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3화
이한철의 대답에 현장에 잠시 돌았던 긴장감은 사라졌다. 이한철이 대답하고 나서 이번엔 한재영이 나섰다.
“저도 촬영 감독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말이 필요 없었던 연기였습니다.”
태화는 한재영의 발언이 끝나고 나서 스태프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스태프들은 이한철과 한재영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었다.
[태화 군. 스태프들은 정원석의 연기가 훌륭했다는 의견에 관해서 동의하고 있네. 이한철의 발언이 큰 역할을 했네.]
[맞습니다.]
[근데 이한철이 나설 걸 예상했었나?]
[한철이 형은 나섰다기보다는 그냥 정원석 연기에 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하려고 했을 겁니다. 저와 함께 가장 가까이서 정원석의 연기를 지켜본 스태프니까요.]
[여기까지는 자네가 생각한 단계에서 분위기 조성 차원이겠구먼.]
[네. 진짜는 지금부터죠.]
[어떤가? 자신 있는가?]
[자신 있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잡힐 거로 봅니다. 스태프들이 한철이 형의 의견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니까요.]
[옳거니. 흐름을 정확하게 보고 있구먼.]
태화는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태화가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
“여러분. 정원석 님이 보여주었던 최고의 연기.”
“…….”
“다시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가 외쳤다.
“옳소!”
현장의 사람들은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분장을 맡은 송윤주였다.
“정원석 님의 연기 너무 좋았습니다. 저도 몇 번 작품에 참여했고 배우들의 연기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정원석 님이 보여준 연기만큼 기억에 남은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어이없게 NG가 났을 때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태화는 송윤주가 발언하고 나서 또 다른 스태프의 발언이 이어졌다. 바로 의상을 맡은 하유정이었다.
“저도 분장팀장님의 의견과 같습니다. 정원석 님이 좀 더 힘을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유정의 발언이 끝나자 ‘옳소’ ‘맞다’라는 말들이 스태프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태화는 몸을 돌려 정원석에게 다시 다가갔다.
정원석이 태화를 보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게 아까 말했던 대답입니까?”
“그렇습니다.”
“갑자기 감독님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제가 무섭다고요? 전 정원석 님에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는데요?”
“그런 의도를 말한 게 아니라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감독님은 NG가 났으니 다시 저한테 촬영하자고 해도 되는 거였습니다. 그게 감독의 권리이니까요. 하지만 감독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제가 연기했던 부분을 스태프들의 입을 통해 최고였다고 치켜세웠죠. 아마도 그 의도는 제가 다시 힘을 내서 연기하게 하는 의도고요.”
정원석은 상황 파악을 나름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의 존재감도 느꼈고요.”
“…….”
“저의 연기에 관해서 평가해 준 스태프들이 거짓을 말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스태프들은 정원석 님의 연기를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저를 무서운 감독이라고 평가하신다면 저는 좀 억울합니다.”
“이렇게 분위기를 띄워주시면 전 다음 연기에서 이전에 했던 연기보다 잘해야 합니다.”
태화는 정원석의 바로 이 대답을 듣고 싶었다. 태화는 이 대답을 듣기 위해 혼자 고민하고 스태프를 활용한 것이다.
“저는 정원석 님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거로 믿고 있었습니다.”
“스태프들을 통해서 저의 존재감을 세워주고 이렇게 변함없이 저에게 신뢰를 보내주면 전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원석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기분 좋게 말이죠. 그래서 감독님이 무섭다는 겁니다.”
“…….”
“이러다 작품이 끝날 때 감독님한테 제가 쭉 빨리는 건 아닌지.”
태화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정원석 님은 저한테 빨리는 것보다 더 큰 연기자로 성장하지 않을까 합니다.”
“감독님. 이번이 첫 작품 아니죠?”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너무 노련해서요. 보통 초보 감독이면 이런 상황에서 당황도 하고 어쩔 줄 몰라야 하는데……. 감독님은 그런 모습이 없어요. 한 대여섯 작품은 하신 듯합니다.”
“그럼 다행인 거 아닙니까?”
“네?”
“아까 촬영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첫 번째라는 인식은 버리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었죠.”
정원석은 대답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화도 정원석을 따라 일어섰다.
“감독님. 다시 촬영해야죠.”
“네. 그래야죠.”
“저한테 감정 잡을 시간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화는 대답하고 나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자, 정원석 님이 다시 힘내서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다들 박수로 힘을 줍시다.”
태화의 말이 떨어지자 스태프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명의 스태프는 정원석을 연호했다.
“정원석! 정원석!”
또다시 시작된 스태프들의 박수와 연호. 정원석은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정원석은 감사의 표시로 스태프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여러분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원석이 인사를 건네자 스태프들은 더 열광적으로 손뼉을 치며 정원석을 연호했다.
정원석은 스태프들의 이러한 환호를 뒤로하고 감정을 다시 잡기 위해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
정원석이 옥탑방으로 들어가고 나서 이한철과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한철이 형. 아까 고마웠습니다.”
태화는 이한철을 촬영감독이라는 호칭이 아닌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한철은 태화가 자신을 형이라고 호칭하자 이한철도 편하게 말했다.
“뭐가?”
