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8화
오전 8시 30분.
선혜영이 옥탑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선혜영은 짙은 분장을 하지 않은 상태다.
오늘 찍을 씬 이전 장면에서 짙게 화장한 얼굴을 지웠기 때문이다. 의상도 노래방 도우미 의상이 아니다. 선혜영은 몸에 살짝 붙은 그레이 진에 흰색 셔츠, 그리고 빈티지 느낌이 나는 청재킷을 입었다.
시나리오에서 심수영은 노래방 도우미 일이 끝나면 바로 화장실에서 바로 평상복으로 갈아입는 캐릭터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옷을 넣고 다니는 용도로 백팩을 들고 다니는 설정으로 되어 있다.
선혜영이 백팩을 멘 상태로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저 어때요?”
태화는 분장한 선혜영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분장을 짙게 하지 않았지만 밋밋하지 않았다.
“오. 얼굴의 피부톤이 살짝 바뀐 거 같은데요?”
선혜영의 뒤에 서 있던 송윤주의 설명이 이어졌다.
“혜영 씨는 피부가 하얀 편이어서 피부톤에 신경을 좀 썼어요. 1등에 당첨된 복권을 손에 넣어서 흥분했을 테니까요.”
분장이 연기자의 단순한 이미지만 표현하는 건 아니다. 분장이 때로는 인물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기도 한다. 송윤주는 피부톤으로 그걸 표현한 것이다.
“얼굴에 살짝 붉은 톤이 도는 것이 좋네요. 과하지 않으면서 좋아요.”
태화는 분장에 이어서 의상에 관한 발언도 잊지 않았다.
“하 팀장님. 빈티지 느낌이 나는 청재킷이 좋네요.”
“네. 여주인공은 의상이 중요하니까요.”
“촌스럽지 않고 좋아요. 근데 이건 어디서 협찬받은 겁니까?”
“의상이 좋아 보이나요?”
“네.”
“어디서 협찬받은 건 아닙니다.”
“그럼?”
하유진이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의상을 사서 살짝 작업을 했습니다.”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상업영화엔 스타 연기자가 출연하기 때문에 유명 브랜드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브랜드가 협찬하는 경우가 많다. 협찬을 통해서 브랜드의 인지도도 올릴 수 있고 영화의 흥행에 따라 판매량도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명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 저예산 영화에선 유명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협찬을 기대하기 힘들다. 협찬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 의상팀에선 직접 의상을 구해 디자인을 리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역시 감각이 있으시군요.”
“감독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수고하셨어요.”
태화는 분장, 의상팀장과 대화를 마치고서 고개를 돌려 현장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스태프들이 각자 바쁘게 움직이며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태화 군. 기분이 어떤가?]
[영감님.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네. 나도 그랬으니까. 어쨌든 자네의 의지가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걸세.]
[저 혼자선 힘들었어요. 영감님이 함께해 줘서 여기까지 온 겁니다.]
[고맙네. 하지만 자넨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하네.]
[네. 이제 시작이잖아요.]
[그렇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준비해온 것들을 풀어놓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바로 정답이네.]
잠시 후 이우섭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촬영 준비됐습니다.”
“오케이.”
“스태프들하고 연기자들 잠깐만 대기하라고 해.”
“네.”
태화는 옥탑방으로 들어가서 어제 서태훈이 선물해 준 찹쌀떡을 쇼핑백 채 가지고 나왔다. 태화가 밖으로 나오자 연기자와 스태프 모두 태화를 쳐다보았다.
태화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촬영 전에 고사도 지내고 해야 하는데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래서 아쉬워하는 분들도 계실 텐데.”
“…….”
“때마침 어제 친형이 찹쌀떡을 사줬습니다. 촬영 전에 이거 먹고 힘들 내시죠.”
태화가 말을 마치자 이한철이 한마디 건넸다.
“그냥 지나가면 많이 섭섭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그냥 지나가지 않네.”
“그러게, 말입니다. 형 아니었으면 큰 원성을 들을 뻔했습니다.”
태화는 쇼핑백에서 찹쌀떡을 꺼내 스태프들과 연기자들에게 찹쌀떡을 돌렸다. 찹쌀떡은 낱개 포장이 된 상태였다. 찹쌀떡을 다 돌리자 한재영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감독님. 한마디 해야죠.”
찹쌀떡 먹으면서 무슨 말을 하느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은 바로 첫 촬영을 하는 날이다. 게다가 태화는 자신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야 했다.
“우선 예산 때문에, 그리고 일정 때문에 고사를 지내지 못하고 넘어간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
“하지만 이 찹쌀떡의 의미는 무척 중요합니다.”
태화의 발언에 스태프들의 시선이 모였다.
“오늘 찹쌀떡 먹고 우리 영화…….”
태화는 ‘이 영화’ 혹은 ‘내 영화’라는 말 대신 우리 영화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건 이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은 작품의 가치에 투자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영화관에 철썩 붙입시다.”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 스태프와 연기자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우선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리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순간 그 누구도 이를 보이거나 딴청을 피우지 않았다.
태화도 이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영감님. 뭔가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가 변했군요.]
[자네가 다시 한번 사람들의 목적의식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일세.]
[제가 던진 메시지가 한몫했군요.]
[내가 그러지 않았나? 자네의 메시지는 유치하지 않다고. 자네의 간결한 메시지가 사람들의 목적의식을 일깨웠네. 당연히 진지해질 수밖에 없네.]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 사람들은 태화가 준 찹쌀떡을 잠시 잊은 듯했다. 이럴 땐 누군가 치고나와야 한다.
