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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77화 (7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7화

태화는 선혜영에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선혜영 님. 잠깐만 생각 좀 해보고요.”

태화가 발언하고 나서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의외네.]

[뭐가 의외입니까?]

[난 자네가 바로 선혜영의 청을 들어줄 거로 알았는데 말일세. 현재 선혜영은 자신이 연기한 장면이 한 번에 오케이가 나자 자신감이 순간 급상승한 상태이지 않은가?]

[배우가 자청해서 연기를 더 해보겠다는데 감독으로서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죠.]

[그러니 하는 말일세.]

[그냥 바로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제가 좀 없어 보이잖아요. 크크크.]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

[당연히 그건 아니고요. 앞으로 촬영 일정이 많이 남아 있는데 처음부터 너무 힘을 쓰는 게 아닌가 해서요.]

[음. 이해하네. 감독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고민이기도 하니까.]

감독은 연기자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최선의 연기를 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부리게 되면 연기자는 페이스 오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혜영의 청을 안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네.]

[네. 제가 지금껏 파악한 선혜영의 특징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네가 파악한 선혜영의 특징은 무엇인가?]

[선혜영은 예민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하지만 확신이 생기면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유형이고요.]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네.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의 사람이 한 번 발동이 걸리면 무섭긴 하지. 하지만 제동이 걸리면 급격히 냉각되는 성격이기도 하네.]

[그래서 고민입니다. 선혜영이 다시 하겠다는 연기를 허락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번엔 힘을 비축하고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지.]

[태화 군. 방법이 없는 건 아닐세.]

[방법이 있다고요?]

[그렇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네. 선혜영이 연기를 다시 하는 걸 허락하되…….]

태화는 순간 박도봉 감독이 어떤 말을 할지 알아챘다.

[한 번만 다시 하는 거로 하면 되겠군요.]

[정답일세. 그렇게 하면 선혜영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자네도 이익을 취할 수 있네.]

[그렇군요. 어차피 오케이 컷은 있는 상태니까요. 만약 선혜영이 더 좋은 연기가 나온다면 그걸 쓰면 되고요.]

[그렇네.]

가끔 감독 중엔 선혜영 같은 연기자의 열정에 휩쓸려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촬영 후반부에 가서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감독은 주연 연기자를 단거리 선수가 아닌 장거리 선수처럼 다뤄야 한다.

태화는 결정을 내리고서 신혜영에게 말했다.

“선혜영 님. 자신 있으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쉬움이 남아서 하는 거예요. 한 번 더 하면 지금보다는 나은 연기가 나올 거 같아요.”

“그럼. 저랑 약속 하나 하죠.”

“약속이요?”

“네. 이번에 펼칠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

“제가 이렇게 선혜영 님에게 약속까지 받으려 하는 건 앞으로 남아 있는 촬영이 많기 때문입니다. 선혜영 님. 약속할 수 있죠?”

선혜영은 태화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배려해 주는 태화의 태도에 고마움을 느꼈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부담 없이 한 번 더 가죠. 부담감을 내려놓으면 더 좋은 연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네. 감독님.”

태화는 선혜영과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태프들을 향해 발언했다.

“여러분. 한 번 더 테이크를 가겠습니다.”

태화의 발언에 스태프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미 오케이 한 거 아냐? 그런데 왜?

태화가 스태프들을 향해 재차 발언했다.

“여러분들이 왜 그러는지 알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이미 오케이 컷은 있습니다. 이번 촬영은 선혜영 님이 자청해서 진행하는 겁니다.”

“…….”

“그럼 첫날부터 의욕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선혜영 님에게 힘을 줍시다.”

태화가 말을 마치자 스태프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태화가 스태프들의 박수를 유도한 건 지극히 의도적이었다.

[태화 군. 방금 스태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유도한 건 좋았네.]

[제가 이번에 중점을 둔 건 균형이었습니다.]

[균형?]

[네. 정원석은 이미 스태프들의 박수와 격려를 받은 상황입니다. 당연히 여주인 선혜영에게도 박수와 격려를 해줘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명분도 충분했고요.]

[자네의 의도와는 별개로 또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졌네.]

[또 하나의 결과요?]

[그렇네. 잘 생각해 보게나. 정원석의 경우와는 반대의 결과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한 발언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영감님. 정원석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이번엔 신혜영이 저의 존재감을 느끼게 한 결과를 낳은 것 아닙니까?]

[맞네. 태화 군. 자네 여기까지 생각하고 스태프들의 박수와 격려를 유도한 건가?]

[솔직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선혜영에겐 박수와 격려를 받을 명분이 충분했으니까요.]

[어쨌든 이러한 결과는 자네에게 아주 긍정적으로 작용할 걸세.]

[네. 촬영 현장에서 정원석의 선혜영에 대한 지배력이 그만큼 줄어들겠죠.]

[바로 그거네.]

[선혜영을 캐스팅할 때 생각했던 리스크가 그만큼 주는 거죠.]

#.

선혜영은 헤어와 분장을 점검하고 나서 다시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태화의 ‘레디’ 구호에 이어 촬영 전 구호가 순서대로 이어졌다.

