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0화
태화는 한재영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래. 수고 많았다. 역시 한재영이야.”
“그걸 이제 알았냐?”
순간 이우섭이 태화와 한재영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태화 형. 재영이 형. 고생 많았어요.”
“고생?”
“네. 재영이 형이 조합장 앞에서 무릎……. 헉.”
이우섭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한재영이 이우섭의 옆구리를 손으로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화는 문맥상 이우섭이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조합장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다고.
“우섭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이우섭은 대답하기 전 한재영의 눈치를 봤다. 분위기를 파악한 태화가 한재영에게 말했다.
“재영아. 눈치 주지 마라.”
“아. 자식 말하지 말라니까.”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지. 안 그래?”
이렇게 된 이상 한재영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내가 말할게.”
#.
며칠 전.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재개발 조합사무실 건물 앞에 섰다. 조합사무실은 건물 3층에 있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제작부는 아니지만 저예산 영화 특성상 제작부 일도 일부 맡아서 하고 있었다.
이우섭이 한재영에게 물었다.
“근데. 허락해 줄까요?”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야지.”
“방법은 있는 겁니까?”
한재영이 이우섭과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우섭과 김현석이 한재영에게 다가갔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발언은 내가 다한다. 너희 두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하는 행동에 박자만 잘 맞추면 돼. 알겠어?”
이우섭과 김현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설령 무릎을 꿇더라도 너희 둘은 그러지 마라.”
한재영의 말에 이우섭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
“무릎까지 꿇어요?”
“그래. 그럴 수도 있으니까 미리 말해두는 거야. 빠듯한 예산에 촬영비까지 물어가며 하기 힘들어.”
한재영이 이우섭과 김현석의 분위기를 살폈다. 두 사람은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게다가 이번 촬영 장소는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려. 게다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이우섭이 대답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무릎까지 꿇는 건…….”
“왜. 자존심 상하냐?”
“사실 좀 그렇습니다.”
“잘 들어. 지금까지 태화가 해왔던 일들을 생각해 봐.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이우섭과 김현석은 한재영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실제 촬영에 들어가는 게 기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바탕엔 태화의 노력이 있었다.
“이제 우리도 뭔가 하나 해내야 한다. 안 그래?”
“…….”
“난 되기만 한다면 백번도 더 무릎을 꿇을 수 있어.”
“…….”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나 혼자 들어간다.”
이우섭이 깜짝 놀라서 한재영에게 되물었다.
“혼자서요?”
“그래. 난 하기 싫은 사람 억지로 데려가긴 싫다.”
“잠깐만요. 현석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하고요.”
“너무 오래 끌지 마.”
“알겠어요.”
이우섭이 김현석을 데리고 건물 모퉁이로 갔다. 둘이 상의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상의를 마치고 한재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저랑 현석이랑 이야기해 봤는데요.”
“그래.”
“그럼 저희도 같이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우섭의 대답을 듣자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괜히 너희까지 나섰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어.”
“그럼 저희는?”
“일단 내 뒤에서 도와달라고 하소연해. 고개 푹 숙이고.”
“알겠어요.”
“혹시라도 너희들까지 무릎 꿇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내가 손으로 신호 보낼게.”
“어떻게요?”
“내가 왼손을 주먹 쥐었다가 펴면 너희들도 무릎 꿇는다. 오케이?”
이우섭과 김현석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자. 그럼 들어간다.”
조합사무실로 들어가자 조합원 서너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합원은 40~50대의 중년 남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한재영 일행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지요?”
한재영이 대답했다.
“조합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미리 전화하고 오신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한재영은 미리 준비해 온 음료수 박스를 조합원에게 건넸다.
“고생하시는데 이거라도 드시고 하십시오.”
그 조합원은 큰 거부감 없이 한재영이 건넨 음료수 박스를 받았다.
“뭘 이런 걸 다 준비해 주셨나.”
음료를 받아든 조합원이 조합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합장님 계시니까 만나고 가요.”
조합장실은 조합사무실 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고 한재영과 일행은 그곳으로 향했다.
#.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조합장실로 들어가자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가 정면으로 보였고 커다란 명패가 눈에 띄었다.
조합장 이철호.
한재영이 이철호를 보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고 이우섭과 김현석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조합장님.”
“아. 누구시더라?”
“엊그제 연락드렸었죠? 영화 촬영 때문에 왔습니다.”
“아. 아. 맞다. 거기 자리에 앉아요.”
조합장 앞으로 기다란 소파가 양쪽으로 두 개가 있었다. 한재영이 조합장 기준 왼쪽에 앉고 이우섭과 김현석은 그 반대편에 앉았다.
한재영과 일행이 자리에 앉자 조합장 이철호가 입을 열었다.
“근데 거기서 무슨 영화 촬영을 한다고 그래요? 철거 예정이라 사람들 다 나가고 없는데?”
한재영이 입을 열었다.
“네. 저희 영화 촬영지가 철거 예정지입니다.”
“아. 그래요?”
“그렇습니다.”
