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9화
태화가 정원석과의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한재영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신혜영 님. 수술 잘됐대?”
“응. 잘됐다고 하네.”
“다행이다.”
“응. 그런데 우섭이하고 현석이 어디 갔어?”
“좀 답답했는지 둘이 나가더라.”
“어디 가서 낮술이라도 하려나.”
“편의점 간다고 했으니까 아마 거기서 맥주 한 캔씩 하겠지.”
이우섭과 김현석은 촬영이 미뤄진 이상 집으로 돌아가서 대기해도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한재영의 옥탑방에 있기로 했다. 이우섭과 김현석 두 사람의 주장은 이랬다.
-지금 집에 가면 다시 못 돌아올 거 같아서요. 결정이 날 때까지는 여기 있겠습니다.
이우섭과 김현석의 태도는 사뭇 비장했다. 그래서인지 태화와 한재영은 다른 말 하지 않고 두 사람의 생각대로 하라고 했다.
“재영아. 우리도 맥주나 한잔할까?”
“태화야.”
“왜?”
“선혜영 님. 수술이 아무리 잘됐더라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태화는 한재영이 왜 이 말을 꺼내는지 알고 있었다. 한재영은 영화 피디로서 영화가 중간에 난파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현재 여주인 선혜영은 부상으로 빠질 게 분명했다. 한재영 처지에선 아주 절박한 상황이었다.
“재영이 너. 여주 때문에 그렇지? 선혜영 님이 앞으로 촬영에 참여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 나도 너한테 욕먹을 각오로 이야기하는 거야. 여배우 대체해야 하잖아.”
“재영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 전에 해결되어야 할 일이 있어.”
“해결되어야 할 일?”
“그래. 바로 정원석 님이다.”
“하지만 정원석 님은 계속 영화에 참여하지 않을까? 장편영화에 처음 주연으로 발탁이 된 건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성으로 판단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감성적으로 이 사안을 판단한다면…….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잖아.”
태화는 어제 병원에서 이우섭에겐 이성적인 판단 부분만 이야기하고 감성적인 판단 부분을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괜히 불안해하고 있는 이우섭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좀 망설여지긴 할 것 같다. 애인이 같은 영화 촬영하다가 다쳤는데 그 영화에 계속 출연하라고 하면.”
“게다가 우리가 계약금을 많이 준 것도 아니잖아.”
“솔직히 못하겠다고 하면 마땅히 제지할 방법도 없지. 촬영도 어제 막 시작했고, 말이지.”
선혜영의 사고는 촬영 첫날 발생한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만약 촬영 중간에 사고가 났다면 태화로선 더 난감할 수 있었다. 만약 여배우를 대체한다고 해도 앞에 촬영했던 부분을 다 못 쓰게 되고 선혜영의 상태가 좋아지길 기다렸다가는 스태프들의 스케줄 때문에 더는 촬영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촬영 첫날 사고가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정원석은 한 씬만 촬영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불참하는 데 부담이 없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태화는 남녀 주연 배우를 새로 뽑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정원석과 선혜영은 꽤 높은 수준의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어제 보여준 정원석의 연기는 어떤 연기자도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아니다. 조 단역도 아니고 남녀 주연을 단 며칠 만에 정원석과 선혜영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어느 쪽 상황이든 태화는 영화를 완성 못 하므로 공모전에서 받았던 지원금을 다 토해내야 하는 최악의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정원석 님이 우리 영화에 계속 출연하는 건 너하고 나, 어쩌면 정원석 님과 선혜영 님을 뺀 사람들의 욕심일 수도 있어.”
“그건 그렇지.”
한재영은 답답한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태화 군.]
[네. 영감님.]
[선혜영이 내일 자네와 만나자고 한 건 아마도 담판을 지으려고 하는 걸게야.]
[담판?]
[선혜영은 분명 자네와 일대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걸세.]
[왜 그런 거죠?]
[아마 확신이 필요해서 그럴 걸세.]
[확신이요?]
[그건 아마도 자네에 관한 확신이겠지. 자네의 의지 같은 거 말일세. 그런데 말일세. 자네나 나나 한 가지 잘못 판단한 게 있네.]
[잘못 본 거요?]
[그렇네. 정원석이 선혜영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거로 판단했던 사실 말이네.]
[그렇다는 말은 그 반대란 말이군요. 선혜영이 정원석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거군요.]
[난 그렇게 보고 있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정원석을 캐스팅할 때 그런 말을 했었죠. 주변 사람 대부분 반대했고 찬성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그렇다면 찬성한 사람이 선혜영이군요. 그래서 자신도 오디션에 참여했고.]
[그렇다고 할 수 있네.]
[그렇다는 건 선혜영이 키를 쥐고 있다는 말이군요.]
[맞네.]
한재영이 미치겠다는 듯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야. 진짜 어떡하냐? 그래도 방법은 찾아야 할 거 아냐? 너 방법이 있는 거지?”
“하나 있어.”
한재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태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있다고? 그게 뭔데?”
“결국 키는 선혜영 님이 쥐고 있어.”
한재영은 태화의 의견에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재영은 한 줄기 희망을 보는 듯했다.
“네 말이 맞아. 선혜영 님이 정원석 님에게 우리 영화에 계속 참여하라고 말한다면…….”
“정원석 님 처지에선 딱히 거부할 명분이 없지.”
#.
이우섭과 김현석은 편의점 밖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한재영이 말한 대로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마른오징어와 땅콩, 그리고 짭짤한 맛의 스낵이 안주로 놓여 있었다.
