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9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애태워서 미안하다.”
“하지만 하나 염려가 된다.”
태화는 한재영의 걱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정원석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 때문에?”
“그래. 선혜영의 캐스팅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 정원석이 만약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네. 걱정이 뭔지 안다. 하지만 난 정원석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로 본다.”
“무슨 근거가 있는 거야?”
“정원석은 이 작품의 가치에 기꺼이 동의한 사람이야. 자신이 뭔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순간 이 작품이 망가진다는 걸 본인도 잘 알아.”
“…….”
“게다가 본인도 이 작품을 통해서 한 단계 위로 올라가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 작품이 망가지면 자신의 목표도 망가질 수밖에 없어.”
“그래도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잖아.”
“난 정원석이 그 정도의 인내심은 있다고 생각한다.”
“인내심이라.”
“그래. 정원석 자신도 내면엔 성공에 관한 욕망이 있겠지. 하지만 그걸 자신의 손으로 망쳐버릴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 거야.”
“하긴 정원석은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지. 신중하기도 하고.”
“재영아. 모든 건 다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본다. 내가 감독이잖아.”
“네가 그렇게 판단한다니 난 따를 수밖에……. 근데 너 자신 있는 거냐?”
“이건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야.”
“그럼?”
“의무.”
“의무?”
“그래. 이 작품의 성공. 반드시 이뤄야만 하는 거야. 난 그게 이루어지게 해야 하고.”
한재영은 이 사안에 대해서 더는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태화는 지금껏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과정에서 하나씩 뭔가를 이루어왔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왔다. 그로 인해 한재영은 태화가 앞으로도 잘해낼 거라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도봉 감독도 최수빈이 아닌 선혜영을 선택했을 때 한재영과 같은 우려를 표현했었다. 하지만 태화는 한재영에게 답했던 것처럼 대답했고 박도봉 감독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태화 군. 자네의 방금 그 태도 아주 마음에 드네.]
[제 태도요?]
[그렇네. 움츠러들지 않고 대범하게 임하는 태도 말일세.]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지금은 결정해야 하는 타이밍이잖아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 우유부단한 태도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현실에선 훨씬 더 많네.]
[정무적 감각이 부족한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네. 감독이란 작품 제작 사안에 관해서 신속하게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일세. 방금 자네처럼 말일세.]
한재영은 이제 화제를 최수빈으로 바꿨다.
“근데 최수빈한테 전화할 거야?”
“해야지.”
“왜?”
“왜라니?”
“그냥 문자로 보내. 합격 통보도 아닌데. 왜 불편하게 직접 전화를 해?”
한재영의 말이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다. 문자로 통보하면 깔끔하게 처리될 일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 좀 편해지자고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건 책임회피에 불과해. 내가 먼저 해묵은 감정 풀자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지.”
“…….”
“게다가 윤주 누나도 있어.”
“맞다. 윤주 누나가 있었지. 그냥 문자로만 통보하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겠지. 안 그래?”
“어휴. 어렵다. 어려워.”
#.
얼마 후.
태화는 옥탑 평상에 혼자 있었다. 눈치가 빠른 한재영이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최수빈에게 전화하기 전 선혜영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혜영 님 핸드폰이죠?”
-서태화 감독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어머.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제가 연락을 드린 건 선혜영 님이 심수영 역에 캐스팅되었다는 걸 알려드리기 위해섭니다.”
-정말요?
“네. 선혜영 님. 오디션 때 연기 훌륭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절 선택해 주셔서.
“앞으로 연기 기대하겠습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그럼 조만간 다시 연락하기로 하죠.”
-네. 감독님. 또 봬요.
태화는 선혜영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서 바로 최수빈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태화는 최수빈의 전화번호를 보고서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 이건 내가 한 결정에 책임을 지는 거다. 좀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태화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5초 정도 지난 후에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서태화, 너구나.
“내 번호 있었네.”
-안 지웠나 봐. 용건이 뭐야?
“캐스팅 때문이야.”
-결정한 거야?
“그래. 결정했어.”
태화와 최수빈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숨이 막힐 듯한 순간이었다.
숨소리마저 멈춘 듯한 침묵.
태화는 이 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최수빈은 이 침묵 속에 뭔가 감이 왔다.
아. 안 됐구나…….
태화도 최수빈이 자신의 결과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태화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무렵. 최수빈의 목소리가 고통스러운 침묵을 깨고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나 혹시 안 된 거니?
태화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네 말대로야.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캐스팅됐어.”
태화의 말이 끝난 후 다시 몇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최수빈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혹시 내 바로 앞에 오디션 봤던 사람이 된 거야?
“맞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촉이 왔어.
태화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가 안 된 이유. 듣고 싶어?”
-뭐?
“내가 전에 말했잖아. 나는 널 감정적으로 탈락시키지 않겠다고. 만약 네가 듣고 싶지 않다면 그 이유 말하지 않고 전화 끊을게.”
-아니. 말해줘. 듣고 싶어.
“그래 말할게. 너하고 이번에 캐스팅된 선혜영은 이미지와 연기력으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어. 두 명 다 잘해주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난 이 작품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거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어.”
-더 큰 이익?
“그래.”
태화는 최수빈에게 자신이 선혜영으로 결정한 배경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수빈도 태화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래서 난 선혜영을 캐스팅하기로 했어.”
