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63화 (63/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3화

태화의 발언이 이어졌다.

“오늘 연기자와 스태프가 거의 출동한 만큼 서로 얼굴을 익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가장 먼저 이 영화의 프로듀서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태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재영이 나섰다.

“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은 한재영입니다. 이제부터 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예정입니다.”

한재영의 말에 순간 연기자들의 시선이 한재영에게 쏠렸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한재영은 말하기 전 연기자들의 표정을 보았다. 다들 한재영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식사입니다.”

한재영의 말에 집중했던 연기자들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한재영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는 거만큼 중요한 건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

“…….”

“아무래도 식당에서 식사하는 건 좀 번거로워서 도시락을 주문할 예정입니다.”

한재영이 도시락 전문점 전단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도시락 메뉴가 몇 개 있으니까 쉬는 시간에 각자 메뉴를 선택해서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

“그럼. 중요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한재영의 소개가 끝나자 연기자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재영의 소개는 그만큼 재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감님. 재영이가 오늘 열일을 하네요.]

[그렇네. 연기자와 스태프의 첫 상견례 자리 아닌가? 당연히 서먹할 수밖에 없는 자리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분위기 메이커 아니겠나?]

[맞습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재영이의 저 농담이 한 방에 날려 보냈습니다. 이후 분위기도 좋아질 거고요.]

[그렇네. 파급효과라는 게 있는 거니 말일세.]

한재영에 이어 다른 스태프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파급효과는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재영이 분위기를 풀어서 그런지 스태프들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기소개를 이어갔고 연기자들도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

스태프들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태화가 다시 나섰다.

“이제 본격적으로 리허설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씬부터 리허설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촬영은 시나리오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효율성을 위해서 장소별로 혹은 다른 요소를 고려해서 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하나의 장소에서 진행되는 리허설은 첫 번째 씬부터 순서대로 진행하는 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연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에 흐르는 정서 변화 추이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 같은 리허설이 연기자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씬은 박성욱이 차 안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심수영을 기다리는 장면이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박성욱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장면을 위해서 미리 일반 의자 두 개와 운전대 대용으로 책상 하나를 세팅해 두었다.

이한철이 촬영을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 정원석에게 다가갔다. 이한철은 카메라에 별도의 작은 모니터를 연결했다.

원래대로라면 이한철은 카메라의 영상 출력 단자에 선을 연결해서 별도의 모니터로 촬영 영상을 볼 수 있도록 세팅했을 것이다. 감독인 태화가 모니터를 통해서 촬영하고 있는 영상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오늘 리허설 촬영은 핸드헬드에 롱 테이크로 이루어진다. 만약 오늘 촬영이 성과가 있다면 실제 촬영 현장에서도 핸드헬드와 롱 테이크로 촬영이 이뤄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감독인 태화는 촬영감독을 따라가며 연출을 진행해야 한다. 현재 카메라의 모니터 세팅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서 이루어진 결과다.

시나리오에서 박성욱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지만 이곳에서 흡연할 수는 없다. 그래서 라이터 불만 켜고 담배엔 불을 붙이지 않을 예정이다.

담배가 아닌 볼펜으로 대용해서 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태화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화는 비록 담배에 불을 붙일 수는 없지만 가능한 실제 촬영 상황과 비슷하게 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화는 자신의 태블릿에 저장된 콘티북 파일을 불러내서 씬의 흐름을 확인했다.

“촬영 감독님.”

“네.”

“첫 화면은 성욱이 라이터를 들고 있는 부분입니다. 손과 라이터를 클로즈업으로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이한철은 대답하고 나서 태화가 요구한 대로 화면을 잡았다. 곧이어 태화의 발언이 이어졌다.

“정원석 님은 내가 말한 대로 연기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리고 촬영 감독님은 제가 말한 대로 카메라를 움직여주시고요.”

“오케이.”

“그 상태에서 성욱이 라이터를 켜면 카메라는 라이터를 팔로우하면서 불이 붙는 담배 끝을 잡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담배 연기를 내뿜는 성욱의 입을 잡습니다. 그런 후 카메라는 뒤로 살짝 빠지며 박성욱의 얼굴을 잡으면 됩니다.”

태화의 지시대로 이한철은 카메라를 움직였다. 이한철이 카메라에 달린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느낌 좋습니다. 감독님.”

“저도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케이. 이어서 갑시다.”

“좋습니다. 성욱은 자신의 폰을 꺼내 시계를 바라봅니다. 카메라는 성욱의 시선으로 폰의 화면을 잡습니다. 그때 성욱이 대사를 치면 카메라는 다시 성욱의 얼굴을 잡습니다. 자. 성욱 대사.”

태화가 지시하자 정원석이 박성욱의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아. 왜 이렇게 안 나와. 짜증 나게.”

이한철은 성욱이 대사를 칠 때 폰 화면에서 성욱으로 카메라를 패닝했다.

[태화 군. 이한철의 카메라 워크. 아주 세련됐구먼.]

[네. 저도 방금 그렇게 느꼈어요.]

