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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80화 (80/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0화

태화와 한재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우신 병원에 도착했다. 태화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정원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원석 님. 서태화입니다.”

-감독님. 도착하셨어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정원석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네. 병실이 어디입니까?”

-807호입니다.

“네. 그리로 가겠습니다.”

-네.

태화가 전화를 끊자 한재영이 물었다.

“병실이 어디래?”

“807호.”

태화와 한재영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다.

“태화야. 근데 자신 있냐?”

“이게 자신감을 가진다고 될 일이냐?”

“…….”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지.”

“하긴. 네 말이 맞다. 자신감으로 될 일은 아니지.”

몇 분 후 태화와 한재영은 선혜영이 입원해 있는 8층 병실 복도에 도착했다. 선혜영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는 정원석이 미리 나와 있었다.

태화와 한재영은 정원석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태화는 병원이라 크지 않은 적당한 성량으로 말했다.

“정원석 님.”

“감독님. 오셨어요.”

“네. 그나마 다행입니다. 수술이 잘돼서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화는 자신이 들고 있던 선물을 정원석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꽃을 사 오려고 했는데 요즘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심심할 때 드시라고 간식 좀 사 왔습니다.”

정원석이 태화가 건넨 선물을 받아 들었다.

“곶감이네요.”

“네. 나중에 선혜영 님이랑 같이 드세요.”

“맛있어 보입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재영아, 들어가자.”

태화의 말에 정원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감독님 혼자 들어가세요.”

“저 혼자요?”

“네. 혜영이가 감독님과 단둘이 대화하고 싶다네요.”

태화는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태화가 한재영을 향해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래.”

#.

태화는 병실 앞에 섰다.

[태화 군. 여기서 자네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이 있네.]

[뭡니까?]

[사람이 위기에 몰리면 솔직하기보다 뭔가 핑계를 만들게 마련이네. 특히 자네는 여기서 뭔가를 얻어야 하는 상황일세. 하지만 여기선 잔머리를 써서는 안 되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혜영에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요. 전 이제 제 마음을 선혜영에게 다 말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네.]

태화는 한숨을 쉬고서 병실 문을 열었다. 태화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혜영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선혜영 님. 안녕하세요?”

“아. 감독님. 오셨어요?”

선혜영은 자기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태화가 만류했다.

“그냥 누워계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가끔 이렇게 앉아 있어야 소화도 되고요.”

태화의 시선이 그녀의 수술 받은 부위로 향했다.

“선혜영 님. 깁스하셨네요.”

“네.”

“수술이 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곶감 사 왔거든요. 혹시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정원석 님에게 전해드렸으니 나중에 드세요.”

“네. 그럴게요.”

태화와 선혜영의 간단한 인사가 오고 가고 나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태화와 선혜영은 그 침묵이 어색했는지 거의 동시에 입을 뗐다.

“저기…….”

태화와 선혜영은 동시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감독님이 먼저 말하세요.”

“알겠어요. 그럼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태화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선혜영 님. 미안합니다.”

“왜, 미안해요?”

“제가 선혜영 님과 정원석 님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정원석 님을 칭찬한 건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선혜영 님이 정원석 님을 연기의 경쟁자로 생각하길 바랐습니다.”

“…….”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전 선혜영 님도 정원석 님처럼 연기할 때 내면의 에너지를 끌어내길 원했으니까요.”

태화는 말하면서 시종일관 선혜영과 눈을 마주쳤다. 선혜영은 진지한 눈빛으로 태화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선혜영의 순수한 이미지와 합쳐져서 태화를 속내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태화는 마음속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말하기에 선혜영의 그 눈빛을 흔들림 없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선혜영 님이 첫 번째 연기를 마치고 자청해서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한 것도……. 저는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부추긴 것 같아서…….”

“…….”

“그래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태화의 말이 끝나자 선혜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 참 바보스러우세요.”

“네?”

“그러면서 진심이 있는 사람이고요.”

“선혜영 님이 말이 좀 혼란스럽군요.”

“감독님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감독님이 제가 있는 자리에서 원석 오빠를 칭찬한 건 저를 원석 오빠와 연기자로서 경쟁자로 만들고 싶으신 거였잖아요.”

“그렇습니다. 두 분이 남녀 주연이니까요. 서로 경쟁자로서 나아가면 시너지가 날 거로 생각했었습니다.”

“전 그때 기분이 좋았어요.”

태화는 선혜영의 말에 살짝 놀랐다.

“기분이 좋았다고요?”

“네. 감독님이 나를 정말 여주로 대우해 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전 보기와 달리 욕심이 많아요. 촬영장에서 나와 원석 오빠. 서로 이름을 부르자고 한 것도 제가 한 거예요.”

“아. 그랬군요.”

“제가 오늘 감독님을 뵙자고 한 건 감독님이 정말 진심이 있는 사람인가 알고 싶어서예요.”

“오늘 보니까 저는 진심이 있는 사람인가요?”

선혜영은 대답 대신 잠시 창밖을 응시했다. 태화가 보기에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했다.

“감독님. 혹시 저랑 처음 만난 거 기억하세요?”

“네. 기억합니다. 정원석 님. 캐스팅되는 날 카페에서 보았었죠.”

“네. 제가 그 자리에 간 건 감독님을 뵙기 위해서였어요.”