“예전에도 그 동네로 촬영을 제법 왔었지.”
“…….”
“방송국에서 드라마도 찍고 그랬어요. 거기가 경치가 좋다고.”
“네. 그랬었군요.”
“근데. 내 기억엔 공짜로 찍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한재영은 내심 우려했던 일이 현실화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나왔던 곳은 공짜가 아니라 돈을 받고 촬영을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촬영지로 유명한 곳은 촬영료만 꽤 많이 지급해야 하는 곳도 있다.
여기서 촬영료로 얼마를 지급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된다. 그 이유는 가격흥정이 주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한재영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 작품에 참여하면서 터득한 노하우이기도 했다. 한재영은 제작부에서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보곤 했는데 돈을 말하는 순간 상대는 돈에 집중한다는 걸 터득했었다.
-그래서 얼마 줄 건데?
이렇게 되면 부담을 최소화해야 하는 한재영 처지에서 좋을 게 없다. 한재영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서 한재영은 계획했던 대로 이철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한재영이 무릎을 꿇자 이우섭과 김현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재영의 뒤쪽으로 섰다. 이철호는 순간 당황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도와주세요. 조합장님.”
이우섭과 김현석도 한재영의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외쳤다.
“도와주세요.”
“자네들 이게 도대체.”
한재영이 간곡하게 말을 이어갔다.
“조합장님. 젊은 사람들이 무언가 해보려고 모였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많이 부족합니다.”
한재영은 일부러 돈이라는 단어를 빼고 말했다. 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순간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한재영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장님만이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촬영 허가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얼…….”
이철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끊었다. 이철호가 하려고 했던 말은
-그러니까 얼마를 줄 건가?
하지만 이철호는 저렇게 간절하게 도움을 호소하는 젊은 사람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기 뻘쭘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돈을 내놓으라고 할 정도면 강철같은 멘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철호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한재영도 바로 이점에 승부를 걸고 있었다. 일반적인 멘탈의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려운 사정을 말하는 젊은 사람한테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재영이 모르고 있던 사실.
이철호는 본래 흙수저 출신이었다. 자신도 젊은 시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간청했었고 실제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이철호는 대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할 정도가 아니라면 차라리 이미지라도 좋게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보게. 젊은 친구.”
한재영이 대답했다.
“네. 조합장님.”
“자신 있나?”
“네?”
“잘할 자신 있냐고?”
한재영은 조합장이 자신의 의도대로 결정한 걸 알아챘다.
“잘할 자신……. 있습니다.”
“그럼. 거기서 촬영하게.”
“정말이십니까?”
“자넨 속고만 살았나?”
“…….”
“거기에 사람이 살지도 않는데 무슨 돈을 받겠나? 그러니까 그만 무릎 꿇고 일어나게.”
한재영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한재영은 당장에라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최대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합장님.”
#.
한재영은 말재주가 있어서 같은 이야기라도 감질나게 했다. 그래서인지 같은 자리에 있었던 이우섭과 김현석도 한재영의 이야기에 빨려들고 있을 정도였다.
[영감님. 재영이가 자존심을 버리고 일할 거로 생각했지만 무릎까지 꿇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네. 한재영이 말로 상대를 잘 구슬렸을 거로만 생각했었네.]
[그러게, 말입니다. 재영이가 그런 건 잘하니까요.]
[음. 그런가? 어쨌든 자네가 한재영을 프로듀서로 선택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네.]
[네. 영감님.]
태화는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태화는 한재영에게 다가가 꼭 껴안았다. 너무나 고마운 걸 표현할 방법이 태화에겐 당장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맙다. 재영아.”
“뭘. 그런 거로 그러냐? 당연히 내가 할 일이었어.”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태화가 얼마나 세게 껴안았는지 한재영은 답답함을 느꼈다.
“야. 답답하다 이것 좀 풀어라.”
“어?”
태화는 비로소 자신이 한재영을 너무 세게 끌어안았다는 걸 인지했다.
“그래.”
태화는 한재영의 말대로 손을 풀었다. 그러자 한재영의 발언이 이어졌다.
“태화야. 난 이 작품이 어떻게든 만들어지게 하는 게 임무인 사람이야.”
“…….”
“그냥 내일 한 거야.”
이 상황에서 한재영은 자신이 일한 티를 내도 충분했다.
-그럼. 내가 아니면 못 했지!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한재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담담하게 자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태화는 한재영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한재영. 이 녀석.”
태화는 순간 다시 한재영을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한재영이 몸을 뒤로 빼며 슬쩍 피했다.
“야. 그만해라. 네가 날 껴안는 거 사양한다.”
“야. 기특해서 그래. 기특해서.”
태화는 한재영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한재영에게 다가갔다.
“야! 서태화! 됐다고!”
한재영이 재빨리 뛰기 시작했고 이에 질세라 태화도 한재영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대낮의 추격전.
태화와 한재영의 모습을 보고서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은 순간 웃음이 빵하고 터졌다.
“깔깔깔!”
여기에 이한철의 한마디가 스태프들의 웃음을 더 증폭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