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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69화 (69/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9화

[태화 군. 내가 수많은 연기자를 보아왔지만, 그중에서도 정원석은 연기에 관한 몰입도가 뛰어난 편이구먼.]

[그만큼 준비를 많이 했단 말이겠죠.]

태화의 말처럼 정원석은 공연 중이었던 시기에도 매일같이 시나리오를 보며 연기를 준비해왔다. 태화의 시선은 정원석의 얼굴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정원석의 다른 신체 부위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태화의 눈에 정원석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영감님. 역시 연기의 기초가 잘 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네. 표정 연기하라고 해서 얼굴 근육만 움직이는 건 연기 초보들이나 하는 행동이지. 얼굴 찡그리고 소리 지른다고 해서 분노라는 감정이 표현되지 않네.]

태화도 박도봉 감독이 발언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영감님. 몸 전체가 그 감정에 동화가 되어야 하죠. 일반적으로 사람이 분노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 심장 박동도 빨라지고 몸도 떨리게 되죠.]

[그렇네. 분노란 표현하기에 무거운 감정일세. 그만큼 신체도 그 감정에 다가가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네.]

잠시 후.

정원석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감독님. 준비됐습니다.”

“좋습니다. 시작하시죠.”

태화의 말이 떨어지자 정원석의 호흡이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손의 떨림도 더 강해졌다. 이어서 정원석의 대사가 이어졌다.

-감히. 네년이……. 내 복권을 훔쳐 가! 내가 너 찢어 죽인다. 이 개 X년! 으아악……!

짧았지만 정원석의 연기는 꽤 임팩트가 있었다. 리허설을 보던 스태프 그 누구도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촬영장엔 한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정적이 흘렀지만, 스태프들의 표정은 많은 걸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정원석의 연기를 보면서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화 군. 방금 정원석의 연기 어떻게 봤는가?]

[좋았어요. 하지만 다 보여준 느낌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혹시 리허설이라서 백 퍼센트 발휘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건가?]

[그런 측면도 있지만, 제 판단의 근거는 아닙니다.]

[그럼 뭔가?]

[분노란 감정이 표현하기 무겁다 보니 일부러 힘을 비축해 두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로 봤네. 태화 군.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나? 나야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알았다고 하지만…. 혹시 자네가 연기했던 경험이 도움이 된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럴지도 모른다?]

[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느껴졌어요.]

[본능?]

[네. 아. 저게 다 보여준 게 아니다.]

[음. 촉이 살아 있다는 건 좋은 일이네. 하지만 자넨 그것 외에 다른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네.]

[또 다른 상황이요?]

[그렇네. 정원석은 처음 장편영화에 주연한 배우일세. 리허설에서부터 자신의 모든 걸 보여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네.]

[네. 태도의 문제이니까요. 제가 정원석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원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네. 왜 그랬겠나?]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말이겠죠. 리허설에선 이 정도만 해도 된다는 그런 자신감 말이죠.]

[태화 군. 그것뿐일까?]

태화는 정원석의 의도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힘을 비축했다는 건 그걸 다시 터뜨린다는 의미다.

[아마도 정원석은 실전에서 좀 더 강하게 분노의 감정을 연기하겠죠.]

[그래서 정원석이 얻는 것은?]

[아마도 폭발하는 연기에 현장 사람들은 넋이 나가겠죠. 그리고 그거 하나로 정원석은 존재감을 얻게 되겠죠…. 그럼. 정원석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일부러 그랬단 말인가요?]

[그렇네. 정원석은 장편영화에서 주연을 처음 맡은 연기자일세. 연극에서 서브 주연을 맡은 게 다이고.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상황이네. 게다가 오늘 촬영 첫날일세. 타이밍도 아주 좋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말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감독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네. 감독은 여러 가능성을 놓고 판단해야 하네.]

[여러 가능성이라.]

[한번 가정해 보세나. 정원석의 강점이 감정 연기 중 분노라고 말일세.]

[자신의 강점이기 때문에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판단하겠죠.]

[그렇네. 태화 군. 이제 여기서 하나의 과제가 생겼네.]

[과제요?]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을 아는 척할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갈 것인가.]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질문에 고민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는 척을 해야죠.]

[이유는?]

[만약 모른 척을 한다면 정원석의 의도에 끌려가는 거잖아요. 그렇게 둘 수는 없죠.]

[바로 그걸세.]

#.

태화는 촬영감독인 이한철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촬영감독님. 잠깐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이한철은 현장 경험이 있는 스태프다. 이한철은 태화가 정원석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제 나누게 될 두 사람의 대화를 다른 누가 들어선 안 된다는 것도.

“알겠어요.”

이한철이 자리를 뜨자 태화가 연기를 마치고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정원석을 향해 말했다.

“정원석 님. 수고하셨어요.”

정원석은 미묘한 분위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정원석은 살짝 기대에 찬 표정으로 태화에게 물었다.

“어땠습니까? 감독님.”

태화는 왜 정원석의 표정에 기대감이 서려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정원석은 태화가 자신의 연기에 만족감을 표할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칭찬을 맡겨놓은 듯했다.