[카메라를 패닝할 때 중요한 건 바로 속도일세. 상황에 맞게 적절한 속도로 패닝을 해야 하는데 이한철은 바로 그걸 깔끔하게 해냈네.]

[그것도 한 번에 말이죠.]

[그렇네.]

[그건 한철이 형이 씬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어서 그런 거겠죠.]

[바로 봤네. 하지만 씬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카메라 워크는 많은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걸세.]

[그게 실력이죠. 한철이 형을 섭외한 보람이 느껴집니다.]

카메라에 연결된 모니터를 보던 태화가 큰소리로 외쳤다.

“컷!”

태화가 이한철을 향해 말했다.

“일단 여기까지. 촬영 감독님. 어떻습니까?”

이한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독님. 화면의 느낌은 괜찮아요. 화면의 흐름도 나쁘지 않고.”

“저도 괜찮다고 느꼈어요. 마지막에 패닝도 좋았고요.”

태화의 말에 이한철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다니 다행이군요.”

이한철도 태화의 칭찬이 속으로 반가웠다. 이한철은 핸드헬드 촬영을 위해서 며칠 전부터 따로 시간을 내서 촬영 연습을 해왔었다. 그 연습의 결과가 첫 번째 씬 촬영에서부터 발휘된 것이다.

태화가 시선을 정원석에게 옮겼다.

“정원석 님. 어때요?”

“일단 감은 잡혀가는 거 같아요. 커트로 끊지 않고 가서 오히려 저하고 맞는 거 같기도 하고요.”

“호흡이 길어서 연극 같죠?”

“네. 그런 측면이 있어요.”

“그렇다고 연기 톤이 연극처럼 되면 안 됩니다.”

“지금 연극 톤이었습니까?”

일반적으로 라이브로 진행되는 연극은 촬영을 전제로 한 연기보다 과장된 몸짓과 대사를 한다. 주로 연극을 했던 배우가 영화나 드라마로 왔을 때 처음에 적응 못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뇨. 지금 했던 연기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연기에 몰두하다 보면 본능적으로 연극 톤이 나올 수 있으니까 유념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태화는 정원석과 대화를 한 후 연기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들 감을 잡으셨죠?”

연기자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

전체 리허설은 태화가 생각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전체 100씬 가운데 오전에 55씬을 끝냈다.

이건 연기자들이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데다 앞서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서 어느 정도 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태화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다시 그 씬을 반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후의 리허설은 오전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뒤로 갈수록 캐릭터의 감정이 고조되어갔고 연기 동선도 좀 더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는 6시까지 총 86씬이 리허설을 끝낸 상태였다. 이제 14씬만 진행하면 전체 리허설은 끝이 난다.

태화는 한재영, 이한철 등 스태프와 정원석, 선혜영 두 주연배우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화가 이한철을 향해 말했다.

“촬영 감독님.”

“잠깐. 밥 먹을 때는 좀 편하게 말하자.”

“알겠어요. 형. 오늘 리허설 어떤 거 같아요?”

“음. 생각했던 것보다 잘 진행되고 있는 거 같다. 이 정도면 실제 촬영 현장에서 기대해도 괜찮겠어.”

“그림은 어때요?”

“나쁘지 않았어. 확실히 끊어서 가는 것보다 느낌이 살더라.”

태화는 정원석과 선혜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잘해줬어요.”

정원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기 호흡을 길게 가는 거라 저한텐 오히려 잘 맞아요.”

정원석에 이어 선혜영이 발언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태화가 정원석과 선혜영을 번갈아 보며 발언했다.

“두 사람이 잘 따라와 주어서 안심입니다. 사실 두 사람이 원 씬 원 커트 촬영에 적응하지 못하면 제가 생각했던 구상은 아무 소용 없거든요.”

정원석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하하. 역시 감독님은 고수입니다.”

“네?”

“이렇게 칭찬하면 더 열심히 하게 되잖아요.”

“하하. 정원석 님은 어떻게 제 마음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제 속에 들어갔다 나온 거 같네요.”

잠시 후 리허설 장소의 문이 열리고 이우섭과 김현석이 들어왔다. 그들의 양손에는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도시락 전문점에서 배달은 되지만 배달원이 건물 안까지 들어올 수 없어서 이우섭과 김현석이 건물 입구에서 도시락을 받아왔다.

이우섭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기다렸던 식사가 도착했습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도시락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한 명에게 도시락이 다 나눠주고 식사를 하려는 순간. 우한수가 태화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네. 선생님.”

우한수가 자신의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태화에게 주며 말했다.

“내가 먹기엔 양이 좀 많아요.”

“선생님. 괜찮으시겠어요?”

“아. 나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더 먹어요. 오늘 제일 힘들었을 텐데.”

“고맙습니다. 잘 먹고 힘내겠습니다. 선생님 편하게 앉으세요.”

태화와 스태프는 우한수가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우한수가 앉자마자 태화에게 말했다.

“감독님. 재밌어요.”

“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쭉 본 적은 처음이에요. 그동안 주로 단역만 해서 난 그 역만 하고 그냥 갔었는데.”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우한수가 정원석과 선혜영을 바라보며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사귀는 사이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