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3화
최수빈은 아무 말 없이 태화를 바라보았다.
“수빈아. 문 좀 열어봐.”
“…….”
“수빈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하지만 최수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태화를 보고만 있었다.
[영감님. 상황이 이런데 어떻게 유리 벽을 깨부숩니까? 나한테 대꾸조차 안 하는데.]
[태화 군.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지금 너무 한가하신 거 아닙니까?]
그때였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최수빈이 입을 뗐다.
“나…….”
“그래. 수빈아.”
“너랑 할 얘기 없는데?”
“뭐?”
“그만 가 보라고.”
최수빈은 말을 마치고 나서 매몰차게 태화에게서 몸을 돌렸다. 태화는 최수빈의 행동에 마음이 급해졌다.
“수빈아! 수빈아!”
최수빈은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최수빈은 태화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최수빈!”
태화는 애타게 최수빈을 불렀지만, 그녀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태화는 결국 최수빈과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도 해보지 못한 채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태화 군. 한 가지 희망적인 말을 해주겠네.]
[희망적인 이야기요?]
[그렇네. 최수빈은 아직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았네.]
[그걸 어떻게 아시죠?]
[만약 최수빈이 상업영화에 캐스팅되었다면 자네를 보자마자 바로 말했을 걸세.]
[저한테 말했을 거라고요?]
[그렇네. 사람 심리 중에 보복 심리라는 게 있기 때문이네.]
[그러니까 너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잘살고 있다. 그런 건가요?]
[그렇네. 최수빈은 자네가 캐스팅하지 않고 자른 사람일세. 하지만 최수빈 자신이 상업영화에 캐스팅되었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당연히 저한테 자랑하고 싶겠죠. 난 네가 아니어도 지금 이렇게 잘살고 있다. 아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니 아직 기회는 있는 걸세.]
[유리 벽을 깨부술 기회 말인가요?]
[그렇네. 그러기 위해서 자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우선 수빈이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수빈에게 캐스팅 제안도 할 수 있으니까요.]
[맞네. 자네가 최수빈과 만나는 게 중요하지. 그게 시작일 테니 말일세.]
[하지만 현 상황에서 쉽지 않아 보입니다. 수빈이의 태도가 생각보다 완강해요.]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그게 뭡니까?]
[자네가 여기서 죽치고 있는 것이네.]
[여기서 죽친다라……. 그런다고 수빈이가 저를 만나러 올까요?]
[나는 최수빈이 자네를 만나러 올 거로 확신하네. 정말 만에 하나 최수빈이 자네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면 정말로 자네를 끔찍이 싫어하는 것이겠지.]
[지금 빠져나가는 구멍 만드시는 겁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만큼 난 확신하고 있다는 의미일세.]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인간의 본능 때문일세.]
[인간의 본능이요? 점점 모를 소리만 하시는군요.]
[내가 아까 최수빈에게 흘러가는 정보를 막으라고 했던 말 기억하나?]
[네. 기억합니다.]
[그것과 자네가 이곳에 죽치고 있는 것이 합해지면 어떤 효과를 낼까?]
태화는 순간 박도봉 감독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영감님. 이제 알겠어요.]
[이제 알겠는가?]
[네. 호기심이에요. 수빈이에게 우리 쪽의 정보가 가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이곳에 버티고 있다면…. 수빈이는 분명 궁금해할 겁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아마 궁금해서라도 절 만나러 올 겁니다.]
[바로 그것이네. 인간의 호기심은 본능 같은 것일세. 최수빈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네.]
태화는 발걸음을 한재영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야. 진짜 수빈이 매정하더라.”
“뭐가?”
“태화야. 네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면 얘기라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래도 나한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때 캐스팅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잖아. 감정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빤히 알면서.”
“에휴. 지나간 이야기 해봐야 뭐하냐? 지금 급한 건 우린데.”
“그래도 그렇지. 하여튼 최수빈 성격은 지랄 맞아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라. 만약 수빈이가 우리 영화에 참여한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태화의 말에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태화야. 지금 상황을 봐라. 수빈이가 네 제안을 수락하겠냐? 아예 대화도 안 하려고 하는데.”
태화가 정색하며 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고?”
“아니. 내 말은 오늘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자고. 오늘은 수빈이가 너에 대한 감정이 욱하고 올라와서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내일 오면 수빈의 그 성질이 좀 죽어 있을 거다?”
“그렇지.”
하지만 태화는 한재영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그건 안 돼.”
“왜? 수빈이가 오디션 본 거 때문에?”
“그래. 어쩌면 오늘이 수빈이를 캐스팅하기 위한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몰라.”
“그런데 수빈이가 이미 캐스팅이 되었다면? 저렇게 널 대하는 거 보면 이미 캐스팅된 게 아닐까? 캐스팅됐으니까 태화 너하고 할 말이 없다. 이런 의미 아닐까?”
태화는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수빈이는 아직 캐스팅되지 않았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수빈이가 만약 캐스팅되었다면 나를 만나자마자 자신이 상업영화에 캐스팅되었다고 말했을 거야.”
“수빈이가 너한테 말했을 거라고?”
“그래. 수빈이는 나한테…. 어쩌면 보복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보복 심리 그런 거야?”