“아직 표정이 약합니다.”

정원석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정원석이 당황한 건 자신의 예상과 어긋난 태화의 반응 때문이었다. 당황한 건 정원석뿐만이 아니었다. 숨죽이며 정원석의 연기를 보았던 스태프도 마찬가지였다. 김현석이 옆에 있던 이우섭에게 물었다.

“형. 저기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요?”

“그러게.”

“저 정도면 잘한 연기 아니에요? 난 감독님이 정원석 님의 연기 칭찬할 줄 알았는데…….”

“감독님한테 무슨 생각이 있겠지.”

태화는 여전히 당황해하는 정원석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펼친 연기. 다가 아니죠?”

태화의 발언에 정원석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 그게 무슨…….”

“정원석 님이 보여주신 연기가 지금 보여주었던 게 다라면 전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정원석이 이번에 당황하며 말했다.

“감독님. 혹시 눈치를 채셨어요?”

“중요한 건 연습이 아니라 실전 아닙니까?”

정원석은 배우가 표현해야 하는 감정 중 분노의 감정을 잘 표현해왔다. 그래서 다른 연극 연출자들도 정원석의 분노 연기에 대부분 만족을 해왔다. 하지만 오늘 태화는 리허설이라고 하더라도 이전의 연출자들과 반응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정원석은 이후 태화의 페이스에 말리고 말았다.

“정원석 님. 실전에서 기대해도 되겠죠?”

“아. 네. 감독님.”

“정원석 님.”

“네.”

“정원석 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영화의 주연입니다.”

“네.”

“그러니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네?”

이 순간 정원석은 태화의 존재가 이전보다 커지는 게 느껴졌다.

정원석이 느끼기에 기존의 태화는 선하고 의욕적인 신인 감독이었다. 하지만 현재 태화는 정원석 자신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베테랑 감독의 모습이었다.

정원석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감독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처음 맡은 주연이다 보니…….”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나름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었겠죠.”

정원석은 순간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이 머리를 굴린 게 다 발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정원석은 처음 맡은 주연이기에 현장에서 존재감이 중요했다. 스타 출신으로 주연을 맡으면 그 자체로 존재감이 있지만, 정원석은 연극만 했지, 영화계에선 그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원석에게 존재감은 본인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태화는 순간 정원석이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아챘다. 박도봉 감독도 태화와 마찬가지로 정원석의 심리상태를 알아챈 상태였다.

[태화 군. 정원석이 더는 부끄러운 감정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하네.]

[알고 있어요. 이후 연기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되겠죠.]

[그렇네.]

태화가 정원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원석 님은 어느 날 제 눈에 띄어서 운 좋게 캐스팅된 게 아닙니다.”

“네?”

“정원석 님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그저 제 눈에 띄었을 뿐입니다. 정원석 님이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제가 본 것일 뿐입니다. 정원석 님은 그동안 꾸준히 연기 내공을 쌓아온 배우입니다.”

“…….”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진심입니다. 정원석 님은 연기에 관해서 진심이잖아요.”

“네. 감독님.”

“그 진심을 보이시면 됩니다.”

태화는 정원석 자신에게 질책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자신의 가치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다. 정원석은 태화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실전으로 들어가 볼까요?”

“네. 감독님. 근데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태화는 정원석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태화는 정원석이 감정을 다시 빌드 업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이 아니라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옥탑방에서 감정을 다시 잡으시죠.”

“고맙습니다.”

정원석은 바로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태화 군. 정말 잘했네. 기대 이상이었네.]

[그랬습니까?]

[자넨 정원석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존중을 표현해 주었네. 정원석 입장에선 자네에게 빚을 진 셈이지.]

한편 태화와 정원석의 대화 내용을 모르는 스태프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리허설에서 보여준 정원석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원석이 태화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연출됐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날카롭게 상황을 보는 스태프가 있었다. 바로 이한철과 한재영이었다.

한재영이 이한철에게 슬쩍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촬영 감독님. 뭔가 있는 거 같죠?”

이한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리허설 때 모니터를 보며 느낀 건데 감독님도 그걸 느낀 듯하네요. 감독님한테 얘기할까 고민했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듯하네요.”

“대체 뭘 느낀 겁니까?”

“뭔가 다 꺼내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

“그럼. 정원석 님이 페이스 조절을 했다는 말인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감독님은 그걸 눈치챈 거고.”

이한철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태화의 안목이 최소한 자신과 동등하든가 아니면 그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태화 녀석. 그사이 또 성장한 건가? 어느새 능구렁이가 다 되었구나.’

#.

태화는 정원석을 옥탑방에 들여보내고 나서 스태프들을 보았다. 스태프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스태프들도 혼란스러울 겁니다.]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 없네. 촬영이 시작되면 바로 집중하게 될 걸세.]

[네. 그럴 겁니다.]

[그건 그거고 한 가지 빠뜨린 게 있는 거 같네.]

[빠뜨린 거요?]

[그렇네. 김현석 말일세.]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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