김현석은 캔맥주를 따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이우섭이 김현석을 말리며 말했다.
“야. 인마. 무슨 술에 화풀이하듯이 마시냐?”
이우섭의 말에 김현석이 한탄하듯 말했다.
“아. 정말 미치겠네요. 지금쯤 열심히 촬영하고 있어야 하는데.”
“야. 인마. 흥분하지 마.”
“형은 걱정도 안 돼요?”
“야. 왜 안 되겠냐?”
“…….”
“걱정은 되지만 난 태화 형을 믿는다.”
“저도 태화 형을 믿어요. 하지만…….”
“말을 끝까지 해. 하지만 뭐?”
“그 믿음과는 별개로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때였다.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태화였다.
“내가 우리 막내한테 믿음을 덜 얻었구나.”
이우섭과 김현석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어. 형. 웬일이세요?”
태화와 한재영은 정원석과 신혜영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바로 이곳으로 이동했다. 이곳으로 오자고 제안한 건 태화였다. 그동안 촬영 준비하면서 제대로 맥주 한잔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차라리 이럴 때 같이 맥주 한잔 마시면서 서로를 격려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우섭과 김현석이 자리 잡은 테이블에는 의자가 두 개밖에 없었다. 태화가 옆 테이블을 보았다. 옆 테이블에 사람이 없었다. 태화가 옆 테이블에서 의자 두 개를 빼서 가져왔다. 자리 하나는 한재영의 자리다.
태화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이우섭이 태화에게 물었다.
“근데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 나도 맥주나 좀 마시려고 왔지. 너희들하고 이야기도 좀 하고.”
“아. 그렇군요.”
잠시 후 한재영이 편의점에서 캔맥주 몇 개를 사서 태화가 있는 자리로 와서 앉았다. 한재영이 캔맥주를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 너네 무슨 얘기 했어?”
이우섭과 김현석은 한재영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치 빠른 한재영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신세 한탄하고 그랬냐?”
이우섭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 그렇죠.”
“지금은 솔직하게 말해도 돼.”
뒤이어 태화가 발언했다.
“재영이 말대로 솔직하게 말해도 돼. 괜히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현석아.”
“네?”
“할 말 있으면 해.”
김현석은 말하기 전에 캔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저 불안해요.”
“네 심정 이해한다.”
“지금까지 내가 일해온 거 모두 수포가 될 거 같아서요.”
김현석은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화 형.”
“그래.”
“저.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한 가지 일에 몰두해 본 적이 없어요. 일하는 게 너무 재미가 있었고요. 형들하고 일하는 것도 너무 재밌었고요. 그런데 만약 여기서 영화가 엎어지면……. 끝이잖아요.”
태화는 김현석의 발언을 듣고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감님. 현석이한테는 뭔가 처방이 필요하겠어요.]
[나도 자네의 의견에 동감일세. 김현석은 현재 너무 부정적인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네.]
[그러게, 말입니다. 저래서는 어떤 말이든 먹히지 않죠.]
[이럴 땐 충격 요법이 필요하네.]
[충격 요법이요?]
[현 상황에서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방법이 뭐겠나?]
[영감님 말이 어떤 의미인 줄 알겠어요.]
태화는 자기 손바닥으로 김현석의 등을 세게 쳤다. 그러자 김현석이 놀란 눈으로 태화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태화의 행동 때문이었다.
이럴 때 ‘괜찮아. 잘 될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게 보통 아닌가?
놀란 건 김현석뿐만이 아니었다. 한재영과 이우섭도 태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정신 차려. 현석아!”
“네?”
“아직 결론이 난 게 아니야. 근데 너는 왜 결론이 난 것처럼 굴고 있어?”
“아니. 전 그게 아니라…….”
확실히 충격 요법은 효과가 있었다. 김현석의 머릿속은 현재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으니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도 날 리가 없었다.
“현석아.”
“네. 형.”
“이 작품은 처음에 만들어질 가능성 1%로 시작한 영화다.”
한재영이 태화를 말을 받아쳤다.
“아니. 1%로도 높아. 난 한 0.5% 정도로 봤다. 솔직히 이 제작비로 장편을 만든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재영이 말대로 1%보다 낮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동안 난 그 가능성을 조금씩 높여서 여기까지 왔어.”
“…….”
“그런데 현재 가능성은 어제 사고 때문에 다시 낮아진 상황이지. 하지만 난 다시 그 가능성을 다시 올릴 작정이다.”
태화가 가능성을 다시 올린다는 말에 김현석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거예요?”
“내가 방법을 말하기 전에 우리 네 사람만큼은 부정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럴 수 있지?”
“네. 그럴게요.”
“좋아. 그럼. 내 말 잘 들어.”
태화는 편의점에 오기 전 한재영과 옥탑방에서 했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현석과 이우섭은 태화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태화의 이야기를 듣고서 이우섭이 말했다.
“태화 형. 고마워요. 숨기는 거 없이 말해줘서요.”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이 발언했다.
“저도요. 고마워요.”
“당연한 거 아니냐? 날 믿으라고 하면서 뭘 숨겨서는 안 되지.”
“결국 선혜영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관건이군요.”
“그렇지.”
“형은 선혜영이 어떻게 나올 거로 생각해요?”
“난 현재 반반이라고 본다.”
“반반이라.”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가능성은 조금은 올라갈 거로 보고 있어.”
“그럼. 전 51%에 걸겠습니다.”
김현석이 이우섭의 발언에 동의했다.
“저도 51%에 걸겠습니다.”
이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51%에 걸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