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1화
태화와 한재영은 병원 밖을 나섰다. 한재영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쾌재를 불렀다.
“이야호!”
태화는 한재영의 모습을 보자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재영아. 그렇게 좋냐?”
“야. 당연한 거 아니냐? 정말 지옥에서 빠져나온 느낌이다. 만약 정원석 님이 ‘안타깝게 됐습니다. 전 영화에서 이제 빠지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 봐.”
“재영이 네 말이 맞다. 아마도 한동안 어둠 속에서 헤맸어야 했겠지.”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근데 비결이 뭐야?”
“무슨 비결?”
“네가 선혜영 님의 생각을 돌렸으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내가 선혜영 님의 생각을 돌린 건 없어.”
“없다고?”
“응. 선혜영 님은 그냥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뭘 확인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까 정원석 님이 말했잖아. 선혜영 님. 그동안 상처 많이 받았었다고.”
“선혜영 님. 밝아서 사람들한테 상처받고 그런 거랑 거리가 멀 거로 생각했었는데.”
“…….”
“하긴 사람들한테 상처받아온 사람은 판단 기준이 사람일 수밖에 없지.”
“재영이 너 꽤 오랜만에 멋있는 말 한다.”
“너 나 놀리는 거지?”
“아니. 그럴 의도 전혀 없어. 액면가로 그냥 받아들여.”
“참. 우섭이하고 현석이한테도 알려줘야겠다. 이 사실을 알면 정말 좋아할 거야.”
“내가 하마. 지금 마음 졸이고 있을 텐데.”
“오케이.”
태화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이우섭에게 전화했다. 이우섭은 태화의 전화를 기다렸는지 신호가 한번 울리자마자 받았다.
“그래. 우섭이냐?”
-근데 어떻게 됐어요?
“야. 숨 좀 쉬고 얘기하자.”
-지금 그럴 때인가요? 형. 근데 어떻게 됐어요? 정원석 님. 계속 우리 영화에 참여하겠다고 하던가요?
“우섭아. 너 이상한 데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해.”
-일이요?
“그래. 촬영 대충 일주일 뒤로 미뤄야 하니까 확인 좀 해. 확인하고 나서 스태프들하고 연기자들에게 변동된 촬영 일정 공지해 주고.”
-촬영을 일주일 뒤로 미뤄요? 그럼?
“그래. 정원석 님. 우리 영화에 계속 참여할 거야.”
-으하하!
전화기 너머로 이우섭의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태화는 이우섭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환하게 웃었다.
이우섭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옆에 있던 한재영에게까지 그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재영은 이우섭의 웃음소리를 듣자 절로 웃음이 새 나왔다.
태화와 이우섭의 전화 통화는 계속 이어졌다.
“우섭아. 근데 현석이는 뭐 하냐?”
-현섭이 녀석 방금까지 베개 싸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크크크. 너하고 현석이.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 이제 다시 뛰자.”
-네. 형.
“그래. 그럼 일정 확인해. 나랑 재영이도 바로 들어갈 테니까.”
-그럼. 조심해서 오세요.
“조심?”
-네. 이제 사람들이 사고 나는 건 없어야죠.
“그래. 고맙다.”
태화가 전화를 끊자 한재영이 웃으며 말했다.
“짜식들. 생각보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네.”
“응. 현석이 녀석 우리 나오고 베개 싸매고 누운 걸 보면.”
그때였다. 한재영은 문득 뭔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태화야.”
“왜?”
“우리가 지금처럼 좋아할 때가 아닌 거 같다.”
“뭔 소리야?”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다.”
“뭘……. 놓쳐?”
“일주일 후에 촬영을 연기한 건 좋은데 선혜영 님을 대체할 배우는 있는 거냐? 여주가 없는데 어떻게 촬영해.”
“…….”
“게다가 캐스팅된다고 해도 일주일은 준비하기에 너무 촉박하잖아. 시나리오 분석하는 데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야.”
“있어. 할 사람이.”
“누구?”
한재영은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너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거야.”
“너. 최수빈을 여주로 쓰겠다고?”
“지금 당장 대안이 없잖아. 네 말대로 다른 누군가를 캐스팅한다고 해도 시간이 없어. 그렇다고 촬영 일정을 뒤로 더 미룰 수도 없고. 그랬다가는…….”
“현장 스태프들의 스케줄이 꼬이겠지.”
“그래. 우리 영화에 참여하는 현장 스태프들은 모두 다음 작품 이전 공백기에 참여한 사람들이야. 어떻게 할 수 없어.”
한재영은 답답했는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 미치겠다. 이건 하나 해결하면 다른 곳에서 또 뭐가 터지니.”
“최수빈은 그나마 우리 영화 시나리오에 대해 이해가 다 되어 있는 상태야. 바로 촬영에 투입이 되어도 될 정도라고 할 수 있어. 그만한 대체재가 없는 거지.”
#.
태화와 한재영은 우신 병원에서 옥탑으로 복귀했다. 태화와 한재영이 옥탑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갑자기 옥탑방 방문이 열렸다. 그리곤 이우섭과 김현석이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태화 형!”
이우섭과 김현석은 옥탑방에서 뛰쳐나오자마자 태화에게 달려들었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 어떻게 알고 나왔냐?”
이우섭이 태화의 질문에 대답했다.
“일하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리더라고요. 올 시간도 됐고요.”
태화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희들 이러는 거 보니까 꼭 영화 촬영 다 끝난 거 같다?”
“그거보다 더 좋습니다.”
“더 좋아?”
“네. 만약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촬영이 끝날 일도 없잖아요. 그래서 더 좋습니다.”
뒤이어 김현석의 발언이 이어졌다.
“우섭이 형 말이 맞아요. 그리고 전 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 녀석이 베개를 싸매고 누웠냐?”
