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8화
태화는 이한철의 질문에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한철이 형. 지금. 차 좀 준비해 줘요. 고통이 심한 거 같아요. 빨리 병원에 가야겠어요.”
“알았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든 채 자신의 차를 빼기 위해서 문밖으로 나갔다. 몇 초 사이로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정원석이 도착했다.
정원석이 선혜영을 보며 말했다.
“혜영아. 혜영아.”
선혜영이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흑흑. 원석 오빠,”
“그래. 조금만 참아.”
선혜영의 비명 때문인지 몇 명의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사람 다친 거야?
-무슨 일이래?
-어쩌다가?
-무슨 영화 찍는다더니.
-어머 많이 다쳤나 봐.
태화는 순간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짜증이 났다.
-여기 무슨 구경났습니까! 사람 다친 게 재밌어요!
태화는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태화는 여기서 화를 낼 수 없었다. 이곳은 한재영이 사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차를 가지러 갔던 이한철이 다시 등장했다. 태화는 이한철의 등장이 반가웠다.
이한철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서둘렀고 상당히 이른 시간에 다시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화야! 어서 태워!”
“알겠어요.”
태화가 정원석을 보며 말했다.
“선혜영 님 저 차에 태워야 합니다.”
“네.”
정원석은 대답하고 나서 바닥에 누워 있는 선혜영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동시에 이우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우섭은 재빨리 이한철의 차로 이동해서 선혜영이 차에 탈 수 있게 뒷문을 열어주었다.
정원석은 선혜영을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선혜영의 옆자리에 탑승했다.
태화와 한재영도 뒤이어 문밖으로 나갔다. 현재 상태에선 여기 있는 사람이 이한철의 차에 다 탈 수가 없었다. 나가자마자 태화가 이우섭에게 지시했다.
“우섭이는 그 차 타고 먼저 출발해. 나하고 재영이는 다른 차로 뒤따라갈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우섭은 대답하고 나서 조수석에 탑승했다. 그러자 이한철은 선혜영을 태운 자신의 차를 출발시켰다.
“태화야. 너하고 난 내 차로 가자.”
“그래.”
태화와 한재영은 한재영의 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태화와 한재영은 차를 타고 선혜영이 간 병원으로 이동 중이었다. 선혜영은 촬영장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인 우신 병원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태화와 한재영이 탄 차가 신호등에 걸렸다. 한재영은 차를 세우고 나서 길게 한탄탰다.
“아. 진짜 이게 뭐냐?”
“그러게, 말이다.”
“태화야. 근데 어떡하냐? 아까 보니까 좀 많이 다친 거 같던데.”
“…….”
“나도 그게 걱정이다.”
“너. 그거 알고 있지. 걱정해야 할 건 선혜영 님 다친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네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어.”
한재영이 말하려고 하는 게 앞으로 남은 촬영 일정이다. 선혜영이 다친 건 안된 일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촬영 일정도 중요하다.
현재 촬영에 참여하는 스태프와 연기자는 공백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촬영을 길게 미룰 수 없다. 즉 선혜영의 부상 상태가 며칠 만에 완치가 되면 모르겠지만 현 상태론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다.
한재영이 매정하게 말한 거로 보일 수 있지만, 영화의 진행을 해야 하는 피디로선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한 것이다.
[태화 군. 혹시 선혜영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게 걸리는가?]
[네. 지나고 나서 드는 생각이죠.]
[자네의 심정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자네의 잘못은 없네. 이건 그냥 사고일 뿐이네.]
[그렇죠. 사고죠.]
[앞으로 몇 시간 후에 자넨 힘든 결단을 해야 하네.]
힘든 결단. 그건 여주를 교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알고 있습니다.]
신호등의 색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한재영의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우신 병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
얼마 후 선혜영은 정형외과에서 몇 가지 검사를 받고 정원석과 함께 진찰실을 나왔다.
선혜영은 정원석의 부축을 받고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태화가 정원석과 선혜영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태화는 선혜영과 정원석의 표정을 살폈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정원석이 태화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의 말투는 무거웠다.
“상태가 가볍지 않습니다.”
“…….”
“발목 인대가 끊어져서 수술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아.
태화의 뒤에 서 있던 한재영과 이우섭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태화는 조금이라도 기대를 걸어보았지만 역시 선혜영의 상태는 수술받아야 할 정도로 안 좋았다.
“그럼. 수술하셔야죠. 비용은 제가 내겠습니다.”
태화가 시선을 돌려 선혜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은 일단 몸을 잘 추스르세요.”
“네. 감독님. 알고 있어요. 근데……. 흑흑.”
선혜영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저. 안 되는 거죠?”
태화는 선혜영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독님. 저 너무 억울해요. 흑흑…….”
태화는 선혜영의 억울하다는 말이 가슴에 내리꽂혔다. 생애 처음 맡은 장편영화 주연. 선혜영은 이 작품을 위해 그간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해왔었다. 그런데 촬영 중 사고로 자신의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간 것이다.
억울하다는 이 말보다 선혜영의 현재 마음 상태를 잘 표현할 단어가 있을까?
[영감님. 전 선혜영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네요.]
[그렇네. 태화 군. 이 순간 선혜영에게 어떤 말이 위로되겠는가?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독이 될 수밖에 없네.]
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눈시울이 붉어졌을 뿐이었다.
