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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66화 (66/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6화

한재영의 제안은 분명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한재영의 제안에 먼저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태화 군. 한재영의 제안은 좋은 제안일세. 그런데 자네가 먼저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는 건 이우섭과 김현석의 대답을 먼저 기다리는 건가?]

[네. 영감님. 제가 먼저 대답하면 우섭이 하고 현석이는 원하지 않는데 저의 의견에 따라야 하잖아요. 전 그건 싫습니다.]

[자발성이 담보되지 않는 건 싫다?]

[네. 그리고 잠자는 건 자신이 편한 곳에서 자야 하잖아요.]

[좋은 자세일세. 감독은 때로는 영화라는 대의 때문에 소소한 것을 무시하게 마련이지.]

[하지만 때로는 그 소소한 것이 소소한 것이 아닌 것이 되기도 하잖아요.]

[그렇네. 불화란 것은 항상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정말 필요할 땐 자네도 결단을 내려야 하네. 영화라는 대의를 위해서 말일세.]

[네. 알고 있어요.]

태화가 침묵을 지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우섭이 한재영의 제안에 대답했다.

“전 합숙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촬영장에 지각할 위험도 없고요.”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도 바로 대답했다.

“저도 합숙하겠습니다. 기왕 이 작품에 투자하기로 한 거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합숙한다고 하니 나도 빠지기는 좀 그렇네. 좋아. 나도 합숙 동참이다.”

이렇게 합숙이 결정되고 나서 태화와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오늘 여행용 캐리어에 각자 개인 물건을 챙겨 왔다.

태화가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현석아. 촬영 기간 합숙하는 거에 대해서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하시든?”

“처음엔 뭐라고 하셨죠. 그런데 제가 하겠다고 하니까 결국 그렇게 하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집에선 막내라.”

태화가 시선을 돌려 이우섭에게 물었다.

“우섭이는? 집에서 뭐라고 안 해?”

“저도 뭐 현석이랑 비슷해요. 그래도 촬영이 없는 날 전날엔 집에 갈 수 있잖아요. 이삼일에 한 번 집에 들어가는 건데요.”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자. 오늘 수고했고. 피곤할 텐데 다들 빨리 씻고 쉬어.”

이우섭과 김현석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이우섭과 김현석이 씻을 준비를 하는 동안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게?”

“형이 잠깐 보자네.”

“태훈이 형이?”

“응.”

“시간이 벌써 9시가 넘었는데?”

“늦지 않게 돌아올게.”

#.

태화는 약속 장소인 집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태화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서태훈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서태훈은 태화와 외모가 닮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단정하게 정돈된 2 대 8 가르마와 살짝 각진 턱선.

태화가 소년 같은 이미지라면 서태훈은 좀 더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태화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춰 섰다. 태화와 서태훈의 거리는 10m가 채 되지 않은 거리였다. 하지만 서태훈은 스마트폰을 보느라 태화가 도착한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서태훈이 앉아 있는 벤치 바로 뒤엔 가로등이 비치고 있었는데 슈트를 차려입은 서태훈을 은은하게 비췄다.

가로등과 벤치 그리고 슈트를 입은 남자. 이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꽤 멋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화 군. 전에도 자네 형을 몇 번 봤지만, 오늘은 꽤 분위기가 있어 보이는군.]

[분위기는 무슨. 그냥 피곤함에 찌든 모습이죠. 야근에 찌든.]

[자네. 지금 질투하는 건가?]

[질투요? 전 그냥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이라…… 풉…….]

[영감님. 방금 비웃은 겁니까?]

[그렇게 들렸나?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그냥 웃음이 나와버렸네.]

태화는 다시 서태훈이 있는 곳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형!”

서태훈은 태화가 부르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어, 태화야.”

태화는 서태훈이 앉아 있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태화는 자리에 앉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무슨 일이야?”

“너 내일 촬영 들어간다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아주 좋은 정보원이 있잖아.”

“형수?”

서태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태화의 형수이자 초등학교 동창인 이수경은 시댁인 태화 집에 거의 매일 온다. 그래서 시어머니인 전미경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태화에 관한 이야기도 당연히 빠질 수 없다.

“태화야. 이왕 하는 거 잘해야 한다.”

“당연하지.”

서태훈은 자신이 준비해 온 쇼핑백을 태화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거 받아.”

“뭐야, 이게?”

“찹쌀떡.”

“뭐? 찹쌀떡? 내가 무슨 시험 보는 것도 아니고.”

“시험 보는 건 아닌데 그냥 찰싹 붙으라고. 내가 영화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붙으면 좋은 거 아닌가?”

태화는 서태훈의 발언을 듣자 입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네. 내 작품이 영화관에 찰싹 붙어야지.”

“그럼. 형이 제대로 산 거냐?”

“응. 제대로 샀어.”

“다행이다. 내가 처음엔 엿을 사려고 했었거든?”

“뭐? 엿 먹으라고?”

“크크. 그래서 엿 말고 찹쌀떡으로 바꿨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어. 고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고사?”

“응.”

보통 영화는 촬영 들어가기 전에 고사를 지낸다. 영화 흥행과 촬영이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태화는 고사를 지내지 않았다. 워낙 예산과 일정이 팍팍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고사를 지내지 않고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거 사람들한테 주면 좋아하겠어.”

“그래. 충분히 샀으니까 사람들한테 나눠줘. 그리고 이거 꽤 유명한 집에서 산 거다.”

