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6화
최수빈은 이한철과 통화를 마친 후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고민에 빠진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최수빈은 태화의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창가로 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최수빈은 시선을 태화가 있는 곳으로 돌리는 순간이었다.
“헉.”
최수빈은 태화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보통 이럴 때 둘 중 한 명은 시선을 피하게 마련이다. 시선을 계속 마주치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화와 최수빈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왠지 두 사람 모두 시선을 피하면 자존심 싸움에서 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태화 군. 이번 기회 잘 살리게.]
[기회요?]
[아마 최수빈은 자네가 말을 걸면 이번에는 마냥 거부하지 않을 걸세.]
[그만큼 궁금하기 때문이겠죠.]
[그렇네. 하지만 자네가 최수빈과 대화할 때 주의할 점이 있네.]
[주의할 점이요?]
[가장 먼저 대화의 주도를 자네가 해야 하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최수빈과 대화할 때 변죽만 울리게.]
[변죽만 울린다? 그 말은 핵심에서 비켜 가란 말이잖아요.]
[그렇네. 자네가 변죽만 울리는 말만 하게 되면 최수빈은 더욱 궁금해할 걸세.]
[그래서 저에게 오게 만든다는 말이죠?]
[맞네. 최수빈은 현재 자네를 만나러 나온다는 건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 심리를 무너뜨리려면 더욱 궁금하게 만들 수밖에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이거로 충분할까요?]
[당연히 충분하지 않네. 그래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그게 뭡니까?]
[자네 정원석 캐스팅할 때 생각나나?]
[네. 그때 마음의 빚을 지게 했었죠. 그럼?]
[자네가 생각한 게 맞네.]
[뭐. 이미 한 번 했는데 두 번은 못 하겠습니까?]
태화는 터벅터벅 최수빈이 사는 원룸 건물로 걸어갔다. 최수빈이 사는 원룸은 3층. 그리 멀지만은 않은 거리다.
태화는 최수빈을 올려다본 채 최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수빈아. 너 내가 여기 온 이유 궁금하지 않아?”
최수빈은 자신의 속내와 다르게 대답했다.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최수빈은 특히 ‘전혀’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태화는 최수빈이 했던 말과 달리 매우 궁금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근데. 왜 커튼 사이로 훔쳐보고 그러냐?”
“…….”
“그거 궁금해서 그런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아니면 뭐?”
“나를 그렇게 훔쳐보고 싶었거나.”
“이런 미친……. 너 헛소리 그만하고 돌아가. 어서!”
태화는 최수빈의 발언을 듣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수빈은 태화가 웃자 그 모습에 발끈했다.
“야. 너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냐? 어?”
최수빈 처지로선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최수빈 자신은 몇 시간째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태화는 웃고 있다는 게 화가 났다.
“내가 웃은 이유 궁금하냐?”
“왜? 궁금하면 나오라고?”
“아니. 이건 알려줄게”
“뭐?”
“그래도 처음과 달리 너하고 나. 지금 대화하고 있잖아. 이 정도면 큰 발전이지 않아?”
“그게 뭐?”
“그래서 웃음이 났어.”
“야. 너 어디서 작업 멘트를 날려. 그 멘트 클럽 가서 여자 꼬실 때나 써라. 여기랑 상황이 안 맞다.”
“난 상황이 맞는 것 같은데?”
“뭐? 상황이 맞아?”
“나 너 꼬시러 온 거야.”
“뭐? 날 꼬시러 온 거라고?”
“그렇다니까. 근데 그게 뭘까?”
최수빈은 태화의 대답에 당황스러웠다. 대화의 방향이 최수빈 자신이 예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자꾸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서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최수빈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야. 잠깐만.”
이 말은 태화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최수빈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태화. 너 자꾸 말장난할래?”
“난 말장난한 거 없어. 정말 너 꼬시러 온 거라니까?”
“너 자꾸 변죽만 울리잖아.”
“최수빈. 얼굴 제대로 보고 얘기하자.”
“…….”
“너 나올 때까지 나 여기서 기다린다.”
“네 맘대로 해!”
최수빈은 말을 하고 나서 순간적으로 커튼을 닫았다. 태화는 최수빈의 모습을 보고 나서 터벅터벅 벽 쪽으로 걸어가 등을 기대고 섰다.
[영감님. 과연 통할까요?]
[아마도 그렇게 될 걸세.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수빈이는 풀지 못한 궁금증과 저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쌓일 수밖에 없겠죠.]
[그렇네. 그런데 태화 군.]
[왜요?]
[혹시 오늘 일기예보가 어떻게 되는가?]
[비라도 오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건 클리셰가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그래도 소나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영감님! 꼭 제가 비를 맞아야 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냥 그런 장면이 연출되면 어떨까 생각한 것뿐이네. 비 얘기는 그만하도록 하겠네.]
#.
최수빈은 불을 끄고서 침대에 누웠다.
“그래. 거기 있고 싶으면 있어라. 서태화 너만 고생이지. 난 모르겠다.”
