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0화
박도봉 감독이 김현석을 언급한 건 염려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지금쯤 바짝 긴장하고 있을 거네.]
[아. 맞다. 현석이가 현장에서 슬레이트 오늘 처음 치죠.]
[김현석은 스태프 중에서 유일하게 작품에 참여한 경험이 없네. 경험이 없다는 건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말이기도 하네.]
[맞습니다. 우섭이도 단편 경험이 있는데 말이죠.]
[슬레이트 치는 걸 별거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네. 오늘 첫 촬영인 만큼 반드시 점검해야 하네.]
[맞습니다. 자칫 현장의 분위기가 흐트러질 수도 있죠.]
태화는 주저하지 않고 김현석을 보며 손짓했다.
“현석아!”
“네!”
김현석은 대답하고 나서 태화에게 재빨리 뛰어왔다.
“현석아.”
“네.”
김현석은 자신의 손에 슬레이트를 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김현석은 슬레이트 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슬레이트 칠 때 위치 선정은 어떻게 하지?”
“광각일 때 카메라와 가까운 곳에 있고 망원일 땐 연기자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렌즈의 종류에 따라 위치를 선정하지만, 김현석이 대답한 것처럼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아. 슬레이트 한번 쳐봐.”
“네?”
태화가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너 연습 많이 했잖아.”
“네.”
“한번 쳐봐.”
“알겠습니다.”
김현석이 슬레이트 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김현석의 심장도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그도 그럴 것이 김현석이 오늘처럼 스태프들이 많은 곳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슬레이트엔 씬, 커트, 테이크를 적는 칸이 있었고 거기엔 펜으로 적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김현석이 슬레이트엔 적힌 내용을 순서대로 외쳤다.
“씬 십일, 커트 일에 테이크 하나.”
김현석은 슬레이트에 적힌 내용을 외치고 나서 슬레이트를 쳤다.
딱!
김현석이 외친 의미는 이렇다. 씬 11의 첫 번째 커트의 첫 번째 촬영. 한마디로 이번에 촬영할 장면의 순서라고 보면 된다.
만약 NG가 난다면 그다음엔,
-“씬 십일, 커트 일에 테이크 둘.”
라고 외쳐야 한다. <내 복권 내놔!>는 모든 장면이 원 씬 원 커트 원칙이기 때문에 커트 번호가 2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감독이 콘티를 짤 때 한 씬을 여러 개의 커트로 나누었다면 그에 해당하는 커트 번호를 외치면 된다.
어쨌든 김현석은 촬영 순서를 제대로 외쳤고 슬레이트를 쳤다. 하지만 김현석의 외침을 들은 스태프들은 동시에 다른 곳을 보았다.
누군가는 하늘을 보았고 누군가는 땅을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제각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았다.
스태프들이 이런 행동을 보인 건 김현석의 발성이 너무나 어설펐기 때문이었다. 김현석은 힘 있고 간결하게 발성을 해야 했지만, 실제론 목소리만 크게 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음 이탈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김현석이 스태프와 등지고 있는 상태여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만약 김현석이 스태프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낙담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김현석 개인에겐 더 암울한 상황이 펼쳐질 게 뻔했다. 김현석은 더 위축될 거고 긴장감은 더 커지게 되는 악몽 같은 상황.
슬레이트를 제대로 치는 데 실패한 김현석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태화 군. 뭔가 처방이 필요하겠구먼.]
[네. 자칫하면 연기하는 배우한테도 영향이 있겠어요.]
태화의 우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보이는 건 눈을 감으면 안 볼 수 있지만, 들리는 건 어떻게 통제할 방법이 없다. 어설픈 발성이 자칫 연기자의 감정을 깨버릴 수도 있다.
[태화 군. 최악의 경우 슬레이트 칠 사람을 교체해야 할 수도 있네.]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네요. 현석이는 처음부터 작품에 참여했고 기대 이상 성과를 보여준 녀석입니다. 전 현석이를 믿습니다.]
[나도 자네의 믿음대로 되기를 원하네. 하지만 단순히 믿음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순 없네.]
[알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는 명심하게. 김현석이 자네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아마도 결단을 내려야 하겠죠.]
[그렇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게 할 겁니다.]
[태화 군. 무슨 방안이 있는가?]
[네. 있습니다.]
[음. 그런가?]
[이럴 때일수록 숙달된 사람의 시범이 중요하죠.]
[숙달된 사람?]
[네.]
태화는 이곳에 있는 스태프 중 한 사람을 지목했다.
“한 피디님!”
#.
한재영이 재빨리 태화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무슨 일이시죠?”
“한 피디님. 슬레이트 시범을 좀 보여주시죠.”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숙달된 조교의 시범 말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현석아.”
“네. 피디님.”
“슬레이트 좀 줘봐.”
“네.”
한재영은 김현석에게서 슬레이트를 넘겨받았다. 한재영은 바로 자세를 잡고 나서 슬레이트에 적힌 촬영 순서를 외쳤다.
“씬 십일, 커트 일에 테이크 하나.”
딱!
한재영의 외침은 김현석과 달리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 결과 스태프의 반응은 김현석이 할 때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도 숙이지도 않았다.
