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7화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녀석들 아주 물건이야. 아주 잘 자고 있어. 잠을 설칠 법도 한데 말이야.”
“피곤했겠지. 아까 둘이 자는 거 보는데 짠하더라.”
“녀석들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큰 불만 없이 잘해주었지.”
“맞아. 참 처음 봤을 땐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했었는데.”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근데 태훈이 형이 사 준 찹쌀떡 말이야.”
“왜?”
태화가 서태훈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이우섭과 김현석은 이미 잠에 곯아떨어진 상태였고 한재영만 깨어 있었다. 그래서 찹쌀떡의 존재를 현재 이우섭과 김현석은 모른다.
“고맙더라. 우리 고사도 못 지냈잖아.”
“그렇지 않아도 형한테 그 얘기 했어. 근데 서운해하는 사람 있지?”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은 안 해도 뭐. 고사라는 게 영화 잘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도 있지만 다 같이 모여서 촬영 전 파이팅하자는 의미도 있으니까.”
“…….”
“그래도 찹쌀떡 때문에 체면치레는 할 거 같다.”
“그렇지.”
한재영이 평상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난 들어가서 잔다. 너도 빨리 들어와서 자라.”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들어가서 자. 나도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 거야.”
#.
크랭크인 당일.
새벽 6시.
빠빠 빠빠빠 빠빠라빠빠…….
군대 기상나팔 소리가 한재영의 옥탑방에 울려 퍼졌다. 이 기상나팔 소리에 태화는 눈이 번쩍 떠졌다.
태화는 기상나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기상나팔 소리는 한재영의 스마트폰에서 나는 알람 소리였다.
태화가 일어나고 나서 한재영도 바로 일어나 알람 소리를 껐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한재영에게 말했다.
“알람 소리 죽인다.”
“그럼. 이 정도는 돼야 눈이 번쩍 떠지지.”
“크크. 인정.”
뒤이어 이우섭과 김현석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우섭이 일어나자마자 한마디 툭 던졌다.
“와. 알람 소리 죽입니다. 안 일어날 수가 없겠습니다.”
군대를 갔다 온 남자는 이우섭이 한 말의 의미를 잘 안다. 군대에서 기상나팔 소리가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기상나팔 소리를 듣고 안 일어날 수가 없다.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7시 즈음해서 스태프하고 연기자 올 거야. 서두르자.”
“네.”
태화는 첫 촬영을 한재영의 옥탑방으로 잡았다. 원래 남주 박성욱은 반지하에 사는 거로 설정됐지만 태화가 막판에 촬영 장소를 바꿨다. 반지하를 섭외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화가 첫 촬영을 옥탑으로 정한 건 첫 촬영을 낯선 장소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익숙한 곳에서 촬영하는 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재영의 옥탑은 태화와 스태프들에겐 홈그라운드와 다름없는 장소다.
오늘 예정된 촬영 시작은 오전 9시다.
오전 7시가 되자 스태프와 연기자가 옥탑으로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스태프는 촬영을 맡은 이한철과 분장을 맡은 송윤주. 그리고 박주성과 나윤희다. 박주성은 이한철을 보조해 줄 촬영 스태프다. 박주성은 이한철과 몇 작품 호흡을 맞춰본 인물로 리허설 촬영 당시엔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나윤희는 송윤주의 팀원이다.
태화가 먼저 박주성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성 씨. 반가워요.”
“네. 감독님.”
태화은 나윤희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윤희 씨. 반가워요.”
“네. 감독님.”
촬영팀과 분장팀을 필두로 다른 스태프도 속속 옥탑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태화는 스태프들과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스태프 중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사운드 팀이다.
사운드 팀장인 박지형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했는데 흡사 록 밴드 멤버 같았다.
“감독님. 반가워요.”
“팀장님은 오디오 장비가 아니라 기타 가방을 메고 등장해야 어울릴 거 같은데요?”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긴 머리카락 때문에 좀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일찍 나오느라 머리를 못 말려서 그래요. 머리가 다 마르면 끈으로 묶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보내 주신 리허설 영상 잘 봤습니다.”
오디오 팀은 저번 리허설 현장에 참석하지 않았다.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화가 리허설 영상을 보내 주자 박지형은 무척 고마워했다.
오디오 부분도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으면 일하는 데 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박지형과 그 팀원인 조용우는 바로 오디오 장비를 꺼내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송윤주가 태화에게 다가와 말했다.
“감독님. 연기자 도착하면 방으로 들여보내 줘요. 분장하고 의상하고 준비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팀장님.”
분장팀과 의상팀은 각자 준비해 온 물건을 들고서 옥탑방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남주인 정원석이 도착했다. 정원석과 신혜영은 리허설 영상을 보기 위해서 옥탑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정원석은 오늘 어렵지 않게 옥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신혜영도 마찬가지다.
정원석은 옥탑에 도착하자마자 스태프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 태화 앞에 섰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정원석 님. 반갑습니다.”
태화는 정원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원석의 얼굴은 며칠 면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건 다소 어두운 느낌의 박성욱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서 태화가 결정한 사항이었다.
“면도를 안 한 모습도 꽤 잘 어울립니다.”
“아. 그런가요?”
