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6화
태화가 선혜영을 향해 말했다.
“정원석 님 말이 맞습니다. 선혜영 님은 진심을 다하시면 됩니다. 정원석 님의 훌륭한 연기도 그래서 나온 거니까요.”
정원석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사람 있는 데서 칭찬을 하니 부끄럽네요.”
“그럼 칭찬을 사람이 있는 데서 해야지 몰래 합니까?”
“하하. 듣고 보니 그렇네요.”
태화가 선혜영이 있는 곳에서 정원석을 칭찬한 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태화 군. 방금 자네가 선혜영이 있는 곳에서 정원석을 칭찬한 건 의도한 발언인 건가?]
[그렇습니다. 정원석은 이번 촬영을 통해서 욕심이 많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렇네. 만약 정원석이 욕심이 없었다면 이번과 같은 캐릭터 몰입도도 없었을 것이네.]
[그래서 즉흥적인 연기도 나온 것이고요.]
[맞는 말일세. 모두 정원석이 욕심이 없었다면 보여줄 수 없는 행동들이었네.]
[전 이번에 선혜영의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같은 자리에 있는 정원석을 칭찬한 겁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한 명이 칭찬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은 긴장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음. 일리가 있는 말일세. 감독은 영화 현장에선 최고의 권력자네. 권력자의 한마디에 연기자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게 되지. 자네는 지나가는 말로 할 수 있지만, 상대는 그걸 마냥 흘릴 수 없네.]
태화는 슬쩍 선혜영을 보았다.
[영감님. 선혜영은 자신의 연인인 정원석이 감독인 저에게 칭찬받았지만, 마냥 기뻐하는 표정만은 아니군요.]
[선혜영은 자네가 했던 행동에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거네.]
태화가 정원석을 칭찬한 후 선혜영의 표정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전의 표정이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살짝 굳은 상태였다. 선혜영은 그 상태로 시나리오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태화 군. 선혜영의 내면에 불이 붙기 시작했구먼.]
[네. 그런 듯합니다. 제가 바라던 모습이기도 하고요.]
[아마 선혜영도 정원석처럼 자네의 칭찬을 기대할 걸세.]
[연기를 잘 해낸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칭찬 아껴두었다가 엿 바꿔 먹을 것도 아니고요.]
정원석은 선혜영의 모습을 보다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태화에게 왔다.
“감독님. 전 좀 쉬고 있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근데 그냥 가세요?”
“네?”
태화는 눈으로 선혜영을 가리켰다. 태화는 당연히 정원석이 선혜영에게 격려의 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원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타이밍을 놓쳤네요. 그냥 집중하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
얼마 후 선혜영이 시나리오를 손에서 놓았다.
“감독님. 저 준비됐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연기하고 동선부터 체크할까요?”
“네.”
“먼저 선혜영 님이 연기할 동선은 정원석 님의 동선과 같습니다. 옥탑방을 나와서 계단으로 뛰어가면 됩니다. 중요한 건 옥탑방을 나올 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와야 합니다.”
“네. 박성욱이 잠에서 깨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시나리오의 설정이 살짝 바뀐 건 알고 있죠?”
“네. 제가 박성욱이 신을 신발의 좌우를 바꿔놓아야 하잖아요.”
“맞습니다.”
태화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서 사진을 찾았다. 그 사진은 이우섭이 신발의 위치를 찍은 사진으로 신발 좌우가 바뀐 사진이다.
“선혜영 님. 신발의 위치를 이렇게 맞춰야 합니다.”
선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리고 선혜영 님이 옥탑방을 나올 때 표정이 중요한데 표정 한번 지어보실까요?”
“네. 감독님. 근데 메모지 한 장만 줘보시겠어요?”
“그러죠.”
시나리오상에는 옥탑방에서 몰래 나온 심수영이 로또 복권을 보며 흥분하는 장면이 있다.
“현석아!”
태화의 부름에 김현석이 뛰어왔다.
