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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64화 (64/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4화

우한수의 말에 태화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놀랐다. 특히 당사자인 정원석과 선혜영은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원석이 우한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우한수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나이가 되면 그냥 보이게 되는 게 있지요. 두 사람 연기할 때 호흡이나 바라보는 시선. 내가 볼 땐 예사롭지 않았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어떤 말이요?”

“기침, 가난, 사랑. 이 세 가지는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고.”

“아. 네. 그래도 당분간은 비밀로 하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거든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내가 제법 입이 무거운 편이니까.”

“아. 고맙습니다.”

우한수는 시선을 돌려 태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선생님.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요. 감독님 눈빛이 내가 좋아하는 눈빛이라 그럽니다.”

“제 눈빛이 어떤데요?”

“참 묘한 느낌이 들어요.”

“묘한 느낌이요?”

“네. 한편으로는 맑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성공에 대한 갈망이 보여요.”

“네?”

우한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눈빛 잃지 마세요. 그게 감독님 매력이니.”

#.

리허설은 저녁 식사 후 7시부터 다시 시작됐다. 긴 시간 동안 이뤄진 리허설 때문에 연기자들의 집중력이 떨어질 만했지만 리허설의 분위기는 오히려 뜨거웠다.

리허설이 종반부로 가면서 체력적으로 가장 부담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촬영을 맡은 이한철이었다.

이한철은 거의 10시간 동안 카메라를 손에 들고서 촬영에 임했다. 아무리 핸드헬드로 촬영한다고 하더라도 화면을 안정감 있게 찍어야 한다. 그러려면 카메라를 든 팔이 지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팔에 부하가 더 걸린다.

이한철의 카메라는 풀프레임으로 일반적인 카메라보다 몸체가 크고 무겁다. 여기에 카메라와 액세서리로 연결된 모니터를 합친 무게는 아무리 체력이 좋은 이한철이라도 체력에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한철은 세 씬을 남겨두고 거의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 이한철의 팔에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카메라가 떨리기 시작했다.

덜덜덜.

이한철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팔의 경련이 멈출 리 없었다. 이한철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태화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영감님. 아무래도 한철이 형에게 체력적 한계가 온 것 같습니다. 저 상태로 계속 촬영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박도봉 감독도 태화의 말에 수긍했다.

[그런 거 같네. 아무래도 자네가 직접 찍어야 할 것 같네.]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잖아요.]

[배우면 나중에 다 써먹게 된다는 게 이럴 때 해당이 되는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촬영을 배워둔 게 이럴 때 빛을 발하게 되는군요.]

태화가 이한철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형. 카메라 저한테 주세요.”

“뭐? 아직 촬영할 거 남았어.”

“내가 찍을게요.”

이한철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촬영을?”

“네. 형.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나도 기본적인 촬영은 할 줄 아니까.”

“정말이야?”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전에 촬영 알바를 좀 했어요. 최근까지 했고요. 게다가 오늘은 실제 촬영이 아니라 리허설 촬영입니다. 형보다 좀 못 찍어도 되잖아요.”

이한철은 잠시 자신의 팔 상태를 보았다. 손이 계속 떨리고 있었고 금방 안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한철이 아쉬운 듯 태화에게 말했다.

“좀 쉬었다 갈 수는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미 시간도 많이 지난 상태입니다. 연기자들도 감정 준비가 된 상태에서 시간을 미루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태화의 방금 발언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감정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끌어올려지는 게 아니다. 쉬었다 가면 연기자들은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한철로선 태화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알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안정적으로 찍는 게 우선이야.”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이한철은 한숨을 쉬고 나서 카메라를 태화에게 넘겼다. 태화는 이한철에게서 카메라를 넘겨받고 무게가 꽤 나가는 걸 느꼈다.

“무게가 꽤 나가네요?”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냐? 왜. 후회되냐?”

“아뇨. 그냥 형한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무 강행군이어서.”

“됐어. 인마. 잘 찍기나 해.”

“알았어요. 형은 좀 쉬어요.”

“그러마.”

이한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이동했다. 태화가 카메라를 손에 들자 연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촬영 감독님이 긴 시간 촬영하느라 팔에 좀 무리가 왔어요. 그래서 남은 씬은 제가 직접 촬영할 겁니다. 저도 촬영은 어느 정도 할 줄 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태화가 리허설 준비 중인 연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자. 지금부터 98씬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

태화는 큰 무리 없이 남은 리허설 장면들을 진행해 나갔다. 태화는 얼마 전까지 실제 촬영했었다. 그래서 그 감각이 남아 있었다. 비록 이한철에 비해 촬영 스킬은 좀 부족했지만, 지금까지 태화가 촬영한 정도의 수준이면 전반적인 씬의 흐름과 느낌을 파악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이한철은 쉬고 있다가 마지막 씬 리허설을 하기 전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하고 있나 불안해서 온 겁니까?”

이한철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 불안해서라뇨? 그것보다는 그냥 궁금해서 온 겁니다. 잠깐 지켜봐도 되죠?”

“그렇게 하세요.”

태화는 연기자들에게 씬에 관한 설명을 하고 나서 마지막 씬 리허설에 들어갔다.