태화가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잘하지?”
“네.”
“근데 한 피디도 처음엔 너보다 심했어.”
김현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한 피디님?”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독님 말이 맞아. 그 작품 감독의 성질이 정말 엿 같았거든.”
한재영의 말에 태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재영이 말한 성질이 엿 같은 감독이 바로 박기영이었기 때문이다.
박기영이 누구인가? 태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연을 맡았던 작품을 연출했던 바로 그 장본인이다.
한재영 처지에선 그럴 만도 했다. 정말 성질 더러운 학부 선배였으니까.
어쨌든 김현석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듯했다.
“한 피디님. 어떻게 극복하신 겁니까?”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어.”
“간단했다고요?”
“내가 했던 방법은 시야를 좁히는 거였어.”
“시야를 좁혀요?”
“그래. 내 시선을 사람이 아닌 슬레이트에 집중한 거야.”
“시선을 슬레이트에 집중이요?”
“그래. 그런 사진 많이 봤을 거야.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배경을 날리는.”
“네. 많이 봤어요.”
“슬레이트 처음 칠 때 긴장하는 건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란 말이죠?”
“바로 그거야. 네 두 눈을 슬레이트의 글씨에만 집중해 봐.”
한재영이 슬레이트를 다시 김현석에게 넘겨주었다.
“글씨에만 집중이라.”
“그래. 어느 순간 현석이 네 눈에 슬레이트의 글씨만 보이고 사람들의 시선은 잘 보이지 않게 될 거야.”
김현석은 한재영이 말한 대로 자신의 두 눈을 슬레이트의 글씨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슬레이트뿐 아니라 스태프들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김현석은 간절했다. 그동안 해왔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너무나 싫었다.
‘해내고 만다. 이대로 가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 순간 김현석은 집중하고 있었다. 태화도 김현석의 이 모습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감님. 현석이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렇군. 아마도 김현석 인생에서 손꼽히는 집중력일 걸세.]
[네. 현석이는 그동안 열정적으로 작품에 임해왔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신이 짐이 되는 게 죽기보다 싫을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있지.]
[네. 자신의 노력한 게 헛되이 되는 걸 용납하기 힘드니까요.]
슬레이트를 바라보는 김현석의 집중력은 상당했다. 김현석은 눈을 깜빡이면서도 슬레이트에 적힌 글씨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김현석의 시야에서 스태프들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김현석의 두 눈엔 슬레이트의 글씨가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카메라 렌즈를 포커스 이동하는 것 같았다.
‘그래. 바로 이거구나.’
김현석이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좋아. 다시 가 보자. 현석아.”
“네. 감독님.”
김현석이 슬레이트를 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외쳤다.
“씬 십일, 커트 일에 테이크 하나.”
딱!
김현석은 슬레이트에 적힌 촬영 순서를 외치고 나서 스스로 놀랐다. 아까와 달리 너무나 발성이 깔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김현석의 발성에 놀란 건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스태프들은 아무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태화는 제대로 해낸 김현석이 대견스러웠다.
[영감님. 현석이 녀석. 해냈네요.]
[그러게, 말일세.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잘못된 점을 극복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 어쨌든 사과하겠네.]
[사과요?]
[그렇네. 솔직히 난 자네만큼 김현석에게 믿음을 가지지 못했네.]
[그 사과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네. 하지만 난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면 또 자네에게 결단을 요구할 것이네.]
[알고 있어요. 작품이 중요하니까요.]
[그렇네.]
태화가 김현석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현석아. 잘했다.”
“네. 감독님.”
김현석은 태화에게 대답을 했지만, 아직도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정말 제가 제대로 해낸 거 맞죠?”
“그래. 기대 이상이었어.”
“기대 이상이요?”
“응. 그래도 난 네가 몇 번 실패할 거로 예상했어. 그렇더라도 난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그런데 이렇게 한 번에 극복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저도 이렇게 금방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겸손해하기는…. 무엇보다 네가 노력한 결과다.”
“…….”
“네가 노력을 해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한 번에 성공할 수 없었어.”
김현석은 이제야 얼굴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네. 감독님. 저를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냐? 현석이 네가 그동안 해온 게 있는데.”
“제가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면 너무나 억울했을 겁니다.”
김현석은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태화가 자신의 실수에도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한재영이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근데 중요한 건 왜 빠뜨려?”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뭘?”
“이게 다 숙달된 이 조교 덕분이라고. 내가 그 고통을 견디며 발견한 비법이 통한 거지.”
김현석은 한재영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피디님. 피디님 아니었으면…….”
한재영이 다소 거만하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지금도 헤매고 있었겠지. 안 그래?”
“맞습니다.”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마무리가 어째 좀 그렇다?”
“뭐? 마무리가 어때서?”
“에이. 95점.”
“뭐가?”
“잘난 척 안 했으면 백 점인데. 잘난 척해서 5점 감점.”
“뭐? 누군 맘대로 점수를 깎아? 그것도 5점이나.”
“그야. 내 맘이지. 크크크.”
태화와 한재영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뒤이어 김현석도 웃기 시작했다.
김현석의 웃음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김현석의 웃음은 근심을 떨쳐내는 그런 웃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