“정원석 님의 연기에 관한 평가 말입니다. 그때 다른 스태프들은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부분은 태화가 놓친 부분이기도 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주연 배우의 연기에 관해서 평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촬영감독인 이한철이 평가를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촬영감독은 주연 배우의 연기에 관해서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때 제일 먼저 나셔주신 거. 고마웠습니다.”
“그 정도로 뭘 그러냐? 난 내가 보고 느낀 대로 말했을 뿐이야.”
“어쨌든 형이 나서주었기 때문에 스태프들의 분위기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정원석 님도 힘을 받았고요.”
여태껏 대화를 듣고 있던 한재영이 발언했다.
“한철이 형. 난 태화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한재영도 분위기에 맞추어 태화와 이한철처럼 편한 호칭을 썼다.
“상황이란 게 나설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서야 모양새가 좋잖아요. 특히 제일 먼저 발언하는 거 그렇잖아요.”
“난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되어버렸군.”
한재영은 발언을 마치자 시선을 태화에게 이동했다.
“태화야. 넌 머릿속에 능구렁이가 몇 마리 사냐?”
“그건 또 뭔 소리야?”
“솔직히 난 이번에 감탄했다. 네가 정원석 님에게 연기를 다시 할 걸 바로 요구하지 않아서 뭔가 다른 방법을 찾고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능숙하게 처리할 줄은 몰랐다. 장편영화 몇 편 만든 감독도 이렇게 못 해.”
이한철이 뒤이어 발언했다.
“나도 재영이 의견에 동의한다. 배우의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 스태프를 활용할 줄도 알고. 태화 너. 스태프 활용한 거. 네가 의도한 거 맞지?”
태화는 속으로 뜨끔했다. 확실히 이한철은 일련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전 다만 정원석 님의 감정이 다치지 않게 하면서 연기를 끌어내는 데 집중했을 뿐입니다. 스태프들의 격려가 그렇게 할 거로 생각했고요.”
이한철이 태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제 얼굴을 뚫어지게 보십니까?”
“머릿속에 능구렁이가 있는 건 좋은데…….”
“그런데요?”
“너 전에 내가 알던 그 태화 맞냐?”
“네?”
“너 혹시 일란성 쌍둥이 그런 거 아니지? 내가 알던 태화는 다른 곳에 있고.”
태화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하하. 전 일란성 쌍둥이 아닙니다. 재영이가 잘 알고 있어요.”
한재영이 태화의 말을 받았다.
“한철이 형. 태화의 말이 맞아요. 태화 일란성 쌍둥이 아닙니다.”
이한철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니면 됐고.”
#.
태화와 스태프들은 촬영 준비를 완료한 채 정원석이 옥탑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영감님. 정원석이 좀 늦네요.]
[정원석은 어쨌든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게 됐네. 당연히 자신의 연기를 준비하는 데 좀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을 걸세. 그런데 신발 신는 장면 어떻게 할 건가?]
정원석이 신발 신는 장면. 만약 태화가 롱 테이크가 아니라 커트를 나누어서 가는 촬영을 택했다면 이 장면은 아무것도 아닌 장면이 될 수도 있었다. 해당 부분만 촬영하면 문제는 해결된다. 하지만 롱 테이크로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신발 신는 장면이 현재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첫 번째 촬영처럼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안 되겠죠.]
[그렇네.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애초에 차단해야 하네. 그런데 자네의 말투를 보니 뭔가 해법이 있는 듯하구먼.]
[역시 영감님은 못 속이겠네요. 네. 해법이 있습니다.]
[해법이 있다니 다행이구먼. 근데…….]
[지금 얘기해 줄 수 없냐고요?]
[그렇네.]
박도봉 감독은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다. 태화는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싫은데요?]
[뭐라?]
[영감님도 뭔가 조언을 해줄 때 바로 답을 주지는 않잖아요.]
[흠흠. 그야.]
[제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겠죠.]
[잘 아는구먼.]
[영감님의 심정. 잘 압니다. 정원석이 신발 신는 장면. 어찌 보면 중요할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요.]
[그러니까 말일세.]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알게 될 겁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에게 끝내 그 해법을 알려주지 않았고 박도봉 감독도 젊은 제자인 태화에게 더는 알려 달라고 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자신이 마치 태화에게 생떼를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흐음. 알겠네.]
#.
옥탑방의 문이 열리고 정원석이 밖으로 나왔다. 정원석의 얼굴을 본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 군. 정원석의 얼굴을 보게나. 표정이 많은 걸 이야기하고 있구먼.]
[그렇습니다. 영감님. 정원석의 표정은 진지하지만 굳은 표정은 아닙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있다는 거겠죠.]
태화가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바로 자기의 경험 때문이다. 태화는 요즘 자신감이 넘쳐 있었고 거울을 볼 때마다 정원석이 현재 짓고 있는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태화는 자신이 요즘 자주 짓던 표정이니 당연히 그걸 몰라볼 수 없었다.
[그렇네. 사람은 뭔가 있을 때 저런 표정을 짓게 되지. 특히 배우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뭔가 보여줄 게 있다는 의미일세.]
[그럼. 이번에 정원석이 펼칠 연기는 기대해도 되겠군요.]
[아마. 그래도 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