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2화
이제 남은 건 영화 속 남주인 박성욱이 낡은 구두를 신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건 정원석이 신발을 신으면서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연출되어야 한다.
정원석은 신발을 신기 위해서 움직였다. 이한철도 정원석의 움직임에 맞춰 카메라를 움직였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가 터졌다.
정원석이 신발을 신으면서 허둥지둥해야 하는데 계획과 달리 한 번에 신발이 너무 잘 신어졌다. 순간 감독인 태화, 연기를 펼치는 정원석 그리고 촬영감독 이한철은 황당했다. 세 사람의 마음은 똑같았다.
-어라? 이게 아닌데?
정원석이 낡은 구두를 신는 장면을 되돌려 보며 이랬다.
마치 낡은 구두가 정원석의 발을 잡아당기듯 정원석의 발이 그 구두에 쏙 들어갔다. 이 때문에 정원석은 허둥지둥하는 연기를 펼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실제 촬영 전 동선을 체크하면서 했던 리허설 연기 과정에서도 이런 장면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터진 것이다.
태화는 여기서 ‘컷’을 외쳐야 했지만, 그 짧은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심경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장편영화 연출에 첫 번째 씬 촬영 그리고 아주 괜찮았던 배우의 연기. 모든 것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태화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다.
[태화 군. 아쉽지만 여기서 끊어야 하네.]
[젠장! 연기 너무 좋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알아요. 그런데 정말 너무 아깝군요.]
[아깝지만 더 나은 걸 위해서일세.]
박도봉 감독이 방금 발언은 태화의 마음을 다잡게 했다.
[그래요. 제가 노량진 학원을 관둘 때도 그랬죠. 아쉬움을 뒤로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죠.]
태화는 아쉽지만 ‘컷’을 외치기로 했다.
“컷! NG!”
태화의 외침에 이한철이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껐다. 그리고 정원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화가 재빨리 김현석을 보며 외쳤다.
“물 가져와. 얼른!”
김현석은 날렵하게 움직였다. 김현석은 준비한 생수 한 통을 태화에게 건넸다.
태화가 정원석에게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정원석 님. 괜찮아요?”
정원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태화가 정원석에게 물을 건넸다.
“일단 물 좀 마셔요.”
“네. 감독님.”
정원석은 태화에게서 건네받은 생수의 뚜껑을 딴 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 후 정원석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근데 좀 허무하군요.”
태화는 정원석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NG가 난 게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작 신발 신는 장면 때문이지 않은가.
“정원석 님의 연기. 전 아쉬움을 넘어서 안타까웠어요. 앞부분 연기가 너무 좋았거든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기하면서 저도 감이 좋았거든요.”
연기자도 느낌이라는 게 있다. 자신이 현재 연기를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느낄 수 있다.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었군요.”
이제 중요한 게 남았다. NG가 난 이상 다시 촬영해야 한다. 감독은 배우에게 연기를 다시 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배우는 그 요구에 따라야 한다. 매우 간단할 것 같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간단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영감님. 이 상황에서 풀어가기가 쉽지 않겠군요.]
[그렇네. 특히 오늘 정원석의 경우처럼 혼신의 연기를 다 했는데 다시 그 연기를 요구해야 할 경우 감독으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네.]
[자네에겐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네.]
[두 개의 선택지요?]
[그렇네. 우선 자네에게 주어진 감독 권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네.]
[그냥 닥치고 연기를 요구하는 것이군요.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정원석의 불만이 생기겠죠.]
[맞네. 자넨 배려 없는 감독이 되어버리는 것이네. 그냥 독재자가 되는 걸세.]
[독재자라. 하지만 지금은 제가 독재자가 되어야 할 만큼의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네. 현 상황이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니까 말일세.]
[그럼 다른 선택은 무엇입니까?]
[정원석 스스로 의지를 다지고 연기를 하게 하는 거네.]
[스스로 의지를 다지게 한다?]
[그렇네.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네.]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네. 한 가지 희망적인 건 정원석 자체에 있다는 것이네.]
[정원석 자체에 희망적인 게 있다?]
[그렇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바로 그 답을 태화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 이 상황이 긴급한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박도봉 감독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스스로 그 답을 찾는 걸 원했다. 태화도 박도봉 감독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정원석의 상태를 보았다. 정원석은 일단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정원석 님. 일단 좀 쉬고 계세요.”
“네. 감독님.”
#.
누군가는 태화가 첫 촬영부터 정원석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힘든 연기를 하게 한 게 실수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화의 생각은 달랐다.
정원석이 연기하는 남주, 박성욱의 분노하는 감정은 이 영화를 시종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태화는 정원석이 이 분노의 감정을 처음부터 인식하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나름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든 스태프의 시선이 태화에게 쏠렸다.
