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71화 (7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1화

얼마 후 정원석이 옥탑방에서 나왔다. 태화와 정원석은 두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얼굴을 본 두 사람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정원석 님. 준비되신 겁니까?”

“네. 감독님.”

태화와 정원석은 옥탑방 문 앞에 나란히 섰다. 태화와 정원석. 이 두 사람의 모습은 꽤 사이가 좋아 보였다.

이 모습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이 영화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독과 주연 배우가 사이좋은 모습을 보인다는 건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앞으로 영화 촬영이 잘 진행되겠구나.

간혹 첫 촬영부터 감독과 주연 배우 간 트러블이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 영화 촬영의 과정은 험난한 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시작이 좋으면 사람들의 사기가 오르게 마련이다.

“정원석 님. 준비는 다 된 건가요?”

정원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준비됐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네.”

“아무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태화는 현재 정원석의 심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첫 작품에 장편 연출. 긴장이 되는 건 태화도 마찬가지다.

[태화 군. 자네의 심정도 정원석과 마찬가지겠군.]

[네. 저도 처음이잖아요.]

[긴장 풀게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독은 현장에서 긴장하면 안 되네. 감독이 긴장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연출의 리듬이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일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정원석에게 뭔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제안? 그게 뭔가?]

[서두르지 마세요. 정원석한테 바로 말할 테니까요.]

[알겠네.]

태화가 정원석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첫 주연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첫 연출입니다.”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발언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전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질 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원석 님은 어떻습니까?”

“그야 당연하죠.”

“그럼. 이제부터 방금 우리가 말했던 결과를 한번 만들어내 보죠. 그러기 위해서는 저와 정원석 님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생각을 바꿔요?”

“네. 이제부터 저와 정원석 님은 첫 번째라는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첫 번째라는 인식을 버린다고요?”

“네. 첫 연출이고 첫 주연이라는 그 인식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첫 번째라는 인식이 스스로 자신을 관대하게 대하게 하니까요.”

정원석은 태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감합니다. 나는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런 생각이 저의 부족함을 합리화하게 할 테니까요.”

“잘 아시는군요.”

박도봉 감독은 태화와 정원석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태화 군. 방금 자네가 정원석에게 한 제안은 아주 적절했네. 특히 자네가 만들어낸 성과를 적절하게 활용했다는 데에서 의미가 크네.]

[네. 제가 정원석이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계획했던 걸 눈치챘기 때문에 가능한 제안이었죠.]

[그렇네. 자네가 눈치를 챘기 때문에 정원석은 자네를 다르게 평가하게 되었네. 게다가 자네는 정원석에게 질책보단 변함없는 신뢰를 표현했었지. 그게 정원석이 자네를 향한 믿음을 갖게 한 걸세. 신뢰하는 상대의 말은 힘을 갖게 되지.]

[믿음의 힘인 건가요?]

[허허.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정원석이 가볍게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감독님. 자신 있으시죠?”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정원석 님은요?”

“감독님이 자신 있다고 하시니 저도 따라가야죠.”

“좋습니다. 그럼. 연기할 동선 다시 한번 확인하죠.”

“네. 감독님.”

태화와 정원석은 실제로 연기하게 될 동선을 확인했다. 이땐 촬영팀도 합세했다.

촬영팀의 박주성이 줄자를 들고서 정원석의 동선과 카메라의 거리를 측정했다. 박주성이 굳이 줄자를 들고서 거리를 측정하는 건 촬영할 때 정확한 포커스를 잡기 위해서다. 영화 촬영에선 감으로 포커스를 잡지 않는다. 연기자들의 동선에 따라 거리를 측정하고 그에 따라 렌즈의 포커스를 맞춘다.

#.

태화의 첫 번째 작품이자 장편영화인 <내 복권 내놔!>. 이 작품의 첫 번째 쇼트의 촬영 준비가 현재 모두 끝난 상태였다. 정원석은 첫 번째 쇼트 촬영을 위해서 옥탑방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태화 군.]

[네. 영감님.]

[보게나. 이곳의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가 모두 자네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네.]

[그렇군요.]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은 태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화는 <내 복권 내놔!> 작품을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한 명씩 눈을 맞추었다. 태화는 가장 먼저 자기 옆에서 함께 힘든 역경을 헤쳐온 한재영의 얼굴을 보았다. 한재영은 태화와 눈을 마주치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한재영 옆엔 이우섭이 서 있었다. 이우섭은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막내 김현석은 입술을 앙다문 채 슬레이트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화는 다음으로 촬영을 맡은 이한철과 눈을 맞췄다. 이한철은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철은 핸드헬드 촬영을 위해서 손에 카메라를 든 채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든든해 보였다.

태화는 다시 시선을 돌려 오디오 팀을 보았다. 팀장 박지형이 헤드폰을 쓴 채 녹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태화와 눈이 마주치자 박지형은 두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여주인 선혜영은 촬영 준비를 끝내고 다른 스태프처럼 카메라 뒤쪽에서 정원석의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자, 이제 <내 복권 내놔!> 촬영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 촬영장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태화가 정적을 깨고 외쳤다.

“올 스탠바이!”

촬영 전 외치는 구호는 보통 영화 현장에선 조감독이 진행하고 감독이 마지막에 액션을 외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저예산 영화인 이 작품에선 태화가 조감독의 역할을 겸하고 있기에 태화가 직접 구호를 외치는 중이다.

