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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74화 (74/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4화

정원석은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지요?”

“괜찮습니다. 근데 표정이 좋으십니다.”

“제 표정이 어떤데요?”

“자신감이 있어 보입니다.”

정원석이 작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감독님. 표정도 살필 줄 아세요?”

“그럼. 아닙니까?”

정원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부담감이 들더군요. 존재감이 생겨서 좋긴 했는데……. 막상 감독님뿐 아니라 스태프들도 날 지켜보고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그걸 극복하셨군요.”

“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첫 번째로 연기했을 때보다 더 힘을 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판단했고요.”

“좋은 판단입니다. 생각이 많다고 꼭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 거 같습니다. 감독님. 같이 동선 한 번만 더 체크할 수 있을까요?”

태화는 정원석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원석이 제안하지 않았으면 태화가 할 참이었다.

“물론이죠.”

태화와 정원석은 차분하게 연기 동선을 확인했다. 정원석은 포인트가 되는 지점마다 간략하게 연기를 해 보였는데 여러 번 연습해서 그런지 전보다 능숙했다.

태화와 정원석은 옥탑방 안에서의 동선을 체크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신발을 신는 부분이 남았다.

[태화 군. 이제야 내 궁금증이 풀리겠군.]

[그간 기다리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자네의 말투를 들어보니 확신에 차 있구먼. 어떤 해법일지 기대가 크네.]

태화는 정원석의 표정을 보았다. 정원석은 태화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듯했다.

정원석이 이야기하고 싶은 건 뻔했다. 첫 번째 촬영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정원석 님.”

“네.”

“다시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제가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네. 정원석 님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정원석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태화에게 물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잠시만요.”

태화는 고개를 돌려 이우섭을 불렀다.

“우섭아!”

“네!”

태화의 부름을 받은 이우섭이 대답하고 나서 재빨리 뛰어왔다.

“감독님. 부르셨어요.”

“그래. 우섭이가 스크립터 역할을 하니까 잘 기록해 둬.”

“네.”

“사진도 찍어두고.”

“알겠습니다.”

태화가 시선을 정원석에게 돌리며 말했다.

“아까와 같은 상황을 피하려고 시나리오의 설정을 살짝 바꾸기로 했습니다.”

“시나리오의 설정을 바꿔요?”

정원석은 태화의 말을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우섭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감독이 촬영 현장에서 시나리오의 설정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설정이 크게 바뀌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놀랄 필요까지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제가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태화는 정원석이 신게 될 낡은 구두를 집었다. 그리고서 구두 좌우의 위치를 바꾸었다. 태화의 행동을 본 정원석은 활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군요. 이렇게 하면 해결이 되겠네요.”

“네. 구두의 좌우가 바뀌어 있으니 당연히 정원석 님이 신발을 신을 때 발이 엉킬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와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태화의 아이디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 감독이 주어진 상황에 너무 빠져 있으면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태화의 설명을 듣던 이우섭이 질문했다.

“그럼 시나리오의 설정을 바꾼다는 건……?”

“여주인 심수영이 복권을 훔쳐서 달아날 때 박성욱 신발의 좌우를 바꾸는 거로 하면 돼.”

이우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박성욱은 분노한 상태이니 신발의 좌우가 바뀐 상태인지 확인할 겨를이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심수영이 나오는 부분하고 연결이 되니까 사진을 찍어놔.”

“네.”

시나리오 순서상 심수영이 나오는 부분이 먼저다. 하지만 촬영은 박성욱이 나오는 부분 먼저 이루어진다. 그래서 심수영이 박성욱 신발의 좌우를 바꿀 때의 위치와 현재의 위치가 얼추 맞아야 한다. 태화가 이우섭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허허허. 태화 군. 아주 괜찮은 해법이었네.]

[마음에 드셨습니까?]

[아주 마음에 들다마다. 무엇보다 배우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바꿨다는 게 아주 좋았네.]

[애초에 배우에게 뭔가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찾았습니다. 배우가 신발을 신으면서 허둥지둥하는 연기를 하도록 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 부분을 너무 쉽게 봤어요.]

[자네 말이 맞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방법을 생각해 냈는가?]

[떠올랐어요.]

[떠올라?]

[네. 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게 무슨 영화인가?]

[영감님도 잘 아는 영화입니다.]

[내가 잘 아는 영화?]

[네. 그 영화는 바로 <영웅들>입니다.]

[영웅들? 내 작품 말인가?]

[네. 거기에 보면 주인공 소년이 도망칠 때 지금처럼 신발의 좌우를 바꿔놓거든요.]

[맞아. 그런 장면이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그 장면이 떠올랐냐고요?]

[그렇네.]

[저하고 영감님하고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잖아요. 그래서 기억이 난 거 같아요.]

[음. 그럴 수 있네. 아무래도 첫인상이라는 게 있으니 말일세.]

#.

이우섭은 좌우의 위치가 바뀐 신발의 사진을 찍고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분장팀이 와서 정원석의 분장상태를 점검했다. 이제 재촬영을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다.

“정원석 님. 그럼 촬영 시작할까요?”

“그러시죠. 전 준비되었습니다.”

“정원석 님. 이거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뭡니까?”

