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5화
박도봉 감독의 말이 이어졌다.
[아직 정원석의 연기가 끝난 게 아니네.]
박도봉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원석의 연기가 펼쳐졌다. 이제부터는 시나리오에 없는 정원석의 연기다.
정원석은 넘어진 상태에서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순간 태화와 이한철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말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계속 촬영을 이어가자는 신호였다.
이한철이 카메라를 이동시켜 정원석의 얼굴을 잡았다.
-정말 내 꼴이 우습구나. 인생이……. 내 인생이 바뀔 수 있었는데……. 고작 네년 때문에!
정원석은 이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손으로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내가 네년을 반드시 잡아서 씹어먹는다.
대사를 친 정원석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태화는 정원석의 뒷모습을 따라가려는 이한철을 손으로 제지 시켰다. 이건 태화의 순간적 판단이었다. 태화는 카메라가 정원석을 따라가는 것보다 정원석이 유유히 계단을 내려가면서 사라져가는 걸 잡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한철은 태화의 의도대로 가만히 선 채 정원석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잡았다. 정원석의 모습이 카메라에서 사라지자 태화가 외쳤다.
“컷!”
태화가 컷을 외친 후 촬영 현장은 한동안 고요했다. 모든 스태프의 이목이 태화,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다. 태화가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이우섭과 김현석이 한재영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현재 이 상황에 관해 연출부로서 궁금만 점이 많았다. 이우섭이 한재영에게 물었다.
“한 피디님. 어떻게 결정이 날까요?”
“반반이지 않을까?”
“반반이요?”
“그래. 정원석 님이 연기한 장면은 오케이와 NG의 경계선에 있다고 할 수 있어. 정원석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정원석이 연기하면서 바닥에 넘어지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야.”
이번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김현석이 한재영에게 물었다.
“하지만 정원석 님이 넘어지고 나서 정원석 님의 연기. 괜찮지 않았나요?”
“시나리오 없는 즉흥연기였지만 꽤 괜찮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감독이 바라보는 관점이 우리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아. 근데 전 이번 장면 빨리 넘어갔으면 좋겠어요.”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또 촬영하기는 좀 힘들잖아요. 연기하는 정원석 님도 그렇고 감독님도 그렇고요.”
“항상 처음이 힘든 법이지. 기다려 보자. 감독님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네.”
#.
태화는 바로 ‘오케이’를 외치지 않고 오디오 팀장 박지형을 불렀다. 아무리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 좋아도 오디오에 문제가 있으면 재촬영을 할 수밖에 없다.
“오디오 팀장님.”
박지형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네. 감독님.”
“오디오에 이상 있습니까?”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촬영 중엔 문제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고 결과 말해주세요.”
“네.”
박지형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녹음한 오디오를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박지형이 태화에게 다가와 결과를 말했다.
“확인 결과 큰 문제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태화는 오디오를 확인하고 나서 이한철에게 말했다.
“정원석 님이 넘어지는 부분부터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죠.”
이한철은 카메라를 조작해서 정원석이 넘어지기 직전 부분을 찾았다. 태화는 촬영된 부분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장면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정원석이 중심을 잃기 시작하는 부분. 두 번째 중심을 잃고 나서 넘어지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본에 없는 연기를 시작하는 부분.
[태화 군. 다행히 이한철이 정원석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잘 잡았네. 특히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부분은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네. 제가 염려했던 부분인데 잘 찍혔네요. 혹시나 당황해서 놓치지 않았나 염려했는데 말이죠.]
[이한철은 롱 테이크로 촬영하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네. 순간 정원석을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는데 말일세.]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태화는 다음 부분으로 넘어갔다. 바로 시나리오에 없는 부분을 연기한 부분이다.
[영감님. 정원석이 넘어지고 나서 즉흥적 연기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연기를 시작하기까지 텀이 좀 있구먼.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간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관객은 지루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넘어지고 나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자네의 결정이 남았네. 그 부분의 시간이 좀 길게 느껴지더라도 오케이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재촬영을 할 것인가?]
태화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전 재촬영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우선 정원석이 이번 촬영에선 보여주었던 연기는 너무 좋았습니다. 재촬영을 한다고 그 연기가 다시 나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 부분은 알겠네. 그렇다면 좀 길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앞부분의 연기가 좋았으니, 그 정도는 커버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건가?]
[아뇨. 관객은 지루하기보다는 궁금증을 가질 것 같습니다.]
[궁금증?]
[네. 분노에 치를 떨던 남주가 바닥에 넘어지고 한동안 움직임이 없다면 관객은 지루함보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음. 단순히 물리적 시간보다는 정서적 시간을 고려한 자네의 판단에 일리가 있네.]
태화는 결정하고 나서 카메라를 이한철에게 돌려주었다. 카메라를 받아든 이한철이 태화에게 물었다.
“결정한 겁니까?”