“레디!”

태화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김현석이 준비하고 있던 슬레이트를 카메라에 잡히도록 위치를 잡았다.

태화가 오디오 팀을 향해 외쳤다.

“사운드!”

태화의 구호에 오디오 팀장 박지형이 장비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서 외쳤다.

“스피드!”

사운드가 스피드라고 외치는 건 녹음 준비가 끝났다는 걸 의미한다. 이건 과거 아날로그 시절에 오디오를 테이프에 녹음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테이프에 오디오 녹음이 가능해지려면 테이프가 어느 정도 속도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충분한 속도가 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테이프가 녹음하기에 충분한 속도가 되었다는 의미로 스피드라고 외친다.

(현재 장비 대부분이 디지털화되었지만, 아직도 현장에선 ‘스피드’가 관용적으로 쓰인다.)

태화가 이번엔 촬영팀을 향해 외쳤다.

“카메라!”

이번에는 태화의 구호에 이한철이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고서 외쳤다.

“롤!”

영화를 필름으로 찍던 시절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면 실제 필름이 촤르륵 소리를 내면서 돌아갔다. 그래서 롤이라고 외치는 건 필름이 돌아간다는 것. 즉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고 촬영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카메라도 오디오와 마찬가지로 장비가 대부분 디지털화되었지만, 현장에서 ‘롤’이 관용적으로 쓰인다.)

이한철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김현석이 준비하고 있던 슬레이트를 쳤다.

“씬 십일, 커트 일에 테이크 하나.”

“딱!”

김현석은 슬레이트를 치고 나서 재빨리 카메라 뒤쪽으로 빠졌다. 이제 태화가 ‘액션’이라는 하나의 구호만 외치면 <내 복권 내놔!>의 촬영이 시작된다. 그 때문일까?

태화의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태화 군.]

[네. 영감님]

[이제 자네가 세상에 나갈 순간이네.]

[알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게.]

[영감님. 흥분하셨군요. 목소리에 열기가 느껴집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네. 안 그래도 영감님 말처럼 할 참이었습니다.]

태화는 그동안 어떻게 ‘액션’을 외칠까 나름 수많은 상상을 해보았다. 발음을 굴려 볼까? 아니면 저음의 톤으로 쿨한 척해볼까? 아니면 다른 감독들과 다르게 포즈를 근사하게 취해볼까?

태화는 수많은 상상을 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다.

-세상아! 드디어 내가 나간다!

태화는 저 밑 배에서부터 목소리를 끌어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액션!”

태화의 이 외침은 묵직하게 촬영 현장에 울려 퍼졌다.

#.

태화는 ‘액션’을 외친 후 이한철의 뒤로 가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주시했다. 잠시 후 정원석이 거칠게 옥탑방의 문을 열고서 뛰어나왔다. 이한철은 계획했던 대로 정원석의 표정을 잡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든 채 이동했다.

이한철은 카메라로 능숙하게 정원석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냈다. 그 상태에서 정원석의 분노 연기가 펼쳐졌다.

-감히. 네년이……. 내 복권을 훔쳐 가! 내가 너 찢어 죽인다. 이 개 X년! 으아악……!

정원석은 대사를 치고 나서 분노를 못 이긴 듯한 연기를 펼쳐 나갔다.

-으아!

정원석은 주먹으로 옥탑방 문을 몇 번이고 쳤다. 실제 촬영에 쓰인 옥탑방 문은 때려도 아프지 않을 소재로 이미 교체한 상태다.

이한철은 카메라로 정원석의 손을 잡았다. 문을 주먹으로 때린 정원석의 주먹엔 상처가 나서 피가 나고 있었다. 정원석의 이 상처는 실제가 아닌 분장을 통해서 미리 준비한 것이다. 태화가 주목해서 본 건 분노에 떨림을 넘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정원석의 주먹이었다.

정원석의 연기를 본 태화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박성욱의 모습이야.’

정원석의 연기는 확실히 롱 테이크에 어울렸다.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연기가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석은 자신의 연기를 잘 펼치고 있었다.

정원석은 다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고, 이한철은 옥탑방 문 앞에서 정원석의 모습을 잡았다. 옥탑방 안의 조명은 작은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만 설정했다.

창문과 가까운 곳은 밝고 뒤쪽으로 가면서 짙은 그림자가 졌는데 그 느낌이 마치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정원석이 재킷 옷을 입고 나서 한쪽 구석에 있는 신문지를 챙겼다. 그러고서 계획된 동선에 따라 정원석은 싱크대에 있는 과도를 집었다. 그리고 정원석은 신문지로 과도를 만 후 이걸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는 거야. 이 X년아!

정원석은 재킷에서 손을 빼며 낮게 신음을 토해냈다.

-앗!

정원석은 주먹의 상처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연기를 펼쳤다. 정원석이 다친 주먹을 보며 대사를 쳤다.

-아. 젠장!

정원석은 구급상자를 열어 붕대를 찾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다시 밖으로 나왔다.

한재영의 옥탑방은 오래된 구조로 문을 열면 바로 방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그래서 신발을 놓을 때는 문밖에 놓아야 한다. 이러한 옥탑방의 구조는 영화 속 주인공인 박성욱의 처지와 맞아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