“스피드!”

“롤!”

“구에 일에 둘.”

마지막으로 태화가 외쳤다.

“액션!”

태화가 구호를 외치고 몇 초가 지나자 선혜영이 옥탑방 조심스럽게 열고 등장했다. 선혜영은 자신이 펼쳐야 할 연기를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첫 번째와 달라진 점은 선혜영의 연기가 보다 능숙하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선혜영의 연기가 첫 번째와 크게 다르지 않아도 판단했다. 만약 이런 분위기로 선혜영의 연기가 끝난다면 태화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촬영분 중 조금이라도 나은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어쨌든 선혜영의 연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선혜영이 마지막 대사를 치는 부분이었다.

-박성욱이 고맙다. 너 때문에 이제 내 팔자가 피겠다.

태화는 이 부분의 연기를 보면서 왜 선혜영이 자신의 연기에 아쉬움이 남았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선혜영이 첫 번째 연기할 때보다 표정과 말투가 좀 더 냉소적이었다.

‘선혜영이 연기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한 장면이 이곳이었구나. 확실히 첫 번째 했던 연기보다 극 중 캐릭터인 심수영의 특징이 드러나고 있다.’

선혜영은 마지막 대사를 치고 나서 옥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했다. 태화와 이한철도 선혜영의 뒤를 쫓아갔다.

선혜영은 계단을 내려가기 전 잠깐 멈췄다. 그리고 들뜬 표정으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이 부분도 첫 번째 촬영에선 없었던 장면이었다. 즉흥적인 연기였다.

선혜영의 이 즉흥적 연기는 정원석이 앞서 펼친 연기 영향 때문이다. 태화도 이 같은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선혜영이 방금 펼친 즉흥연기. 같은 연극배우로서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는 건 선혜영은 정원석을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태화의 생각처럼 선혜영은 정원석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다. 그 분수령이 된 건 바로 태화가 선혜영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정원석을 칭찬하면서부터다.

어쨌든 선혜영의 이 연기는 전체적인 장면의 흐름에 벗어나지 않았다. 태화는 오히려 선혜영의 들뜬 표정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확실히 첫 번째 촬영 때보다 전반적으로 느낌이 좋다. 이걸 오케이 컷으로 쓰면 되겠어.’

이제 선혜영의 연기는 마무리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선혜영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 된다. 선혜영은 카메라로 향했던 자신의 시선을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화는 마음속에서 ‘오케이’를 외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오케이’를 외칠 수 없었다.

#.

선혜영은 계단을 잘 뛰어 내려갔다. 전체 계단의 중간을 넘어설 때도 괜찮았다. 전체 계단의 4분의 3 정도를 막 지날 때였다.

선혜영은 이제 자신이 펼친 연기가 거의 끝나간다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확실히 첫 번째 촬영보다 연기할 때 감이 좋았어. 게다가 즉흥연기도 보여줬고. 감독님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하지만 선혜영은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몇 초 후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고 한순간 선혜영의 왼쪽 발목이 삐끗했다. 이 때문에 선혜영은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다음에 일어났다.

선혜영이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발목이 꺾인 상태로 계단을 밟았다.

툭.

선혜영은 자신의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은 계단을 굴러서 떨어졌다.

“으아아!”

순간 선혜영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선혜영의 비명을 듣자 태화가 이한철에게 말했다.

“컷!”

태화는 말을 마치자마자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이한철은 태화의 지시에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껐다. 그리고 스태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큰일 났다. 사고다. 사고!”

이한철은 스태프들에게 소리를 치고 나서 태화를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다. 스태프들도 깜짝 놀랐다. 그때 한재영이 나섰다.

“저하고 연출 스태프가 내려가 볼 테니까 다른 분들은 일단 여기 계세요. 우섭아! 현석아!”

한재영의 부름에 이우섭과 김현석이 재빨리 한재영에게 다가왔다.

“현석이는 여기 남고 우섭이는 날 따라온다. 우섭아. 가자.”

“네.”

김현석이 한재영에게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한재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넌. 여기 남아 있어.”

“…….”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현 상황에서 한재영의 판단은 정확했다. 영화 촬영은 기본적으로 연출부와 제작부가 진행할 의무가 있다. 현 상황에서 연출이나 제작부 스태프 한 명 정도는 현장에 남겨 놓아야 한다. 그래야 촬영 현장과 다른 곳에 가 있는 스태프 간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정원석이 한재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정원석이 반응이 늦었던 건 한쪽 구석에서 연기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선혜영 님이 계단을 내려가다가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정원석은 사고라는 말에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네? 사고요? 저도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재영과 이우섭, 김현석 그리고 정원석은 계단으로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

태화가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선혜영은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붙잡은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선혜영은 고통 때문에 눈물이 고인 채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저 너무 아파요. 흑흑.”

“선혜영 님. 조금만 참아요. 지금 바로 병원에 갈 겁니다.”

지금 상황에선 움직일 수 있겠냐고 묻는 거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그때였다. 한발 늦게 따라온 이한철이 태화에게 말했다.

“상태 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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