최수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멀스멀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최수빈은 생각이 떠오르는 걸 막기 위해서 음악을 듣기로 했다. 최수빈은 이어폰을 자기의 귀에 장착한 후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재생해서 듣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일부러 빠른 비트의 댄스곡을 선곡해서 들었다.
최수빈은 댄스곡을 들으면서 입으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얼마 동안 최수빈의 이런 행동은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디까지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음악의 멜로디보다 태화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 너 꼬시러 온 거야.
인위적인 기계음이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최수빈은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음악 재생을 멈췄다. 그리고 자기의 귀에 장착했던 이어폰도 뺐다.
최수빈은 자기 방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의 상황을 살폈다.
태화는 자신이 말한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단 차이가 있다면 처음엔 서 있었지만, 지금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태화의 모습을 본 최수빈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날 꼬시러 왔다고 했지? 그래, 한번 얘기나 들어보자.”
최수빈은 커튼을 다시 원래대로 내리고 나서 몸을 돌렸다.
#.
태화는 벽에 기대고 얼마 후 피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태화는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자마자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태화는 쪼그리고 졸다가 순간 잠이 깼다.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화는 손으로 자기의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태화 군. 잘 주무르게. 대충 했다가는 근육이 다칠 수도 있으니 말일세.]
[아까는 절 비 맞히려고 하시더니 지금은 또 제 걱정이십니다.]
[비 맞는 거야 그냥 생각일 뿐이지 않은가? 비를 맞는다고 다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현시점에서 자네가 다쳐서는 안 되네. 자네마저 다친다면 정말 끝이네.]
태화는 감독이라 조금 다쳐도 괜찮을 거로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영화 <내 복권 내놔!>는 원 씬, 원 커트에 핸드헬드 촬영이다. 짧지 않은 시간을 카메라를 따라다니며 연출해야 한다. 태화가 만약 다리에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촬영 진행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다칠 생각 없습니다. 그런데 영감님 좀 웃기지 않습니까?]
[뭐가 말인가?]
[이거 운동부도 아닌데 무슨 부상에 이렇게 신경을 써야 하냐고요.]
[어쩌겠는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네.]
태화는 다리를 신경 써서 주물렀다. 태화는 다리를 주무를 때마다 허벅지가 마치 감전된 듯 쩌릿쩌릿했고 그때마다 입에서 신음이 났다.
그때였다. 태화의 귀에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태화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주시했다.
드디어 태화의 눈에 최수빈이 현관문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영감님. 드디어 수빈이가 내려왔군요.]
[내가 그랬지 않은가? 최수빈은 자네를 만나러 내려올 거라고. 이제 모든 건 자네한테 달렸네.]
[혹시 조언해 줄 말은 없습니까?]
[언제나처럼 진심으로 다가가게.]
[역시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최수빈은 현관문을 통과하고 나서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도 최수빈에게 다가가려고 왼발을 뗐다. 왼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태화는 왼쪽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본의 아니게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태화의 모습을 본 최수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인사가 너무 과한데? 내가 널 보러 오는 게 그 정도였니?”
태화가 고개를 들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무슨 수작이야? 다 봤어. 너 쪼그리고 앉아서 그런 거잖아.”
“…….”
“다리에 쥐 나서 그런 거 아니냐고.”
“봤냐?”
“그래. 다 봤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나 보네. 내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보기도 하고.”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 할래? 빨리 용건이나 말해.”
태화는 대답 대신 최수빈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최수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야? 이건 또?”
“나. 팔 좀 잡아줘라. 다리에 힘이 빠져서 일어나기 힘들다.”
“서태화. 참. 가지가지 한다?”
“…….”
“됐어. 알아서 일어나.”
“그렇게 하마.”
태화는 접었던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최수빈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혼자서 잘 일어나는구먼.”
최수빈이 태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용건이 뭐야?”
“…….”
“오늘 난데없이 찾아와서 날 꼬시러 왔다는 둥 이런 수작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최수빈은 태화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만큼 최수빈은 오늘 태화의 행동이 궁금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화는 여기서 변죽만 울렸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태화는 지금까지 다소 남아 있었던 장난스러운 표정을 빼버렸다. 그러자 태화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최수빈은 연기자다. 사람의 표정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수빈은 태화의 표정 변화를 보고 속으로 긴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기대감이 서렸다.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어.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오늘 나를 궁금해서 미치게 만든 이유……. 빨리 말하라고. 서태화.’
태화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좋아. 변죽은 울리지 않을게.”
“당연한 거 아냐? 너 이번에도 변죽만 울렸으면 나 그냥 집으로 들어갔다.”
“최수빈. 너 아직도 우리 영화에 참여하고 싶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너 나 캐스팅하러 온 거지?”
“…….”
“왜 조연급 연기자가 펑크냈냐? 그래서 이렇게 날 찾아온 거고?”
“수빈이 네가 한 말. 절반만 맞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절반만 맞는다니……?”
“오늘 내가 널 찾아온 건 조연을 캐스팅하려고 온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