“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근데 촬영 잘하셨던데요?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그냥 집중력을 발휘했을 뿐입니다. 항상 촬영할 땐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니까요.”
태화는 스태프들을 향해 섰다.
“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제 결정을 말하겠습니다.”
모든 스태프의 시선이 일제히 태화에게 쏠렸다. 태화는 자신이 방금 결정한 사안을 큰소리로 외쳤다.
“오케이!”
태화가 ‘오케이’를 외치자마자 스태프들 사이에선 안도의 분위기가 흘렀다.
“생각보다 첫 번째 촬영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반응은 좀 의외입니다.”
태화의 발언에 스태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힘들게, 그리고 멋진 장면이 나왔는데 박수는 쳐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때였다. 이우섭이 손을 들었다.
“저 감독님.”
“무슨 일이지?”
“정말 멋지게 나왔습니까?”
“그렇다니까.”
이우섭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이번에 촬영한 장면 기대할 만하니까 맘을 놓고 박수 쳐도 됩니다.”
태화의 말에 스태프들은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태화는 스태프들의 박수 소리가 잦아들자 발언했다.
“자, 다음 촬영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태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스태프들은 다음 장면 촬영을 위해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태프 중 유독 한 명은 크게 한숨을 쉰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현석이다.
한재영이 김현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이제. 마음이 좀 놓여?”
“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촬영한다고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정원석 님도 정말 혼신의 연기를 했는데 다시 연기하라고 하면…….”
“네 말이 맞아. 정원석 님도 사람이니까. 아까와 같은 연기가 다시 나온다는 보장이 없지.”
#.
태화는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을 보다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영감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왜 제가 컷을 외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하네.]
[간단하다고요?]
[그렇네. 정원석의 출신은 연극판이네. 그래서 무대에서 항상 라이브로 공연을 했던 경험이 있네]
[그 경험이 이번 상황에서 즉흥적 연기로 발휘될 거로 생각했고요.]
[그렇네. 아마도 정원석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을 걸세. 공연 중 예상하지 못한 상황 말일세.]
[연극 공연에 NG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모 아니면 도 아니었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하지만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뭐가 더 나빠지는 건 아니었네. 자네가 컷을 외치면 그냥 NG가 되는 것뿐이었지. 더 잃을 게 없지 않은가?]
[맞습니다. 만약 제가 칼같이 컷을 외쳤다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겠죠. 제가 거기서 컷을 외치지 않아서 정원석이 자신의 즉흥연기를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죠.]
[상황이 복잡할수록 때로는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네. 내가 자네에게 NG를 외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말일세.]
태화는 옥탑에 있는 평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원석이 평상에 앉아있었다.
태화는 정원석과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정원석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저도 감독님께 고맙다고 말하고 싶네요.”
“네?”
“제가 바닥에 넘어졌을 때 그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오갔습니다. 여기서 연기를 멈춰야 하나?”
“그런데요?”
“그때 감독님이 촬영 전에 했던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본인이 컷을 외치기 전까지는 연기를 멈추지 말라고.”
“그랬었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즉흥적인 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냥 하게 되더군요.”
“혹시 연극을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된 겁니까? 공연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잖아요?”
“물론 그게 도움이 안 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어요.”
“그게 뭡니까?”
“캐릭터 몰입도였습니다.”
“캐릭터 몰입도요?”
“네. 감독님이 첫 번째 촬영이 끝나고 나서 충분한 시간을 줬잖아요. 스태프들의 격려도 있었고요.”
“그랬죠.”
“그때 전 박성욱이라는 캐릭터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까 제가 넘어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전 감독님이 컷을 외치지 않길 바랐습니다.”
“제가 컷을 외치지 않기를 바랐다고요?”
“네. 전 박성욱이라는 캐릭터에 몰입된 상황에서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성욱이 넘어지면 심수영이라는 캐릭터를 좀 더 증오할 수 있으니까요. 즉흥적 연기는 캐릭터에 몰입한 덕에 그냥 나온 겁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시작부터 명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명장면이요?”
“네. 가끔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 장면을 보면 오늘처럼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예도 있잖아요.”
정원석은 부끄러운 듯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웃었다.
“하하. 그런가요?”
“네. 그렇게 될 겁니다.”
태화와 정원석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여주인 선혜영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정원석 님. 고생 많았어요.”
“이젠 선혜영 님 차례입니다.”
“네.”
선혜영과 정원석은 서로를 편하게 불러도 괜찮았다. 평상 주변에 태화와 정원석 그리고 선혜영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원석과 선혜영은 사적인 호칭이 쓰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경우를 봐서 알겠지만 잘해야 합니다.”
정원석이 태화를 한번 쳐다보고 나서 발언을 이어갔다.
“감독님. 보통이 아닙니다. 아마도 진심을 다해야 할 겁니다.”
선혜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