“…….”

“물론 시나리오도 재미있었고 심수영 역할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감독님이 궁금했어요.”

“그랬었군요. 전 솔직히 조금 오해를 했었습니다. 선혜영 님이 혹시 정원석이라는 인맥을 이용하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저도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이해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선혜영이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전에 원석 오빠가 감독님과의 인연에 관해서 말했어요.”

“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에서 오빠가 했던 역할. 감독님이 오디션을 먼저 봤었고 떨어졌다는 이야기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 별 이야기를 다 하시는군요.”

“어쨌든 그 이야기 때문에 감독님이 궁금해졌어요. 이 사람은 자기의 그러한 과거도 말을 하는구나……. 그래서 오디션에 지원한 거예요. 감독님하고 일하면 괜찮을 거 같아서요.”

“그랬었군요. 저를 참 좋게 봐주셨군요.”

“오늘 감독님이 저한테 한 이야기도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대부분 이럴 땐 어떻게든 듣기 좋은 말 하고 좋게좋게 넘어가려고 하겠죠.”

“전 그렇게 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원석 님과 선혜영 님은 우리 영화에 투자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선혜영은 태화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감독님 눈빛은 참 매력적이에요.”

“네?”

“선하면서도 욕심이 보여요.”

선혜영이 한 발언은 전에 우한수가 했던 말이기도 하다.

“선하니까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할 거고 욕심이 있으니 이 영화, 아니, 우리 영화 잘 만들 거 아니에요?”

“네. 전 우리 영화 잘 만들 생각입니다.”

“그럼. 됐어요.”

“네?”

“저는 영화에서 빠지지만 원석 오빠 앞으로 잘 부탁해요.”

“…….”

“원석 오빠는 제 몸이 회복될 때까지 제 곁에 있겠다고 했어요. 바보같이.”

“그건 정원석 님이 선혜영 님을 사랑해서…….”

선혜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봐요. 감독님은 참 바보 같다니까요.”

“하하. 제가 그랬나요?”

“그럼. 아닌가요? 굳이 여기서 원석 오빠 편을 들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그게 정원석 님의 마음이니까요.”

“원석 오빠하고 감독님은 확실히 공통점이 있네요.”

“바보스럽다는 점이요?”

“네.”

태화와 선혜영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동안 웃었다.

“어쨌든 원석 오빠가 우리 영화를 포기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원석 오빠한테 이 작품은 기회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

태화는 선혜영과 대화를 끝내고 병실 문으로 다가섰다.

[영감님. 선혜영이라는 사람.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또래하고 아주 다르군요.]

[간혹 나이는 어리지만, 사람을 보는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있지. 선혜영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그런 거 같습니다.]

태화가 병실을 나서자 정원석과 한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석 님. 안에서 선혜영 님이 찾습니다.”

“네. 감독님.”

정원석은 대답하고 나서 바로 병실로 들어갔다. 정원석이 병실로 들어가고 나서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와 물었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하기는 뭐 하다만…….”

“어떻게 됐냐고?”

“그렇지.”

“알고 싶어?”

“응.”

태화가 한재영을 슬쩍 쳐다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재영이 안달이 난 듯 말했다.

“난 네가 나를 속물인 양 쳐다봐도 상관 안 한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니까.”

“일단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고 병원 밖으로 나가자.”

“알았어.”

태화와 한재영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서 병원 복도를 이동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태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감독님.”

태화는 고개를 돌렸다. 정원석이었다.

“감독님. 아직 안 가셨군요.”

“정원석 님. 어쩐 일이세요?”

“전. 혜영이의 의견에 따를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신 며칠만 시간을 주세요. 혜영이 퇴원하고 병원에 혼자 갈 수 있을 때까지요.”

“…….”

“혜영이 부모님이 지방에 계시는데 혜영이가 걱정할까 봐 부모님께 연락을 안 했거든요. 그래서 당장 돌봐줄 사람이 저밖에 없습니다.”

태화는 이제야 정원석이 영화를 포기하고 신혜영의 곁에 있으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한 일주일 정도면 될까 싶은데요.”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촬영 일주일 정도 연기해도 되지?”

“촬영 연기?”

눈치 빠른 한재영은 정원석이 영화에 계속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한재영은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일단 참았다.

“오오. 한번 확인해 볼게. 아마 괜찮을 거야.”

“오케이.”

태화가 고개를 돌려 정원석에게 말했다.

“일주일 정도는 괜찮다고 하네요.”

“고맙습니다. 감독님.”

“저야. 더 고맙죠. 정원석 님도 힘드셨을 텐데.”

“맞습니다. 솔직히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혜영이가 저렇게까지 말을 하니……. 저도 어쩔 수 없더군요.”

“저도 신혜영 님께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그 말 꼭 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뇨. 혜영이가 감독님을 아주 좋아해요. 진심인 사람이라고요. 혜영이가 연극 하면서 사람들한테 본의 아니게 상처를 많이 받았었거든요.”

연극판도 연기자가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그 과정에서 선혜영도 상처를 받았을 게 뻔했다.

태화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선혜영이 나이에 비해 사람을 보는 직관이 뛰어난지.

“선혜영 님께 꼭 쾌차하라고 전해주십시오.”

“네. 감독님.”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한다고도 전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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