테 심수영 역 제안하는 거 장난 아니야. 정말 네가 필요하다.”

최수빈은 태화의 제안에 바로 대답하기보다 자신이 심수영 역에 캐스팅된 이유가 듣고 싶어졌다.

“근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

“네가 선택했던 그 여배우. 네가 자신 있게 선택했잖아.”

“그랬었지.”

“근데 왜? 인제 보니 아닌 것 같아? 아니면 네 말을 안 들어?”

최수빈 처지로선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최수빈의 머릿속에는 선혜영의 사고는 일도 없었다.

“수빈아. 그런 거 아냐.”

“그럼?”

“사고가 있었어.”

최수빈은 ‘사고’라는 단어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사고?”

“그래.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믿기지 않는 사고였어.”

태화는 최수빈에게 선혜영의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현재 절박한 상황도. 최수빈은 태화의 이야기를 듣고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빈아. 현재 우리 영화는 위기에 처해 있어. 그리고 난 네가 심수영 역을 맡아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

“수빈이 너 이런 이야기 들었을 거야. 영화의 주연은 정해져 있다고…….”

“…….”

“난 이번 일 겪으면서 이 말을 절실하게 느꼈어. 우리 영화의 여주는 선혜영 님이 아니라 네가 아닐까?”

최수빈은 태화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화는 순간 깜짝 놀라 말했다.

“수빈아. 왜 그래?”

최수빈은 태화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태화가 자세를 낮추며 최수빈에게 말했다.

“수빈아. 괜찮아?”

태화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최수빈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그냥 놔두게나. 최수빈은 지금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을 걸세.]

[네. 그럴 겁니다. 거기엔 저에 대한 원망도 있겠죠.]

[그럴 걸세. 지난번 자넨 최수빈을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수빈이가 날 원망하더라도 여주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네요. 영감님. 제 생각이 너무 이기적인 걸까요?]

[자네의 생각은 이기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렇지 않네.]

[애매모호한 답변이군요.]

[이 작품이 단순히 자네의 작품이라면 그건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네. 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듯 이 작품은 자네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네.]

#.

최수빈은 태화의 여주 제안에 기쁨보다는 복잡한 감정들이 내면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왜, 인제 와서…… 이렇게 될 거…….’

세상사 모든 상황을 결과를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수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건 심수영 역 오디션 탈락 이후 힘든 시간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최수빈은 태화에게서 탈락 통보를 받고서 한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후유증을 앓았었다.

최수빈이 이렇게 후유증을 앓게 된 건 태화 때문이기도 했다. 오디션장에서 본 태화는 확실히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태화는 과거 연기 못하고 오디션만 보면 탈락했던 그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감독으로 만난 태화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과거의 감정을 떨쳐내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태화였다. 최수빈은 태화의 이런 태도에 심수영 역이 손에 잡히는 듯했고 여주로 연기하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며 잠자리에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심수영 역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선혜영에게 돌아갔다.

태화가 그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고 나름 합리적이었지만 최수빈은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최수빈은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듯한, 아니, 빼앗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로 받은 상처는 일로 치유해야 한다. 최수빈은 그래서 다른 작품의 오디션 준비를 했고 나름 좋은 평가를 얻어낸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제 오디션 탈락의 아픔을 조금씩 잊어가나 했었다. 그런데 오늘 태화가 난데없이 자신의 앞에 나타났고 자신이 원했던 심수영 역을 제안했다. 자신이 원했던 배역이었기에 당연히 하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와야 했지만, 최수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

태화는 최수빈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영감님. 수빈이가 어떻게 나올까요?]

[아마도 바로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저에 대한 감정이 있을 테니까요.]

[그렇네. 최수빈이 자네에게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을 해소하게 해야 최수빈도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될 걸세.]

[감정을 풀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겠군요.]

[그렇네. 자네가 그렇게 하기 위해선 최수빈이 캐스팅되는 게 자네만의 이익이 아니라는 걸 먼저 이해시켜야 하네.]

[그렇겠군요. 수빈이가 캐스팅되었을 때 제가 가장 큰 이익을 본다고 판단하게 되면 저에 대한 감정을 풀기도 어렵겠죠. 수빈이도 그 이익을 가져간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게 중요하겠군요.]

[어쨌든 자네는 이미 그 논리를 지니고 있네. 자네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말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이렇게 될 걸 의도해서 한 건 아닌데요.]

잠시 후 최수빈의 훌쩍이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자 태화도 최수빈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아무 말 없이 자기의 손을 태화에게 내밀었다. 태화는 아무 말 없이 최수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최수빈을 일으켜 세웠다.