“감독님. 찾으셨어요?”
“메모지 한 장만 주겠니?”
“네.”
김현석은 슬링백에서 메모지를 한 장 꺼내서 태화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태화는 김현석에게서 건네받은 메모지를 선혜영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준비되면 바로 연기해 볼게요. 그래도 되죠?”
“네. 편한 대로 하세요.”
선혜영은 메모지를 손에 쥔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선혜영이 연기해야 할 감정 포인트는 흥분이다. 하루아침에 몇십억의 돈이 생기는데 흥분 안 할 사람이 있겠는가?
여기에 추가로 선혜영은 박성욱에 관한 감정을 연기해야 한다. 영화에서 심수영은 박성욱에 대한 감정은 배신해도 되는 대상이다.
태화는 선혜영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혜영의 굳은 표정이 풀려갔다.
[태화 군. 슬슬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네.]
[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요.]
선혜영은 표정이 어느 정도 풀려가려던 시점에서 눈을 떴다. 그러고는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선혜영은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 바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소리를 내서 웃지 않았다.
-크크크.
선혜영의 웃음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엔 충분했다. 이후 선혜영은 손에 쥔 메모지를 바라보다 메모지에 가볍게 뽀뽀했다.
-넌 어디 있다가 내 손에 들어왔니?
선혜영이 대사를 치고 나서 고개를 돌려 옥탑방을 바라보며 다시 대사를 쳤다.
-박성욱이 고맙다. 너 때문에 이제 내 팔자가 피겠다.
태화는 선혜영의 연기가 만족스러웠다. 선혜영의 연기가 쉬운 건 아니지만 먼저 연기한 정원석에 비하면 그래도 수월한 편이었다.
“선혜영 님. 연기 좋았어요.”
“그랬나요?”
“네. 표현을 잘하신 것 같아요. 특히 크게 소리 내지 않고 웃는 연기 좋았어요.”
태화의 칭찬에 선혜영은 한시름 놓는 듯했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실제 연기에서도 지금처럼 하면 됩니다. 아셨죠?”
“알겠습니다.”
“그럼. 촬영 시작할 테니 준비해 주세요.”
선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선혜영은 대답하고 나서 밝게 웃었다.
[태화 군. 역시 배우를 웃게 하는 건 감독의 칭찬이구먼. 방금 신혜영을 칭찬한 거. 혹시 이것도 의도한 건가?]
[어느 정도는요.]
[자네는 이 타이밍에 선혜영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아도 됐었네. 칭찬을 아껴두었다가 뒤에 해도 됐을 텐데.]
박도봉 감독은 당장 칭찬하기보다는 상대를 좀 더 안달이 나게 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선혜영은 정원석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다르게 접근한다? 그렇다면 정원석과 선혜영. 둘의 차이점이 뭔가?]
[정원석은 자신이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 했고, 그에 걸맞게 주눅 들지 않고 행동했죠. 하지만 선혜영은 달라요. 제가 정원석을 칭찬하자 바로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시나리오에 집중했죠. 정원석도 선혜영이 시나리오를 검토할 땐 방해될까 봐 잘하라는 격려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그만큼 선혜영은 예민한 성격이라는 것이죠.]
[자네 말이 맞네. 배우는 각자 그 성격과 취향이 다 다르지. 자네는 거기에 맞춰서 행동한 거고.]
[좋은 판단이었다는 거죠?]
[자네도 칭찬을 듣고 싶은 건가?]
[뭐.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혹시 삐친 거 아닌가?]
[제가 뭐 이런 일로 삐치겠습니까?]
[어쨌든 자네의 칭찬 타이밍은 아주 좋았네. 아마도 선혜영은 심리적으로 불안했을 거네.]
[그게 제 칭찬으로 불안감이 풀렸단 말이군요.]
[그렇네.]
#.
선혜영은 연기를 펼치기 위해서 옥탑방에 들어간 상태다. 선혜영은 옥탑방에 들어가기 전 분장팀이 최종적으로 점검을 했고 소품으로 준비한 로또 복권도 선혜영에게 건넨 상태였다.
