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5화
박도봉 감독이 영상을 편집하고 있는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 군. 이 영상은 자네와 한재영보단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큰 도움이 될 거네.]
[역시 영감님은 정확히 보시는군요. 맞아요. 재영이야 이미 장편영화를 스태프로 경험했고 저도 이미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우섭이와 현석이는 막연하죠. 막연하니까 두려움이 생기고요. 두 사람의 두려움을 없애게 해야죠.]
[좋은 생각일세. 경험이 없는 스태프에겐 어떤 결과물을 보여주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세. 어쨌든 자네가 반대를 무릅쓰고 리허설을 했던 게 부수적으로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구먼. 설마 자네 이런 결과까지 생각해서 고집을 부렸던 건가?]
[그렇진 않아요. 처음엔 이 영상을 보면 저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콘티도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하니까요.]
[음. 그랬는가.]
[네. 이 영상을 우섭이하고 현석이한테 보여주면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나중에 들었어요.]
태화는 편집을 다 끝내고 나서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을 모니터 앞에 앉혔다.
“어제 리허설 영상 찍은 걸 간단하게 편집했다. 이 영상을 보면 앞으로 우리 영화가 어떤 분위기로 나올지 개략적으로 느낌이 올 거야.”
한재영이 발언했다.
“특히 우섭이하고 현석이에겐 이 영상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김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막연하지 않으니까요.”
특정 분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이 처음에 느끼는 두려움은 바로 이 질문에서 나온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질문은 실제 그 과정을 경험하고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 본 적이 없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특히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김현석에겐 리허설 영상이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
뒤이어 이우섭의 발언이 이어졌다.
“현석이 말이 맞아요. 저도 단편만 해봤지, 장편은 처음이니까요. 리허설 영상이긴 하지만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합니다.”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한텐 이 영상이 두 사람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
“우리가 모의고사를 보는 이유는 하나다. 그건 실제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해서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도 결국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지.”
“…….”
“오늘부터 크랭크인 전까지 여기 있는 스태프는 이 영상을 머릿속에 완전히 넣어두어야 한다. 특히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이우섭이 태화에게 질문했다.
“그 말은 이 영상을 외우라는 말인가요?”
“세세한 것까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흐름은 반드시 머릿속에 넣고 있어야 한다.”
이우섭과 김현석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모의고사는 적중률이 중요하지만, 이 영상은 이미 100% 나올 문제를 가지고 있어. 큰 차이가 있다면 실전이라는 분위기와 촬영 장소 정도야.”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는 리허설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영상이 진행될수록 두려움이 사라져갔고 자신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두 사람의 표정 변화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표정에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태화는 절반 정도 본 시점에서 영상을 일시정지시켰다.
“우섭이 그리고 현석이. 지금까지 영상 본 소감이 어때?”
이우섭이 먼저 대답했다.
“확실히 눈으로 확인하니까 좋네요.”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촬영 준비는 시나리오만 보고 했으니까.”
“네. 이렇게 결과물을 보니까 앞으로 뭘 준비해야 하는지 확실히 감이 오네요.”
“좋아. 현석이는?”
“확실히 막연함이 사라지고 있어요.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할까? 그래서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고요.”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잘 들어.”
“네.”
“모든 일에 자신감이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절대 현장에서 쫄면 안된다. 이게 오늘 내가 리허설 영상을 보여준 가장 큰 이유야. 너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자신감 있게 업무를 처리해 나가야 내가 여유가 생기고 연출에 더 집중할 수 있어.”
태화에 이어 한재영이 발언했다.
“나도 태화 의견과 같아. 연출 스태프가 현장에서 얼어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해. 자칫하면 연기자와 다른 스태프들이 우습게 보기도 하지. 그러면 현장 진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근거도 없이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어. 오늘 이 리허설 영상은 두 사람이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는 데 충분하지.”
이우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태화가 다시 영상을 플레이하기 전 발언했다.
“지금까지 절반 정도 자신감이었다면 이 영상을 다 보고 나선 100%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알겠지?”
이우섭과 김현석이 동시에 대답했다.
“넵!”
두 사람의 대답엔 기합이 잔뜩 실려 있었다.
#.
크랭크인 전날.
한재영의 옥탑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부서별로 팀장급 스태프가 다 모였기 때문이다.
태화를 포함한 연출 제작 스태프 외에도 이한철(촬영), 박지형(사운드), 송윤주(분장), 하유정(의상), 전윤석(미술, 소품), 강진호(액션), 정민석(캐퍼) 등이 모여 내일부터 시작될 촬영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서다.
특히 이날 회의가 의미가 있었던 건 개퍼로 참여할 정민석이 참여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정민석은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조명이 필요한 촬영은 태화가 일부러 뒤로 미뤄놨기 때문이다.
이한철이 정민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민석아.”
정민석이 이한철이 내민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나도 반가워요. 한철이 형.”
“정말 잘 왔어.”
정민석이 시선을 송윤주에게 돌렸다.
“윤주 너도 잘 지냈지?”
“네. 민석 오빠.”
