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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82화 (82/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2화

태화가 조심스럽게 송윤주에게 물었다.

“혹시 수빈이 오디션 결과 알아요?”

-몰라. 결과가 나왔으면 나한테 연락했을 텐데. 아직 연락 못 받았거든.

“알겠어요.”

태화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 때문이었다.

[영감님. 수빈이가 오디션을 봤군요.]

[현시점에서 자네에게 유리한 소식은 아니구먼.]

[어쨌든 큰 배역이 아니지만, 수빈이가 오디션에 참여했다는 건#.….]

[당연히 단역이지만 메리트가 있는 것이겠지. 그 메리트란 바로 상업영화일 테고.]

[그렇겠죠. 단역이라도 상업영화에 출연했다는 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네. 최수빈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네.]

[그래도 아직 결정된 건 없잖아요.]

[맞네. 이제 중요한 건 앞으로 벌어질 상황일세. 그러기 위해서 자네는 송윤주에게서 중요한 사항을 확인해야 하네.]

[중요한 사항이요?]

[그렇네. 송윤주가 최수빈에게 이곳의 상황을 이야기했는지 말일세.]

[이건 아주 중요한 사항이겠네요. 최수빈이 이곳의 상황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저의 전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렇네. 만약 최수빈이 이곳의 상황을 모른다면 자네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 최수빈은 그 사실을 몰라야 하네.]

[왜 그래야 하죠?]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될 걸세.]

태화가 말이 없자 전화기 건너편에서 송윤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야. 태화야.

“네. 말해요. 누나.”

-난 네가 말이 없어서 휴대폰이 고장 났나 했네.

“누나. 미안해요.”

-뭐. 미안할 그거까지 있니. 어쨌든 수빈이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고마워요. 누나. 근데 수빈이한테 이곳 상황을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이야기한 적 없어. 수빈이가 이쪽 이야기하는 거 안 좋아하거든. 걔한테는 나름 아픈 경험이라서. 나도 그래서 이쪽 이야기는 일부러 피하고 안 해.

태화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부탁?

“네. 수빈이한테는 제가 찾아간다는 말 하지 말아주세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원죄가 있는데.

“그리고 수빈이가 누나한테 혹시 연락하더라도 이곳 상황을 말하지 마세요. 내가 수빈이를 찾아간 이유도요.”

태화가 송윤주에게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건 정보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최수빈이 이곳 상황을 먼저 알게 되면 태화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건 염려 마. 입 꼭 닫고 있을 테니까.

“고마워요. 누나.”

-그래. 수고해라. 태화야.

태화는 송윤주와의 전화를 종료했다.

[태화 군. 최수빈이 이곳 상황을 모른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인 일일세.]

[네.]

[아마도 최수빈은 자네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절 만나는 걸 싫어하겠죠. 저와의 관계를 떠나서 배역 하나 보고 오디션에 지원했지만 제가 수빈이를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자존심도 많이 상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최수빈이 이곳 상황을 모른다는 건 자네에게 가능성을 열어주게 될 것일세.]

[가능성을 열어준다고요?]

[그렇네.]

[당연히 그 이유를 지금 말해주지는 않겠죠?]

[그렇네.]

한재영이 태화에게 슬쩍 다가와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수빈이 오디션 봤대?”

태화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라냐? 내가 더 놀랐다.”

“뭐?”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닌데 네가 그렇게 놀라서.”

“너, 듣고 있었냐?”

“그냥 들리는데 안 들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이왕 들린 건 그냥 들었다.”

“우섭이 하고 현석이는?”

한재영이 평상에 앉으며 말했다.

“방에서 일하고 있어. 네가 윤주 누나하고 전화 통화한 거 못 들었을 거야.”

“이따가 네 차 좀 쓰자.”

“네. 감독님. 당연히 내가 모셔야죠.”

한재영은 말을 하고 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태화가 그 모습을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실실거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영화 너무 어렵게 가는 거 같아서.”

“그건 처음 시작할 때 예상했던 일이었잖아.”

“그랬었는데 내가 잠시 착각했었나 봐.”

“착각?”

“응. 솔직히 촬영 전까지 그럭저럭 견디고 왔잖아. 네가 힘들 거 같았던 한철이 형 섭외하고 정원석 님도 캐스팅하고……. 우섭이하고 현석이 두 녀석도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그래서 그랬나 봐. 우리 영화는 어쨌든 만들어질 거다. 이제 앞으로 달릴 일만 남았다.”

태화는 한재영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태화 본인도 한재영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취해 있었던 거지. 난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미치겠냐?”

“미칠 거 같은데 그래도 해야지. 안 그래?”

“그렇지. 어떻게든 우리 영화는 만들어야지.”

태화는 한재영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너 이제야 진짜 프로듀서 같다.”

“야. 그전에는 안 그랬냐?”

“전에는 그냥 일을 잘하는 그런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정신까지 제대로 프로듀서 같다.”

“뭐. 능력과 정신을 겸비한 그런 프로듀서인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태화야. 어쨌든 한번 해보자. 그런데 너 수빈이가 안 됐을 경우 생각하고 있냐?”