의의로 송윤주가 나섰다.
“이 맛있는 걸 안 먹고 들고만 있는 것도 곤욕이네. 감독님. 먹어도 되죠?”
송윤주가 나선 게 태화에게 빚진 것에 관한 보답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송윤주는 체질상 어색하거나 진지해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태화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드셔도 됩니다. 다른 분들로 편하게 드세요.”
태화의 말에 사람들은 각자 손에 들고 있던 찹쌀떡을 입으로 가져갔다. 가장 먼저 찹쌀떡을 먹은 송윤주가 한마디 했다.
“야. 이 떡 맛있다. 아주 찰지고 좋네. 감독님. 이거 어디서 산 겁니까?”
“형한테 물어보고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송윤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꼭 알려줘요. 나 찹쌀떡 좋아한단 말이야.”
송윤주가 먼저 찹쌀떡을 먹고 나서 맛에 관한 품평이 이뤄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각자 태화가 나눠준 찹쌀떡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물과 음료는 준비되어 있으니까 마시면서 드세요.”
이번엔 찹쌀떡의 맛을 본 한재영이 나섰다.
“정말이네. 찹쌀떡 맛이 정말 꿀맛이네. 쫀득하고.”
한재영은 말을 마친 후 태화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근데 태화야.”
“왜?”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더니 오늘 딱 그렇다.”
“…….”
“뭐. 천 냥 빚까지는 아니지만.”
“그런가?”
한재영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 모습을 봐라. 저게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인가.”
한재영의 말처럼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태화야. 어쨌든 고사 안 지내고 넘어간 건 잘 해결된 것 같다.”
“그러게.”
#.
크랭크인 첫 촬영은 정원석이 단독으로 나오는 씬이다. 정원석이 1등으로 당첨된 복권이 사라진 걸 알아채고 급하게 옥탑방을 나와 뛰어가는 장면이다.
씬 순서로 본다면 선혜영이 먼저지만 태화는 그 순서를 바꿨다. 태화는 크랭크인 첫 장면인 만큼 영화에서 가장 비중이 큰 정원석이 출연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화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첫 촬영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태화가 말을 마치자 정원석과 촬영을 맡은 이한철이 태화에게 왔다. 이한철은 전체 리허설 때처럼 카메라에 작은 모니터를 장착했다. 태화가 이한철을 향해 말했다.
“촬영 감독님. 저번 전체 리허설 때처럼 카메라로 프레임을 잡아주세요.”
이한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감독님.”
태화가 시선을 정원석에게 돌렸다.
“정원석 님. 동선은 옥탑방을 뛰쳐나와서 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겁니다.”
“네. 감독님.”
“이 씬에서 핵심은 두 개입니다.”
“…….”
“첫 번째 성욱이 옥탑방에서 막 뛰쳐나왔을 때 분노한 표정입니다.”
“네.”
“그리고 두 번째는 성욱이 자신의 분노한 감정과는 다르게 허둥지둥하는 행동입니다.”
“네. 시나리오에선 성욱이 급한 마음에 신발을 신다가 그렇게 행동하죠.”
“커트로 끊어서 가지 않기 때문에 분노한 감정과 급한 마음. 그걸 매끄럽게 보여줘야 합니다.”
정원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리허설이지만 스태프들의 시선이 태화와 정원석, 두 사람에게 쏠렸다. 첫날 촬영의 첫 번째 씬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스태프 중 특히 기대 어린 시선으로 이 모습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우섭과 김현석이다. 김현석이 이우섭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우섭이 형. 전 아직 실감이 안 나요. 꿈 같기도 하고.”
이우섭이 장난스럽게 정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현석아. 현실이라는 걸 알게 해줄까?”
“고통을 줘서 현실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거라면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이우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자식. 눈치는 빨라 가지고……. 어쨌든 이따가 촬영 들어가면 슬레이트(일명 딱딱이) 잘 쳐라.”
이우섭의 말에 김현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연습을 많이 하기는 했는데.”
영화에서 슬레이트를 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편집할 때 해당 커트를 빠르게 찾기 위해서다. 슬레이트가 나오는 화면이 구분 지점이 돼서 필요한 장면을 찾기가 쉬워진다.
두 번째 이유는 오디오와 영상의 싱크를 맞추기 위해서다. 영화 촬영할 땐 오디오의 품질을 위해서 영상과 별도로 오디오를 녹음한다.
영상과 별도로 오디오가 녹음되기 때문에 편집과정에서 싱크를 맞추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때 중요한 게 슬레이트를 칠 때 나는 ‘딱’ 하는 소리이다. 이 소리로 영상과 오디오의 싱크를 맞춘다.
보통 슬레이트는 스크립터나 연출부 막내가 다룬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촬영 현장의 많은 스태프와 연기자들의 시선이 쏠리기 때문에 경험이 없는 스태프는 긴장하거나 주눅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 슬레이트를 치는 스태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거나 혹은 버벅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럴 때 해당 스태프는 때론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기도 한다. 특히 촬영감독의 성격이 까칠하면 혹독한 신고식의 강도도 세진다.
#.
태화는 정원석과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원석 님. 씬의 흐름은 이해하고 있죠?”
“네.”
“그럼. 표정 한번 지어보겠습니다.”
정원석은 말을 마치고 나서 서서히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정원석의 숨소리가 가빠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