“자. 100씬 리허설 가겠습니다. 이제 시작할까요?”

태화의 말이 떨어지자 마지막 씬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태화는 씬의 흐름에 맞추어 카메라를 움직이며 촬영에 임했다.

이한철은 태화가 촬영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이 꽤 안정적이다. 이 정도면 실제 촬영을 꽤 해본 솜씨야.’

이한철은 태화가 촬영하는 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살짝 아쉬움이 드는 부분에선 태화의 팔을 살짝 움직이게 해서 촬영하게 했다.

팔의 각도나 위치를 살짝 움직였을 뿐이었지만 태화는 그 화면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 씬도 어느새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연기자들의 연기가 다 끝나고 태화는 마지막 씬 리허설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컷! 오케이!”

태화의 선언과 함께 오늘 리허설을 함께한 연기자와 스태프들이 손뼉을 쳤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악수하며 수고했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이한철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태화. 너 촬영 꽤 하더라. 화면이 안정적인 건 꽤 인상적이었어.”

“에이. 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어쨌든 미안하다. 내가 끝까지 책임을 졌어야 했는데.”

“오늘은 모의고사일 뿐이잖아요. 실제 시험장 가서 잘하면 되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다.”

“이제 마무리하죠.”

태화는 카메라를 이한철에게 넘겨주었고 이한철은 카메라를 바로 받아 들었다.

“그래.”

태화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자. 주목해 주세요.”

태화의 외침에 다소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태화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할 생각이었다. 스태프와 연기자가 모두 모이는 날이 오늘을 제외하면 없다.

실제 촬영이 시작되면 스태프는 대부분 촬영장에 나오지만, 연기자는 자신의 촬영이 있을 때만 오기 때문이다.

#.

태화가 스태프와 연기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 리허설에 참여해 준 스태프 그리고 연기자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크랭크인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스태프와 연기자들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태화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태화는 사람들의 반응에 한편으로 흡족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부담감이 밀려왔다. 앞으로 태화가 촬영장에서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들의 태도도 지금과는 180도 달라질 것이다.

“여러분은 모두 이 작품의 가치에 투자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여러분은 이 작품에 참여하는 플레이어입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주십시오. 남은 기간 여러분 각자가 성장하는 만큼 이 작품도 그만큼 더 나아질 겁니다.”

태화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박수를 친 사람은 다름 아닌 우한수였다.

“감독님. 멋있는 말입니다.”

“선생님.”

“나이 먹은 나도 아주 설레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최고 연장자인 우한수가 태화에게 힘을 실어주자 다른 연기자들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한수에 이어 정원석이 나섰다. 정원석은 바닥에 깔린 종이 박스를 집어 들었다.

“플레이어로서 제안합니다. 여기 정리 다 같이 하죠. 그러면 금방 끝날 거 같은데요?”

정원석의 말에 연기자들은 다들 동의를 표했다. 정원석이 다른 연기자가 발언했다.

“그렇게 하죠. 마지막 정리는 다 같이 하죠. 오늘 다 같이 고생했는데.”

연기자들은 모두 자신이 깔고 앉았던 종이박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른 강의실에 옮겨 놓았던 책상과 의자를 스태프와 함께 다시 들고 왔다.

태화는 자발적인 연기자들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영감님. 이게 뭐죠?]

[말의 힘일세.]

[말의 힘이요?]

[그렇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제로 행동하게 하는 건 바로 말의 힘이네. 하지만 말이라고 해서 다 힘을 갖게 되는 건 아니네.]

[왜 그런 겁니까?]

[말은 메시지와 메신저로 이뤄지네. 메시지가 말의 내용이라면 메신저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네.]

[영감님 말은 메시지와 메신저가 모두 충족이 되어야 말에 힘이 생긴다는 말인가요?]

[그렇네. 자네가 방금 사람들에게 투자자에 그치지 말고 플레이어로 최선을 다해달라는 그 메시지는 아주 훌륭한 내용이네. 그리고 자네는 지금껏 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했었네. 그건 계약서 조항에서 이미 드러난 사실이지. 그게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걸세. 만약 자네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느꼈다면 자네가 낸 메시지는 가식에 불과하게 되고 지금과 같은 행동이 나오지 않았을 걸세. 즉 메시지와 메신저 그 두 가지가 충족되었기 때문에 자네가 한 말에 힘이 담길 수 있는 거네.]

[그래서 제가 말한 대로 사람들은 플레이어가 된 거군요.]

[그렇네.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으로 자네에게 보여준 걸세.]

모든 스태프와 연기자가 움직이니 1시간 정도 걸릴 일이 단 10분 만에 끝났다. 그 결과 리허설장은 다시 강의실이 되었다.

#.

다음 날.

태화는 출근하자마자 리허설을 촬영했던 영상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리허설 영상은 편집하기가 수월해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나리오 순서가 아니라 장소별로 촬영하는 실제 촬영과 달리 어제 리허설은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이 이루어진 데다가 커트를 나누지 않고 원 씬 원 커트로 촬영이 진행됐었다.

이 때문에 씬 별로 앞과 뒤 불필요한 부분만 잘라내고 이어 붙이면 편집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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