“연기하다가도 제가 컷을 외치지 않으면 계속 연기를 이어가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롱 테이크잖아요.”

“그럼. 됐습니다. 이제 시작하죠.”

태화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정원석에게 다시 한번 당부한 건 배우가 상황을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스스로 연기를 멈추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이건 롱 테이크로 촬영하는 상황에선 아주 중요하다.

정원석은 대답하고 나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는 정원석이 옥탑방으로 들어가자 몸을 돌려 스태프를 바라보았다.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

“촬영 전에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오디오.”

태화의 호명에 박지형이 대답했다.

“네. 감독님.”

태화가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이한철을 보며 말했다.

“카메라.”

“네. 감독님.”

태화는 이한철의 대답을 듣고 난 후 김현석을 불렀다.

“현석아.”

“네. 감독님.”

“이제부터 촬영 전 구호는 심플하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태화의 발언에 박지형, 이한철 그리고 김현석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촬영 전 구호를 심플하게 간다는 건 꼭 필요한 부분만 구호로 외친다는 의미다.

구호를 심플하게 하면 첫 번째로 태화가 외쳤던 구호 중 ‘오디오’와 ‘카메라’가 빠진다.

두 번째는 슬레이트를 칠 때 씬, 커트, 테이크라는 단어를 빼고 숫자만 외치게 된다.

태화는 전달 사항을 전하자마자 바로 촬영에 임했다.

“올 스탠바이!”

태화의 외침에 스태프들은 긴장하기 시작했고 기대감과 염려가 동시에 교차했다.

-정원석이 이번에는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과연 이번에는 잘 될까?

태화가 촬영 전 구호를 외쳤다.

“레디!”

김현석이 슬레이트를 카메라에 잘 잡히도록 위치를 잡았다. 뒤이어 오디오 팀장 박지형이 녹음 버튼을 누르며 외쳤다.

“스피드!”

박지형이 구호를 외친 후 이한철이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른 후 구호를 외쳤다.

“롤!”

이한철에 이어 김현석이 외쳤다.

“십일 일에 둘!”

김현석이 슬레이트를 치고 빠지자 태화가 외쳤다.

“액션!”

#.

태화는 액션을 외치고 나서 촬영감독 이한철의 뒤로 가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몇 초 후 인기척이 들리고 정원석이 옥탑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한철은 카메라를 들고 이동해서 정원석의 표정을 능숙하게 잡았다. 태화는 정원석의 표정을 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태화 군. 정원석의 연기가 시작 부분에 불과하지만, 첫 번째 찍었던 부분보다 낫구먼.]

[동감입니다. 영감님. 뭐랄까? 더 강렬하네요.]

정원석이 분노를 가득 담아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감히. 네년이……. 내 복권을 훔쳐 가! 내가 너 찢어 죽인다. 이 개 X년! 으아악……!

태화는 모니터를 보며 첫 번째 연기에서 느끼지 못한 걸 느꼈다. 그건 박도봉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태화 군. 정원석의 이 연기. 첫 번째 연기했던 것보다 더 야성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구먼.]

[네. 마치 분노한 늑대 같군요.]

[분노한 늑대라……. 아주 적절한 비유일세.]

[전 정원석의 이 연기가 마음에 들어요. 이 연기가 관객의 시선을 휘어잡을 것 같습니다.]

[동감일세.]

정원석은 열정적으로 다음 연기를 이어갔다. 분노로 문짝을 주먹으로 친 정원석은 다시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정원석의 연기는 첫 번째 연기보다 힘이 느껴졌다. 태화는 정원석의 기세가 마치 모니터를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정원석은 온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정원석이 옥탑방 안에서 연기를 마치고 문 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남은 건 정원석이 낡은 구두를 신으면서 허둥지둥하는 장면이다. 정원석은 옥탑방을 나섰다. 그리고 선 채로 신발을 신기 위해 자기의 발을 낡은 구두에 넣었다. 구두의 좌우가 바뀐 상태이기 때문에 정원석의 발이 신발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정원석은 급한 마음에 뛰어가는 행동을 취했다. 그 순간이었다.

정원석의 몸이 크게 한 번 휘청였다. 정원석이 신발을 불안정하게 신은 채 뛰어가려고 하면서 몸의 균형을 잃은 것이다.

‘앗!’

놀란 태화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건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태프들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순간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만약 누군가 여기서 소리를 냈다면 동시녹음으로 진행되는 촬영이기에 NG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정원석이 온 힘을 기울인 연기는 또다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다행히 오디오 팀장 박지형으로부터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스태프들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의미다.

어쨌든 정원석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정원석의 몸이 애초에 달려가려고 했던 추진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앞으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러자 촬영장엔 일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혹시 크게 다친 거 아냐?

태화도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컷을 외쳐야 하나?’

본래 연기 동선에선 남주가 넘어지는 장면은 없었다. 남주가 어설프게 신은 신발이 벗겨지고 다시 신고 가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현재 이 상황은 예기치 않게 벌어진 것이다.

태화는 아주 짧은 시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컷을 외치기엔 정원석의 연기가 너무 아까웠다. 이 순간 박도봉 감독이 나섰다.

[태화 군. 아직 컷을 외치지 말게.]

[네?]

[내 말대로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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