“그래.”
한재영은 태화의 말처럼 최수빈이 보복 심리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네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그런데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일단 여기서 버틴다.”
“여기서 버틴다고?”
“응. 그 방법밖에는 없어.”
한재영은 태화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다른 대안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재영은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우리가 여기서 지킨다고 해도 최수빈이 캐스팅될 수도 있는 거잖아. 캐스팅 통보야 전화로 할 텐데.”
“혹시라도 최수빈이 캐스팅된다고 해도 여기서 버티고 있어야 해.”
“뭐?”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일단 최수빈을 만나는 거야. 그래야 말이라도 꺼내보지.”
“최수빈은 캐스팅이 되더라도 너를 만나러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보복 심리 때문에?”
“그래. 그런데 그 상황에 우리가 여기에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
“캐스팅은 그냥 물 건너가는 거지. 야. 근데 최수빈이 만약 캐스팅돼서 여기 오면 참 볼만하겠다?”
한재영이 최수빈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서태화. 나 상업영화에 캐스팅됐어. 더는 날 귀찮게 하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그만해라 끔찍하다.”
“그래. 그만하자. 나도 하면서 팔에 소름 돋았어. 봐봐. 이거.”
한재영이 태화에게 자기의 팔을 보여주었다. 실제 한재영의 팔에는 닭살이 돋아 있었다.
태화와 한재영은 서로를 보며 깔깔대며 웃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한재영은 웃음이 잦아들자 답답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정말 어렵다. 어려워.”
태화는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을 한재영에게 말해야겠다고 판단했다. 한재영도 태화의 생각을 알아야 혼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재영아. 우리가 계속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수빈이는 분명 무슨 일인지 궁금해할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한재영은 태화의 말에 순간적으로 뭔가 떠올랐다.
“아. 그래서 네가 아까 윤주 누나랑 통화할 때 그렇게 최수빈에게 우리 쪽 상황을 말하지 말라고 그랬었구나. 혹시라도 우리 쪽의 정보가 수빈이한테 흘러 들어가면 안 되니까.”
“나도 아까 윤주 누나랑 통화할 땐 거기까지 생각하고 말했던 건 아니야. 수빈이가 우리 쪽 상황을 알면 우리가 불리하니까 그런 거였지.”
“어쨌든 네 말은 수빈이가 어떤 일인지 궁금해서라도 반드시 널 만날 거라는 거지?”
“난 그렇게 확신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뭔데?”
“사람이 왜 사람이겠냐?”
한재영은 벙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화의 답변이 갑자기 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궁금한 걸 견디지 못해서 사람인 거잖아.”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화, 네 말이 맞는다. 정말 궁금한 건 못 참지.”
“어쨌든 중요한 건 수빈이를 만나는 거야.”
“태화야. 솔직히 처음엔 네가 여기서 죽치고 하자고 할 때 정말 ‘너도 방법이 없구나’ 했었다.”
“내가 그냥 고집부린다고 생각한 거야?”
“응. 수빈이가 저렇게 나오니까 너도 갈 때 가 보자는 심정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네 생각을 들어보니까 이제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건…….”
“중요한 건?”
“무엇보다 희망이 보인다는 점이야. 안 보이던 희망이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나도 처음엔 너하고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결말을 본 것도 아닌데 포기할 순 없잖아.”
“맞아. 네 말대로 그냥 포기할 순 없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근데 태화야.”
“왜?”
“너 배고프지 않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좀 출출하다.”
“그렇지?”
“그냥 차에서 간단하게 먹자. 지금 어디 갈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오케이. 그럼 내가 편의점에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
최수빈은 태화를 매몰차게 대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최수빈은 방으로 돌아온 후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최수빈은 누운 채 천정을 바라보았다. 최수빈의 눈에 천정은 하나의 스크린이었다. 방금 태화를 만났던 상황이 영화처럼 천정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태화가 여기 왜 온 거지? 도대체 왜? 무슨 일로?’
최수빈은 누웠다가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창가로 걸어갔다.
최수빈은 창문에 쳐진 커튼을 살짝 젖히고 태화와 한재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태화와 한재영이 타고 온 차는 주차된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였다.
“어? 저거 뭐야?”
한재영의 손에 뭔가 들려 있는 게 보였다. 한재영은 손에 편의점에서 산 먹거리를 들고 있었다. 한재영은 먹거리를 들고서 차에 탔다.
이 모습이 최수빈의 눈에 잡혔다. 최수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쟤네. 뭐야? 여기서 죽치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왜?”
최수빈은 궁금증이 커졌다. 최수빈은 일단 송윤주에게 연락해 보기로 했다.
‘태화에게 내 집 주소를 알려준 사람은 윤주 언니밖에 없어.’
최수빈은 스마트폰으로 송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음이 계속 나왔지만 송윤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침내 통화 연결음이 끝내고 음성사서함을 안내하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고객께서는 지금 전화를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음성사서함에…….
최수빈은 안내 메시지가 나오자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어라? 언니가 왜 전화를 안 받지?”
최수빈으로선 이상했다. 송윤주는 최수빈의 전화를 안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최수빈은 다시 송윤주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최수빈은 송윤주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아. 진짜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