“네. 보통은 수염이 듬성듬성 나서 면도하지 않으면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는데 정원석 님은 그렇지 않아요. 수염 숱도 적당히 있고요. 박성욱 캐릭터와 잘 맞아요.”
“고맙습니다.”
“그 정도 상태를 촬영 끝날 때까지 유지해야 합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옥탑방으로 들어가세요. 분장팀하고 의상팀이 기다립니다.”
“알겠습니다.”
정원석이 옥탑방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선혜영이 도착했다. 선혜영은 정원석과 함께 오지 않고 시간 간격을 두고 옥탑에 도착했다.
선혜영이 활짝 웃으며 태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선혜영 님. 어서 오세요.”
선혜영은 너무 베이직한 스타일의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하얀 피부색과 잘 어울렸다.
“선혜영 님. 잠깐 평상에 앉죠. 정원석 님이 나오면 옥탑방으로 들어가세요. 분장팀이랑 의상팀이 기다릴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태화는 선혜영과 함께 평상에 앉았다.
오늘 옥탑에서 촬영할 장면은 심수영이 박성욱이 가지고 있던 복권을 훔쳐서 옥탑방에서 도망치는 장면. 그리고 박성욱이 나중에 이를 알고 심수영을 쫓기 위해서 옥탑방에서 뛰쳐나오는 장면이다.
이외에 옥탑에선 두 개의 씬을 더 찍어야 한다.
박성욱과 심수영이 새벽 시간에 옥탑방으로 함께 들어가는 씬과 두 사람이 옥탑방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씬이다. 이 두 씬은 조명이 필요한 장면이라 나중에 조명을 설치해서 촬영할 예정이다.
“선혜영 님. 잠은 잘 잤나요?”
선혜영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잘 잤어요.”
“다행이군요.”
“감독님은 잘 잤나요? 좀 피곤해 보여요.”
선혜영이 이렇게 말한 건 태화의 눈동자가 살짝 충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밤잠을 설친 결과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정신은 멀쩡하니 걱정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태화와 선혜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정원석이 옥탑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감독님.”
태화는 몸을 돌려 정원석의 모습을 보았다. 태화는 정원석의 분장한 모습을 보자 얼굴에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분장을 맡은 송윤주는 수염이 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살짝 명암을 주었는데 그 때문인지 정원석의 이미지가 확 변했다.
[태화 군. 송윤주가 감각이 있구먼.]
[그러게요. 저도 윤주 누나가 실력은 어느 정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기대 이상입니다.]
박성욱 뒤에 있던 송윤주가 태화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감독님. 어때요?”
“마치 박성욱이 시나리오를 찢고 나온 거 같군요.”
“그래요?”
태화가 송윤주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명암이 너무 과하지 않고 딱 좋아요.”
“알겠어요. 이 정도 톤을 유지하도록 할게요.”
“네.”
송윤주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정원석의 얼굴을 찍었다. 이건 정원석의 분장 톤을 유지하기 위한 기록이다.
태화는 정원석의 분장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태화는 이 순간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건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태화 군. 자넨 지금 하나를 놓치고 있네.]
[네? 제가 놓치고 있느 부분이 있다고요.]
[자네가 정원석의 분장을 맘에 들었다는 건 이해하네. 하지만 배우의 이미지를 만드는 건 분장만이 아니네.]
[아. 의상이 있었군요.]
[그렇네. 자네가 여기서 의상에 관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하유정은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될 걸세.]
[그렇겠군요.]
[감독은 현장에서 특정 스태프를 편애한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되네. 특히 송윤주와 자네는 학교 동문 아닌가?]
[제가 그걸 놓쳤네요.]
[자네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태프도 결국 사람이네. 자신이 감독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네.]
[게다가 분장과 의상은 함께 가야 하는 스태프들 아닙니까?]
[맞네. 사람 사이의 분란은 어떤 커다란 사건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네. 작은 것이 쌓여서 터져서 생기는 것일세.]
[결국 감정의 문제군요.]
[맞네.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의 차이 같은 명분을 겉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론 감정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게 마련이지. 사람은 이성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선 감정이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지.]
태화는 이어서 정원석이 입은 의상에 관해서도 말하기 시작했다.
“하유정 팀장님. 의상 색상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네이비 칼라의 정장.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무채색 와이셔츠도요.”
태화의 이 발언은 단순히 구색을 갖추기 위한 발언이 아니었다. 태화는 박성욱이라는 캐릭터의 전반적인 콘셉트만 하유정에게 전달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지시하지 않았다.
이건 태화가 하유정에게 당신을 믿고 맡긴다는 의미이자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유정은 태화가 기대했던 대로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해냈다. 태화의 발언을 들은 하유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감독님. 전반적으로 박성욱은 어두운 캐릭터니까요. 그래서 의상을 설정할 때 원색은 피했습니다. 회색 와이셔츠도 그렇고요.”
원색의 의상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원색은 시각적으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자칫 의상의 색깔이 튀면 본래 의도하고자 했던 캐릭터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 팀장님. 캐릭터가 어둡다고 검은색 정장으로 하지 않은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네. 주인공 캐릭터가 어둡다고 해도 관객이 보기에 멋있어야 하니까요.”
“맞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네. 감독님.”
태화는 시선을 돌려 선혜영에게 말했다.
“선혜영 님. 옥탑방으로 들어가시죠.”
“네. 감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