태화는 최수빈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최수빈은 손등으로 자신의 두 눈을 훔쳤다. 그런 후 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태화. 결국 아쉬운 게 나니까 날 찾아온 거 아냐?”

태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네가 심수영 역을 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널 찾아온 거야.”

“…….”

“전에도 말했듯이 마지막까지 너하고 선혜영 님 때문에 고민했었어. 그만큼 난 수빈이 네가 심수영 역을 잘 소화해 줄 거로 판단하고 있어.”

“내가 수락하면 그만큼 너한테 이익이겠지. 안 그래?”

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수빈의 발언이 이어졌다.

“내 말이 맞잖아. 내가 네 의도대로 심수영 역을 수락해야 이 작품이 엎어지지 않을 거 아냐?”

“네 말이 맞아. 분명 나한테 이익이지. 하지만 꼭 나한테만 이익은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뿐 아니라 우리 영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이익이지.”

“서태화. 너 아까부터 우리 영화라고 하는데 이유가 뭐야? 어차피 영화는 감독의 작품 아냐?”

“그렇지 않아. 너도 계약 조건 알 거야.”

“계약 조건?”

최수빈도 태화가 말한 계약 조건을 알고 있었다. 최수빈은 캐스팅이 불발이 된 이후 그 내용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최수빈은 태화가 계약 조건을 말하자 망각하고 있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 N 분의 일. 조항 말하는 거야?”

“그래.”

“그게 뭐?”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니까 대외적으로는 내 영화라고 알려지겠지.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달라. 우리 영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작품에 참여하는 게 아니야. 이 작품에 투자하는 사람들이기도 해. 그 사람들은 나중에 우리 영화가 수익을 내면 그 이익금을 가져가게 돼. N 분의 일로. 네가 내 캐스팅 제안을 수락한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야. 너도 우리 영화에 참여한다면 그들처럼 투자자가 되는 거야.”

“투자자가 된다?”

“그래.”

최수빈은 태화가 말한 내용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작품에 투자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저예산 영화일수록 감독이 자신의 사비로 제작하기 때문에 감독이 모든 걸 다 가져가려 하는 게 일반적이다.

태화는 최수빈의 표정을 살폈다. 확실히 최수빈의 표정은 상당히 풀려있었다.

“좋아. 네 의도는 알겠어.”

태화는 조심스럽게 최수빈에게 물었다.

“그럼. 내 제안 수락하는 거야?”

“그렇게 하기에는 내가 너무 밑지는 거 같아.”

“뭐?”

“그렇잖아. 넌 지금껏 잘 나가다가 지금 삐끗한 거지만 난 아니야. 캐스팅 불발되고 한동안 마음고생 한 거 생각하면……. 너하고 지금 여기서 대화하고 있는 것도 말이 안 돼.”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하라고 하면 할 거야?”

“그래. 네가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으라고 하면 난 할 수 있어.”

태화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 태화는 무릎을 꿇으려고 한쪽 다리를 뒤로 빼려고 했다. 그때였다. 최수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그건 좀 과하다.”

“뭐? 과해?”

“그래. 너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무릎까지 꿇는 건 좀 아닌 거 같다. 괜히 나만 나쁜 사람 되고 말지.”

“그럼. 말을 해. 내가 뭘 하면 되는지.”

최수빈이 태화를 보며 피식 웃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서태화. 너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래.”

“그럼 애교 부려봐.”

“뭐. 애교?”

태화는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빈아. 장난이 좀 심한 거 아닌가?”

최수빈이 순간 정색하며 말했다.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닌데?”

“근데 이 상황에서 애교는 좀 뜬금없지 않냐? 뭔가 맥락이 안 맞잖아.”

“맥락? 그게 무슨 상관이야? 솔직히 너 여기 갑자기 찾아온 거. 나한텐 맥락에 맞는 거냐?”

“뭐. 내가 좀 뜬금없이 찾아오긴 했지. 그래도 애교는…….”

“너 뭐든 할 수 있다며? 너 그냥 해본 소리였던 거야?”

“당연히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나한테 여주 맡아달라고 애교 부려보라고. 그럼 할 테니까.”

“…….”

“왜 하기 싫어?”

“아니. 하기 싫다기보다는….”

“그러니까. 해보라고.”

태화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태화의 모습을 보자 최수빈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 간다.”

그러자 태화가 재빨리 최수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수빈아.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하냐?”

“나 성격 급한 거 이제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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