“촬영은 잠깐 쉬었다 갑니다. 언제든 바로 촬영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태화는 말을 마치고서 사람들이 없는 옥상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태화의 행동을 본 스태프는 태화의 모습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부분 현장 경험이 있는 스태프들은 말을 삼갔다. 대신에 스태프 각자는 속으로 각자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은 뭐지?
-혹시 뭐가 잘못된 건가?
-감독하고 배우하고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설마. 첫 촬영부터 뭔 일이 터진 건가?
-에이. 별일 아닐 거야.
한편 이우섭은 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다. 이우섭이 한재영에게 다가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죠? 바로 촬영 다시 안 들어가나요?”
“현 상황에선 바로 촬영 들어가기 힘들 거야. 정원석 님이 펼쳤던 연기가 만만치 않거든.”
“그럼. 정원석 님에게 휴식 시간을 준 건가요?”
“그렇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하긴 그렇긴 해요. 감독님이 저렇게 혼자 있는 걸 보면…….”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 겉보기와 다르게 눈치가 있네.”
“연출부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재영은 태화의 고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하지만 한재영은 말을 아꼈다.
“우섭이 네 말이 맞아. 연출부는 눈치가 빨라야 하지. 하지만 이 상황 너무 궁금해하지 마라.”
“네?”
“나도 이 상황에 관해서 짐작만 할 뿐 정확한 건 몰라.”
“…….”
“쓸데없는 추측보다는 지금은 감독의 판단을 기다리는 게 낫다고 본다. 우섭이 너 태화 믿지?”
“네. 당연히 믿죠.”
“그럼. 기다리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이우섭은 궁금했지만 더는 한재영에게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어요.”
#.
태화는 옥상 한쪽에 자리를 잡고 멀리 전경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아서 전경은 꽤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현재 태화는 그 아름다운 전경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말했던 희망적인 것에 관해서 곱씹고 있었다.
‘영감님은 한 가지 희망적인 건 정원석 자체에 있다고 했다. 정원석 자체에 있는 것. 그건 뭐지? 정원석의 성격? 그건 아니야. 그 정도로 영감님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리 없다. 뭔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정원석에 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
태화는 순간 자신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를 기억해 냈다.
‘맞다. 중요한 건 정원석이 스스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연기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으로써 정원석에게서 희망적인 그 무엇을 찾는 게 핵심이야. 한번 질문을 바꿔보자. 정원석이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연기하게 하도록 하는 그 무엇은 뭐지……? 앗!’
태화는 무언가 잡히는 게 있었다.
‘혹시 존재감 아닐까? 존재감이란 무엇인가? 결국 사람들이 당신이 필요하다고 할 때 생기는 거 아닌가?’
태화는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제 손에 실마리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화의 이 미소를 현장에 있는 사람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영감님.]
[답을 찾아냈는가?]
[네. 그런 거 같아요. 영감님이 말한 희망적인 것.]
[뭔가?]
[바로 정원석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뭔가?]
[바로 정원석 자신의 존재감입니다.]
[태화 군. 자네 말이 맞네. 내가 희망적인 것이라고 했던 게 바로 그 존재감이었네. 계속해 보게.]
[제가 정원석에게 당신은 중요한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 때문에 정원석의 존재감이 생긴 건 아닙니다.]
[그렇네. 배우에게 존재감이란 한 명에게 인정받는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지. 배우는 천성적으로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존재니까.]
[그러니까요. 그래서 정원석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연기하게 하려면 이 존재감을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정원석이 존재감을 느끼게 하죠?]
[그건 어렵지 않네.]
[어렵지 않다?]
[그렇네. 여기엔 자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네.]
[스태프들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이제부터 자넨 스태프들을 활용해야 하네.]
[스태프를 활용하라?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방법이 생각났으면 바로 행동하게.]
[맞습니다.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게 없죠.]
해결책을 찾은 태화는 정원석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태화는 정원석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면서 스태프들의 표정을 살폈다. 스태프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감독이 혼자 구석에서 뭔가를 생각하고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태화가 정원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정원석 님. 잘 쉬었습니까?”
“네. 근데 혼자 무슨 생각을 하고 오신 겁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잠시 후에 해드리겠습니다. 괜찮겠죠?”
“아. 네.”
태화는 몸을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돌렸다.
“여러분. 제가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
“비록 NG는 났지만, 정원석 님의 연기 어땠습니까?”
태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스태프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작품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주연 배우의 연기에 관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발언을 자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제일 먼저 이한철이 나섰다.
“촬영을 책임진 사람으로 답하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죠?”
태화로서는 이한철이 가장 먼저 대답해 주는 게 오히려 좋았다. 실제 태화와 함께 정원석의 연기를 가장 가까이서 함께 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네.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럼. 대답하겠습니다. 정원석 님의 연기는…….”
이한철이 잠시 뜸을 들였다. 이 때문에 촬영 현장은 잠시 긴장감이 돌았다. 여기서 만약 이한철이 정원석의 연기에 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한다면 현장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흐를 수도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최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