“그럴게. 정말 고마워.”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태화야.”

“왜?”

“난 가끔 네가 부러울 때가 있다.”

“내가 부러워?”

태화는 이 부분에서 약간의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왜? 형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잖아. 안정된 직장에 결혼도 했고. 게다가 예쁜 딸까지.”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해.”

“무슨 생각?”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과 다른 삶.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건 어떨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가끔 상상하곤 해. 내가 지금과 다른 삶을 살았다면 현재 어떤 모습일까.”

“난 상상이 잘 안 돼. 지금과 다른 삶을 사는 형의 모습.”

서태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좀 재미없게 살았지. 좋게 말하면 일관되게 살아온 거고.”

“근데 형. 이런 모습 처음인 거 알아?”

서태훈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나?”

“근데 형의 그 마음 다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아.”

“정말?”

“응. 나도 한창 헤맬 때 형처럼 안정적으로 사는 걸 상상하기도 했었으니까. 천덕꾸러기 신세 그만하고 주변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고맙다. 이해해 줘서.”

그때였다. 서태훈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태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 봐야겠다.”

“응?”

“형수다.”

태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서 들어가 봐. 기다리다 눈 빠지겠다.”

“그래. 촬영 잘하고.”

“응.”

서태훈은 태화와 인사를 나눈 후 자기의 휴대폰을 받았다.

“어. 나야. 지금 집으로 들어가려고…….”

서태훈은 휴대폰을 받으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태화는 자리를 뜨지 않고 한동안 서태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감님. 저의 삶이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군요.]

[어느 정도 정해진 길을 살아온 사람에겐 자네처럼 사는 삶이 부러울 수 있네.]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는 삶 말인가요?]

[그렇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관해서 동경 같은 게 있으니까. 그래서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태화 군.]

[네. 영감님.]

[자네가 했던 말 있잖은가?][

[어떤 말이요?]

[내 작품이 영화관에 찰싹 붙어야 한다고 했던 말.]

[그게 왜요?]

[괜찮은 말인 거 같아서 말일세.]

[괜찮아요? 유치한 게 아니고요?]

[그렇지 않네. 리더는 간결하면서도 사람들 뇌리에 박히는 메시지를 전해야 할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하네. 그런 면에서 자네의 발언은 아주 적합하네.]

[음. 그런가요? 근데 이 메시지를 언급하신 건 쓰라는 거 아닙니까?]

[맞네.]

태화는 순간 이 메시지를 언제 써야 하는지 떠올랐다.

[내일 찹쌀떡 나눠줄 때 쓰라는 겁니까?]

[그렇네. 내일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자넨 이 메시지를 쓰게. 자네의 이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목적의식을 한 번 더 떠올리게 할 걸세.]

[영화 개봉이라는 목적의식 말이죠.]

[바로 그것일세.]

#.

늦은 밤.

태화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잠을 뒤척이던 태화는 조용히 일어나 방안을 살폈다.

생각과 달리 이우섭과 김현석은 잠을 잘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화는 옅은 미소가 나왔다.

‘녀석들 잘 자네. 하긴 그럴만하지. 지금까지 둘이서 고생을 했으니까.’

돌이켜보면 이우섭과 김현석은 태화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적은 인원으로 작품을 준비했음에도 두 사람은 아무 불만 없이 지금까지 와주었다.

두 사람은 그만큼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을 게 뻔했다.

태화는 조용히 옥탑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태화는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화 군. 잠이 잘 오지 않는가?]

[네. 영감님.]

[하긴 잠이 잘 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영감님도 그랬나요?]

[그렇네. 나도 입봉작 할 때 자네처럼 잠을 설쳤네. 한편으론 드디어 내가 감독이 된다는 마음에 설렜고 다른 한편으론 내가 혹시라도 큰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두렵기도 했다네.]

[100편을 연출한 영감님도 처음엔 다 그랬군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힘든 법이네. 그러면서도 처음은 중요하지.]

[영감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요. 첫 단추를 잘 껴야 하는 거잖아요.]

[그렇네. 사람은 누구나 시작이 좋아야 자신감을 갖게 되네. 그런 의미에서 첫날 촬영이 중요하네.]

[첫날 촬영이 무사히 진행되면 아무래도 자신감을 갖게 되겠죠.]

[맞네. 자네는 그동안 준비를 잘해왔어. 분명히 잘 해낼 걸세.]

[네. 잘 해낼 겁니다.]

그때였다. 한재영이 태화의 옆에 슬그머니 와서 앉았다.

“태화야, 잠이 잘 안 오냐?”

“응. 너는 왜 안 자고?”

“자다가 물 마시려고 잠깐 깼는데 네가 안 보여서. 그래서 감이 왔지.”

“무슨 감?”

“잠은 안 자고 청승 떨고 있겠구나.”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청승은 무슨 청승. 그냥 생각 좀 하는 거지.”

“그게 청승이지 뭐냐?”

“그런가?”

“근데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라.”

“뭐?”

“그래야 잠을 잘 거 아냐?”

“알았어. 나도 금방 들어가서 잘 거야.”

한재영이 과거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말했다.

“나도 저번에 연출부로 작품 참여할 때 첫 촬영 앞두고 잠이 안 오더라. 내가 빠뜨린 건 없는지. 혹시라도 내가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일개 스태프로 참여했던 내가 잠을 못 잤는데 감독인 넌 오죽하겠냐?”

“고맙다. 이해해 줘서. 그런데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잘 자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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