“와. 근데 너하고 한철이 형하고 사귄다는 말 듣고 깜짝 놀랐었는데 지금 보니 두 사람 잘 어울린다.”
“그렇게 보여요?”
“응. 말만 들었을 때는 그림이 잘 안 그려졌는데 직접 보니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려.”
“고마워요. 오빠. 그리고 잘 왔어요.”
“그래.”
한재영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다 전쟁 같은 영화판에서 피어난 로맨스 때문 아닙니까?”
한재영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민석은 오랜만에 보는 한재영이 반가웠다. 그래서인지 정민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재영이. 잘 지냈지?”
“네. 민석이 형. 환영합니다.”
“학부 때도 태화하고 친하고 지내더니 여기에 있었네.”
한재영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가 얼마나 사정을 하던지.”
“네가 먼저 하겠다고 조른 건 아니고?”
한재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야. 내가 그랬냐?”
태화가 한재영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민석이 형. 재영이 말이 맞아요. 재영이가 좀 애 같아도 일은 잘하잖아요.”
“태화야. 근데 말이 좀 이상하다. 지금 이거 칭찬인 거 맞지?”
“당연히 칭찬이지. 솔직히 너 없이 여기까지 왔겠냐?”
태화가 정민석에게 말했다.
“민석이 형. 좋아 보여요. 건강해 보이고.”
정민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내가 운동 좀 하거든. 태화야.”
“네.”
“고맙다. 이렇게 사람들 만나니 좋네.”
“그랬으면 됐어요.”
태화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구체적인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기로 하죠.”
#.
한재영의 옥탑방은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스태프가 안으로 들어오니 꽉 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우섭과 김현석 그리고 한재영은 책상이 있는 곳에 서 있었다.
태화가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
“이미 통보해 드렸다시피 촬영 회차는 15회차로 결정했습니다. 촬영하다가 변수가 생기면 한두 회차 정도 추가될 수 있고요.”
“…….”
“저번에 촬영 스케줄이 너무 빡센 게 아니냐는 스태프 여러분의 의견을 수용해서 이틀 혹은 삼일 정도 촬영 후에는 하루 정도 쉬기로 스케줄을 조정했습니다.”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 촬영 스케줄 조정은 정말 잘한 결정입니다. 저번 촬영 스케줄 보고 나서 분노했거든요. 주먹이 부르르 떨리더라고요.”
이한철의 발언에 그곳에 있던 스태프들은 순간 빵하고 웃음이 터졌다.
“제가 촬영 감독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했군요. 사과드립니다.”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어쨌든 스케줄 조정이 됐으니까요.”
태화가 촬영 스케줄을 변경한 건 단순히 연기자와 스태프에게 휴식을 보장하는 거 외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다음에 있을 촬영 장소를 미리 점검하기 위해서다. 다음에 촬영할 장소로 직접 가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점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중에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론 촬영본을 일단 편집해서 전반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촬영 스케줄의 압박에 시달리다 보면 자칫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시나리오 순서대로 실제 촬영이 진행되지 않다 보니 배우가 자신의 연기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때 감독이 연기의 흐름을 제대로 잡아줘야 한다.
태화가 계속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특히 분장과 의상팀은 신경을 좀 써야 할 겁니다.”
태화가 이렇게 말한 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하루 만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의상이나 분장이 간단할 거로 생각할 수 있는 데 그렇지 않다.
분장을 맡은 송윤주가 대답했다.
“감독님. 분장은 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미 대비하고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연기자의 분장은 영화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연기자가 전 장면에서 얼굴에 상처가 났다면 다음 장면에서도 그 상처가 계속 유지가 되어야 한다. 만약 이게 깨지게 되면 영화의 연속성은 깨지게 된다.
이어서 하유정이 대답했다.
“감독님. 의상팀도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성욱 역할을 위해서 같은 옷을 여러 벌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인공 성욱은 영화 내내 거의 한 벌로 버틴다. 하지만 촬영 기간 내내 같은 옷을 입고 촬영할 순 없다.
“의상팀장님 알겠습니다. 그럼 계속해서 회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태화는 계속해서 팀별로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해 나갔다.
몇 시간 후.
스태프들은 회의를 마치고 모두 돌아갔다. 그리고 태화를 포함한 연출 제작 스태프 네 명만이 옥탑방에 남았다. 옥탑방 한구석엔 여행용 캐리어가 세 개 보였다.
이 캐리어의 주인은 태화, 이우섭, 김현석이었다. 이 네 명은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엔 한재영의 옥탑방에서 합숙할 예정이다.
합숙에 관한 아이디어는 한재영이 며칠 전 제시했었다.
“촬영 기간에 우리 네 명 여기서 합숙하는 건 어때?”
태화가 바로 발언했다.
“만약 합숙하게 되면 가장 불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재영이 너야.”
“그렇긴 하지. 그런데 난 합숙하는 게 나을 거라고 본다. 업무에 효율적이잖아. 궁금한 점이 있으면 바로 물어볼 수 있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넷이 같이 촬영 장소로 이동할 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