“물론.”

“어떻게 할 건데?”

“다시 시작해야지.”

태화의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었다. 만약 최수빈이 캐스팅되지 않는다면 현재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은 도저히 일정이 나오지 않는다. 특히 정원석은 다음 작품 준비 때문에 촬영이 불가능하다. 결국 모든 걸 새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너 그래도 내 옆에 있어 줄 거냐?”

“나야 당연히 끝을 봐야지. 지금 방에 있는 저 두 녀석은 잘 모르겠지만.”

#.

해 질 무렵.

태화와 한재영은 최수빈의 집 근처에 있었다. 최수빈은 원룸촌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태화는 도착하자마자 최수빈이 자취하는 곳의 호수로 호출을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최수빈이 아직 귀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차에서 최수빈이 귀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는 기다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동안 쌓였던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창밖을 살피던 한재영이 반응했다. 한재영이 태화를 깨웠다.

“태화야. 일어나봐.”

태화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왜?”

“저기 쟤 수빈이 아냐?”

“뭐? 어디?”

“저기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여자 말이야.”

태화의 눈에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어. 맞는 거 같은데?”

태화는 순간 정신 번쩍 들었다.

“재영이 넌 어떡할래?”

“난 여기 있을게. 내가 가 봐야 도움이 되겠니?”

“알았어. 그럼 갔다 올 테니까. 재영이 넌 여기 있어.”

“그럴게.”

태화는 차에서 내리기 위해 차 문을 열었다. 그런데 태화가 급하게 차에서 내리려고 하면서 그만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그 때문에 태화는 중심을 잃었다.

“어……. 어!”

태화는 몸이 휘청이다 그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태화의 모습을 본 한재영은 순간 화들짝 놀라 차 문을 열고 내렸다.

“태화야. 괜찮냐? 다치지 않았어?”

“어. 괜찮아.”

태화는 한재영에게 괜찮다고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조심 좀 하지. 야. 진짜 너까지 왜 이러냐?”

“…….”

“주연 배우들도 연기하다 한 번씩 다 넘어지더니 이제는 너까지 그러냐? 와. 나 진짜 미치겠다.”

“나도 하려고 한 건 아니다. 어쩌다 스텝이 꼬여서 그런 거지.”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

“그러게, 말이다.”

태화는 자기의 바지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어냈다. 그러고서 태화는 최수빈에게 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태화는 최수빈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태화 군. 이거 최수빈 앞에서 스타일 완전히 구긴 셈이구먼.]

[영감님.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

최수빈은 오늘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는 날이다. 연기 지망생이 화려한 삶을 살 거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을 한다.

요즘 최수빈에게는 한 가지 희망이 생겼다. 며칠 전 봤던 오디션 결과가 기대되기 때문이었다.

최수빈은 오디션 연기를 펼치고 나오고 나서 오디션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들었다.

-최수빈 씨. 연기가 꽤 괜찮네요.

-연기의 기초는 잘 잡힌 거 같아요.

스태프들의 이어지는 긍정적 평가는 최수빈이 좋은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런데 오늘 난데없이 갑자기 태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바로 자기 집 앞에서. 그것도 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최수빈이 태화를 보자마자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서……태화?”

태화는 최수빈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최수빈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최수빈은 태화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태화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최수빈은 <내 복권 내놔!>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나서 한동안 후유증을 겪었었다. 저예산 영화라지만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주연을 맡는다는 건 분명 기회라면 기회였다.

더욱이 시나리오도 다른 저예산 영화라는 다르게 재미가 있었다. 잘만 하면 이 작품을 발판으로 한 단계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최수빈은 자존심 생각하지 않고 배역을 따내는 것에만 집중했었다. 하지만 태화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

물론 그 선택이 합리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최수빈의 섭섭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섭섭함.

최수빈은 처음엔 이런 감정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최수빈은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서태화! 네가 뭔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선택한 거야? 도대체 왜? 왜, 왜, 왜!

그리고 최수빈이 태화를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 자신을 보러 온 상대가 누구인가? 바로 서태화이기 때문이다.

최수빈은 태화와 어느 정도 감정을 풀었다고는 하지만 불편한 감정이 아직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었다.

태화는 최수빈이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빈아! 잠깐만. 최수빈!”

하지만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뒤로하고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도 현관문 안으로 몸을 끼어서 어떻게 들어가려고 현관문의 열린 틈새로 자기의 팔을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태화의 손은 현관문을 두드릴 뿐이었다. 아깝게도 태화가 한발 늦은 것이다.

순간 태화와 최수빈 그리고 둘 사이에 있는 현관문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유리로 된 현관문을 사이로 태화와 최수빈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펼쳐졌다.

[영감님. 이 유리로 된 현관문이 나와 수빈이 사이의 벽처럼 느껴집니다. 서로를 볼 수는 있지만 다가갈 수 없는 벽 말입니다.]

[이제 자네는 자네와 최수빈 간 유리 벽을 깨부수어야 하네.]

[깨부순다?]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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