태화는 촬영장을 점검했다. 모든 스태프가 촬영 준비를 끝내고 각자의 자리에 있었다.
태화가 큰소리로 외쳤다.
“올 스탠바이!”
“레디!”
김현석이 슬레이트를 카메라에 갖다 대었다. 이후 촬영 전 구호를 외치는 팀이 순서에 따라서 외치기 시작했다.
“스피드!”
“롤!”
“구에 일에 하나!”
마지막으로 태화가 외쳤다.
“액션!”
태화의 외침이 있고 몇 초 후 선혜영이 백팩을 어깨에 맨 채 조심스럽게 옥탑방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선혜영이 맨 백팩은 극 중 심수영이 갈아입을 옷을 넣는 곳으로 아주 작은 가방은 아니었다.
선혜영은 자신이 신어야 할 신발인 운동화를 신었다. 극 중 심수영은 노래방 도우미 일이 끝나면 옷을 갈아입지만, 발이 불편해서 신발도 운동화로 갈아신는 설정이다.
선혜영은 유심히 박성욱의 낡은 구두를 쳐다보다 구두의 좌우를 바꿔놓았다. 선혜영은 태화가 지시한 정확한 위치에 낡은 구두를 위치시켰다. 이후 선혜영은 조심스럽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이동시켜 선혜영의 얼굴을 잡았다. 선혜영은 리허설처럼 입가에 미소를 짓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이후 선혜영은 손에 쥔 로또 복권을 잠깐 바라보다 그 복권에 가볍게 뽀뽀했다.
-넌 어디 있다가 내 손에 들어왔니?
선혜영의 대사는 리허설 때보다 좀 더 들뜬 말투였고 태화는 이 느낌이 좋았다. 선혜영이 대사를 치고 나서 고개를 돌려 옥탑방을 바라보며 다시 대사를 쳤다.
-박성욱이 고맙다. 너 때문에 이제 내 팔자가 피겠다.
선혜영은 대사를 치고 나서 옥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향해 뛰어갔다. 이한철도 선혜영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이한철이 핸드헬드로 뛰어가면서 찍기 때문에 화면은 다소 거칠었지만, 태화는 그 화면에 만족했다. 화면이 역동적이기 때문이었다.
이한철은 계단 위까지 선혜영을 따라가고 멈춰서 멀리 사라져가는 선혜영의 모습을 잡았다. 태화는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보며 미소가 지어졌다. 선혜영의 연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선혜영이 카메라의 프레임에서 사라지자 큰소리로 외쳤다.
“컷! 오케이!”
태화의 외침에 스태프들은 순간 놀랐다.
-정말? 한 번에?
스태프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첫날 촬영에, 그것도 한 번에 오케이가 나는 경우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화와 이한철은 촬영을 마치고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스태프들은 여전히 한 번에 오케이가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태화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표정들이 왜 그래요?”
한재영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정말 오케이 컷 맞는 거죠? 이런 경우가 흔치 않아서요.”
“오케이 컷 맞습니다. 선혜영 님의 연기. 괜찮았잖아요?”
“그렇긴 한데. 워낙 첫 번째 촬영을 어렵게 넘어와서.”
“걱정하지 마세요. 선혜영 님이 촬영한 이 장면 오케이 컷입니다.”
태화가 재차 오케이 컷이 맞는다고 발언하자 스태프들은 그제야 얼굴에 웃음이 감돌기 시작했다.
#.
잠시 후 연기를 마친 선혜영이 다시 옥탑으로 복귀했다.
“감독님. 어떻게 됐어요.”
“오케이입니다.”
선혜영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정말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전 이런 거로 장난하지 않습니다.”
선혜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감독님. 테이크 한 번 더 가도 돼요?”
태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연기하면서 좀 아쉬운 점이 있어서요.”
태화는 선혜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감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