김현석이 머쓱했는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시겠지만 저 51%에 걸었습니다.”
태화와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의 대화를 듣던 한재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 너희들 나는 안 보이지?”
한재영의 말이 끝나자 이우섭과 김현석이 한재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이우섭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재영이 형도 보였죠. 왜 안 그랬겠습니까?”
“흠흠. 이미 늦었다.”
“형. 고생한 거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손수 운전해서 선혜영 님이 입원한 병원에도 다녀온 거 아닙니까?”
이우섭이 김현석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김현석이 한재영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재영이 형. 얼마나 피곤했겠어요. 할 일도 많은데 거기에 운전까지.”
“야. 너희 너무 티 나는 거 아니냐?”
한재영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왕 하는 거 잘 좀 해봐.”
“네. 형.”
이번에는 이우섭이 한재영의 한쪽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재영이 거드름을 피우듯 말했다.
“아. 시원하다. 피로가 싹 풀리는 거 같다.”
“형. 제가 나름 이런 거 잘합니다.”
“음. 그런 거 같다.”
태화는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의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영감님. 보기 좋네요.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기분이 좋네요.]
[태화 군. 그게 인생이고 행복이네. 나뿐 아니라 나와 가까운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거 말일세.]
[영감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이 기쁨도 오래가지 못하게 되는 게 유감이구먼.]
[저도 이 행복감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
다음 날 태화는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과 연출 제작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지금까지 정리된 내용을 점검해 보자. 재영아.”
“오케이. 어제 말한 대로 영화 촬영은 일주일 정도 연기를 해야 할 사항이야. 그래서 점검해야 할 사항들이 있어. 우선 스태프들하고 연기자들에게 연락하는 거야.”
“…….”
“이 부분은…. 태화 네가 말해야 할 거 같다.”
태화는 한재영이 왜 이 발언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선혜영을 대체할 여주 때문이었다.
“일단 오늘 대체 여주로 생각하고 있는 수빈이를 만날 생각이야.”
이우섭이 궁금한 표정으로 태화에게 물었다.
“최수빈 님이 여주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여 준다면 저희야 좋지만…….”
“일단 부딪쳐 봐야지. 스태프들하고 연기자들에게 연락하는 건 뭔가 결정이 나면 그때 하기로 하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정말 가슴 떨리는 날의 연속이네요. 어제 정원석 님이 계속 남기로 해서 한시름 놓았었는데…….”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섭아. 그거 재방송이야.”
이우섭이 방금 한 발언은 어제 한재영이 태화에게 했던 발언과 유사했다.
“네. 재방송은 송출 그만하겠습니다.”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이 발언했다.
“저는 이번에도 51% 걸겠습니다.”
이우섭이 김현석에게 물었다.
“왜 51%야? 더 써도 되는 거 아니냐?”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설레발 치는 거 같아서요.”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 걱정이 뭔지 안다. 하지만 지금은 회의 시간이니까 거기에 집중하자.”
“…….”
“무언가 불확실할수록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알겠어?”
이우섭과 김현석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재영아. 회의 계속하자.”
한재영이 계속해서 회의를 진행했다.
“그럼. 다음 사항으로 넘어갈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촬영 장소인데…….”
한재영의 발언이 끝나자 이우섭이 대답했다.
“우선 헌팅 장소는 오늘부터 직접 다니면서 직접 체크할 생각입니다.”
“얼마 정도 걸릴 것 같아?”
“며칠 안 걸릴 겁니다. 저희가 촬영 예약을 하고 잡은 곳은 몇 군데 없어요. 대부분은 야외 골목 촬영이고요.”
“그럼. 우선 촬영 예약한 곳 먼저 가서 일정 연기할 수 있는지 알아봐. 골목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번 체크하고.”
“알겠어요.”
“근데 철거 예정지 거기는 어때?”
“네. 거기는 어제 재개발 조합에 연락을 해봤는데 촬영 일정이 연기가 되어도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철거 작업은 몇 달 후에 시작한답니다.”
“그럼. 그곳은 문제가 없는 거고.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정리된 거 같은데……. 더 할 말 있는 사람?”
“…….”
“그럼. 회의를 끝내겠습니다. 각자 맡은 일에 집중합시다.”
#.
태화는 회의를 마치고 옥탑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화는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윤주 누나.
태화는 송윤주를 통해서 최수빈의 집 주소를 알아낼 생각이었다. 태화는 송윤주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송윤주가 전화를 받았다.
-오. 태화니?
“네. 누나. 잘 지내고 있죠?”
-나야. 뭐 그럭저럭 지내지. 근데 넌 어때?
“저도 뭐 그럭저럭 지내죠.”
-근데 선혜영 님. 몸은 좀 어때?
“어제 수술받았어요. 수술은 잘됐고요.”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선혜영 님은 앞으로 촬영 못 하는 거 아냐?
“네.”
-어머. 앞으로 어떡하니?
“그래도 정원석 님은 계속 남기로 했어요.”
-하지만 여주가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
“누나한테 그래서 전화를 했어요.”
-뭐? 그래서 전화했다고?
“네. 수빈이 집 주소 좀 알려주세요.”
-왜? 수빈이 찾아가게? 그럼. 수빈이를 여주로 캐스팅하려고?
“네. 현실적으로 수빈이가 제일 낫거든요. 캐스팅할 때도 선혜영 님이랑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었고요.”
-그랬었구나.
“누나. 혹시 수빈이 무슨 일정 잡힌 거 있나요?”
-음……. 내가 알기로는 없는 거 같은데……. 아. 맞다.
“왜요?”
-엊그제 어디 오디션 본다고 했던 거 같은데.
“오디션이요?”
-응. 큰 배역은 아니지만, 오디션이 있다고 했어.
“아……. 그래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