-…….
몇 초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 최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네 결정 이해한다.
최수빈이 이렇게 대답한 건 태화가 말했던 내용이 억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이유로 캐스팅이 된 사례가 실제로도 꽤 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나도 고마워.
“뭐가?”
-그냥 문자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전화해 줘서.
“이렇게 하는 게 너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어.”
-응. 그래.
태화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상대인 최수빈에게 상처만 줄 뿐이었다.
“이만 끊을게.”
-그래.
태화는 통화를 끝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화 군. 잘했네.]
[생각보다 힘들군요.]
[자네 마음 충분히 이해하네. 상대방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하는 건 언제나 힘든 일이네. 비록 그 상대가 자네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말일세.]
태화는 현재 자신의 심경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박도봉 감독이 고마웠다.
[영감님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런 말 말게나. 난 자네가 어려운 결정을 하고 실행한 게 오히려 대견스럽다네.]
#.
며칠 후
태화는 스태프들과 함께 마지막 헌팅 장소로 가고 있었다. 마지막 헌팅 장소는 바로 철거 예정지였다.
부수다 만 집들과 주인을 잃은 길고양이들. 그리고 벽에 쓰인 욕설과 낙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들.
철거 예정지는 그 자체로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태화 군. 마지막 결말 부분을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는 장소네.]
[네. 이 영화의 비극적 결말과 맞닿아 있죠,]
이 철거 예정지에서 복권과 엮인 사람들이 한바탕 혈투를 벌이는 게 이 작품의 결말이다. 그리고 그 복권은 주인공인 박성욱이 아닌 의외의 인물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늘은 태화와 한재영을 비롯한 연출 제작 스태프 외에 이한철도 테스트 촬영을 위해서 함께 왔다.
이한철이 태화에게 말했다.
“태화야.”
“네.”
“윤주가 고맙다고 전해달란다.”
“고맙다고요?”
“그래. 윤주 입장에선 어쨌든 네가 수빈이한테 직접 전화를 해줘서 체면치레는 했거든.”
“수빈이가 윤주 누나한테 전화한 겁니까? 내가 전화로 오디션 결과 통보해 줬다고?”
이한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수빈이한테 전화했을 때 윤주는 수빈이하고 같이 있었어. 둘이 친하니까 윤주가 가끔 수빈이 자취하는 데 놀러 가거든.”
“그랬군요. 수빈이는 어땠습니까?”
“뻔하지. 한동안 울었다고 하더라고.”
“그랬군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한철한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태화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한철이 태화의 어깨를 자기의 손으로 살짝 잡았다.
“태화야. 나하고 윤주는 너 지지한다. 네가 내렸던 판단 합리적이었어. 넌 네가 할 수 있는 걸 했어.”
이한철은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과장되게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이한철이 방금 했던 발언이 태화에게 더 진심으로 다가왔다.
“고마워요.”
잠시 후 이한철은 카메라를 세팅하고 나서 뷰파인더로 화면에 잡힌 프레임을 확인했다.
“근데 여기 촬영지로 딱이다. 나도 몇 번 철거 예정지에서 촬영해 봤지만, 여기만큼 느낌이 좋지 않았어. 한 번 봐.”
태화는 뷰파인더로 화면을 확인했다.
“저도 형 생각이랑 같아요. 전반적인 느낌이 너무 좋아요.”
태화는 뷰파인더를 확인하고 나서 이우섭과 김현석 두 사람을 불렀다.
“우섭아! 현석아!”
태화가 부르자마자 이우섭과 김현석이 태화 옆으로 왔다.
“두 명 수고했다. 이곳 너무 좋다.”
이우섭이 태화에게 말했다.
“현석이 공이 커요.”
“진짜?”
“네. 현석이가 혼자 여기 와서 먼저 본 겁니다.”
태화가 현석이에게 물었다.
“현석아. 정말이야?”
“네. 그냥 지나가다 혼자 와봤는데 괜찮은 거 같아서.”
“좋은 판단이었다.”
김현석은 태화의 칭찬에 부끄러웠는지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현석이 공이 제일 크지만 우섭이도 수고했어.”
이우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만약 네가 현석이 의견을 뭉갰으면 이런 결과가 없잖아. 게다가 현석이 공을 빼앗지도 않았고.”
“그거야 당연한 거죠.”
“그래. 앞으로 그렇게만 하면 된다.”
태화는 아직 한가지 확인할 사항이 있었다.
“재영아.”
“왜?”
“여기 촬영해도 문제없는 거지?”
“그럼. 재개발 조합, 구청, 그리고 경찰서에 다 협조 공문 보냈어. 촬영 허가받았고. 촬영 날짜만 정해지면 그때 다시 알려주면 돼.”
철거 예정지라고 해서 그냥 무단으로 촬영해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한 거로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촬영을 진행했다가 낭패를 겪는 경우가 간혹 있다.
여기에 필요하면 관계된 기관에 정식으로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이런 걸 요청하는 게 바로 제작부의 일이다.
“혹시 돈을 달라고 해?”
“아니. 이거 저예산 영화라고 사정을 말했지. 도와달라고.”
태화는 한재영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재영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던졌을 게 뻔했다.
“근데 조합장이 얘기가 좀 통하더라고. 거기에 사람이 살지도 않는데 무슨 돈을 받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