태화의 이 행동엔 어떤 의도도 없었다. 선혜영의 현 처지에 대한 공감에서 나온 행동일 뿐이었다.
잠시 후 간호사가 선혜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선혜영 님 보호자분?”
정원석이 바로 대답했다.
“네. 접니다.”
“지금 수속 밟으세요.”
“알겠습니다.”
정원석이 선혜영을 향해 말했다.
“혜영아. 나 잠깐 갔다 올게.”
선혜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가 시선을 한재영에게 돌렸다.
“재영아. 같이 다녀와.”
한재영은 태화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재영은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정원석과 함께 병원 수속을 밟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이우섭은 우신 병원을 나섰다. 선혜영은 내일로 수술 일정을 잡았다. 선혜영은 우선 발목의 상태가 악화하지 않도록 처치를 받고 현재 병실에서 수술 대기 중이다.
정원석은 병실 앞까지 나와서 태화 일행을 배웅했다. 정원석은 병원 정문까지 나오려고 했지만, 태화가 이를 말렸다. 그래서 정원석은 병실에서 선혜영과 함께 있다.
이우섭은 선혜영이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현장에 남아 있는 김현석에게 알렸다. 그래서 현재 모든 스태프는 촬영장에서 철수한 상태다.
마지막으로 이한철은 카메라를 한재영의 옥탑방에 두기 위해 이미 병원을 출발한 상태였다.
세 사람 중 한재영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나마 수술 날짜가 빨리 잡힌 걸 위로 삼을 수밖에 없겠다.”
태화가 한재영의 말을 받았다.
“그러네.”
“참. 사람 인생 모른다더니…….”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병원비는 어떻게 메울 거야?”
“내가 개인적으로 모아둔 돈 있잖아. 거기서 지출해야지.”
“진짜. 공모에 안 붙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거고…. 정원석은 앞으로 어떻게 할까?”
“뭘?”
“뭐겠냐? 영화에 계속 출연할지 여부지. 혹시 물어봤어?”
옆에서 태화와 한재영의 대화를 듣던 이우섭이 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태화 형.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태화는 이우섭의 표정을 살폈다. 이우섭의 얼굴엔 약간의 초조함 같은 게 느껴졌다.
[태화 군. 이우섭이 초조해하고 있구먼.]
[왜. 안 그렇겠습니까? 제가 우섭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어쨌든 현재는 위기 상황일세. 이럴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네.]
[그게 뭡니까?]
[생각보다 큰일은 아니네. 이런 위기 상황에선 흔들리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지. 이럴 때일수록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네.]
[마음을 잘 다독이라는 말이군요.]
[그렇네.]
[그런데 정원석은 영화에 계속 참여할까요?]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참여하게 해야죠.]
[아주 좋은 답변일세. 좋은 리더는 결과를 가져오는 사람이지.]
태화가 이우섭에게 말했다.
“우섭이 너 초조하냐?”
“네. 좀 그렇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요.”
“…….”
“만약 여기서 영화가 엎어지면 전 정말 억울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그럼. 정원석 님은 우리 영화에 계속 참여할 거란 말입니까?”
“아직 확신할 정도는 아냐.”
“그럼?”
“정원석 님은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성격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 선혜영 님에게 일어난 일은 그냥 사고일 뿐이야. 누구도 잘못한 사람이 없어. 잘못한 사람이 없으니 탓할 사람도 없는 거지.”
“정말 형 말처럼 되었으면 좋겠네요.”
“우섭아. 걱정하지 마라. 어떻게든 우리 영화 완성할 거니까.”
“…….”
“난 말이야. 만약 정원석 님이 참여 안 한다고 해도 영화는 완성할 거다.”
“네? 어떻게요?”
“정 안되면 내가 박성욱 역할 하지 뭐.”
이우섭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그건 안 돼요!”
“뭐?”
“형. 연기 되게 못한다면서요.”
“뭐? 누가 그래?”
이우섭이 슬쩍 눈길을 한재영에게 돌렸다. 이어서 태화도 시선을 한재영에게 돌렸다.
그러자 한재영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내가 뭐……. 거짓말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한재영은 말을 마치고 나서 재빨리 뛰어갔고 뒤이어 태화가 한재영의 뒤를 쏜살같이 따라갔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혼자 자리에 남게 된 이우섭도 바로 두 명을 쫓아갔다.
“같이 가요.”
#.
다음 날.
태화는 어제 한재영의 옥탑방으로 돌아와서 모든 스태프에게 촬영을 며칠 연기하겠다고 공지했다. 촬영이 며칠 연기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기에 스태프들은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태화는 스태프들 외 영화에 참여하는 연기자들에겐 선혜영 사고 관련 일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그냥 촬영 연기만을 공지했다. 이건 태화가 굳이 연기자들까지 혼란을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선혜영의 수술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정원석에게 연락했다.
“정원석 님. 선혜영 님 수술은 잘 끝났습니까?”
-네. 수술은 잘되었습니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정원석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태화는 직감했다. 정원석이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음을.
-감독님.
“네?”
-혜영이가 내일쯤 감독님을 뵙고 싶어 하네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전 괜찮습니다. 당연히 가야죠. 몇 시쯤 가면 될까요?”
-오후 시간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시 어떠세요?
“네.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후 2시에 선혜영 님 병실로 방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