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8화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만큼 절실한 것도 없겠죠.]
20대에 자리를 잡지 못한 여배우가 30대에 접어들면 그 미래는 암울하다.
[그렇네. 절실함은 사람을 변화하게 만들지.]
[그런데 그렇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네요. 예전 같았으면 최수빈의 저런 발언을 듣고서 통쾌해했을 겁니다. 너 참 쌤통이다. 나를 그렇게 무시하더니. 그렇게 말입니다.]
[그건 그만큼 자네의 그릇이 커졌다는 의미일세.]
[그릇이 커졌다?]
[그렇네. 태화 군. 과거의 자네가 감정에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현재 자넨 그 수준은 벗어난 수준일세.]
[그럼요. 지금 저한텐 그런 감정보다는 작품이 중요하니까요.]
[바로 그것이 아주 큰 변화네.]
[이런 변화엔 영감님이 큰 몫을 담당하셨고요?]
[흠흠. 이런 말 하기는 좀 뭐 하지만 내 덕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
[크크. 영감님도 자신을 칭찬하는 말엔 약하시군요.]
태화는 다시 최수빈에게 집중했다.
“내가 그 시나리오를 썼고 감독인데도 하고 싶어?”
“그래. 윤주 언니가 처음부터 이 작품 네가 썼다고 했다면 난 아예 이 시나리오를 보지도 않았을 거야. 근데 처음엔 윤주 언니가 그런 말 안 했거든. 그래서 이 작품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커져 버렸어. 그래서 오디션에 지원한 거고.”
“난 너를 감정적인 이유로 떨어뜨리진 않아. 내가 그럴 거였으면 네 오디션을 진지하게 하지도 않았을 거야. 네가 너 오디션 볼 때 건성으로 본 거 같았어?”
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느낌은 없었어.”
“네가 만약 안 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 말 진심이야?”
“그래. 너도 네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내가 널 감정적으로 떨어뜨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태화는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최수빈은 태화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과거의 최수빈이었다면 지금 딴청을 피우고 있어야 했다.
태화와 최수빈의 대화를 듣던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 군. 지금이 자네와 최수빈의 오랜 감정을 끝낼 수 있는 기회일세. 현재 최수빈은 자네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네.]
[저도 영감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렇게 우연히 찾아오는군요.]
[이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친다면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일세.]
[당연하죠.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전 이 기회를 반드시 살릴 겁니다.]
태화도 이 기회에 최수빈과 감정을 풀어버리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혹시라도 최수빈이 여주로 확정된다면 편하게 현장에서 볼 수 있다. 반대로 최수빈이 캐스팅되지 않더라도 쓸데없는 오해를 피할 수 있다. 태화는 우연히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최수빈.”
“왜?”
“나하고 너. 해묵은 감정 이젠 끝내자.”
최수빈은 태화의 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태화가 이렇게까지 전향적으로 나올 거로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너하고 나 둘 중 하나가 영화판을 떠나지 않는 한 어차피 만나게 될 테니까. 그때마다 힘들게 감정 소비할 순 없잖아.”
“…….”
“그렇게 해봤자 우리 둘만 손해고. 딱 계산 나오잖아.”
태화는 최수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수빈도 태화의 제안을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태화의 말처럼 최수빈은 영화판에서 태화를 언제고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태화의 진심이었다.
최수빈은 한동안 말없이 태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태화도 최수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태화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진지했다. 최수빈은 태화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알았어.”
최수빈은 태화가 내민 손을 잡았다.
“서태화. 너 많이 변한 거 같다. 한철 오빠도 네가 먼저 제안했다고 하더니.”
“사람이니까 변하지. 나쁘게 변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냐?”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네.”
#.
다음 날.
태화가 한재영의 옥탑 평상에서 스태프와 회의를 진행했다.
“오늘부터 오디션 때 촬영했던 걸 보고 배역에 맞는 연기자를 추려낸다. 방법은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함께 보면서 판단한다.”
“그럼. 장소 헌팅은 어떻게 합니까?”
“헌팅할 장소 몇 군데 안 남았지?”
“네.”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헌팅 장소가 있어?”
“없습니다.”
“그럼. 일단 캐스팅 먼저 진행한다. 현재 중요한 건 캐스팅이니까.”
“알겠어요.”
태화가 메모리 카드를 한재영에게 건네며 말했다.
“재영아 네 컴퓨터 써도 되지? 아무래도 네 컴퓨터가 성능도 좋고 하니까.”
한재영의 컴퓨터는 4K 동영상 편집을 충분히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태화는 실제로 촬영이 시작되면 한재영의 컴퓨터를 편집용으로 쓸 계획이다.
“응. 써도 돼. 근데 너 여주 결정은 했냐?”
태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직 결정 못 했다.”
태화는 어제 집에 돌아가서 몇 번이고 선혜영과 최수빈의 오디션 장면들 반복해서 보았다. 하지만 태화는 아직 누구로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좀 더 생각해 봐야지. 일단 다른 배역 먼저 정하자.”
“그래. 그렇게 해.”
잠시 후 태화를 포함한 네 명은 한재영의 모니터 앞에 앉았다. 태화가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
“각자 오디션 영상을 보면서 연기자에 대해서 평가하면 된다.”
이우섭이 태화에게 질문했다.
“평가 항목은 뭡니까?”
“우선 연기자의 이미지. 시나리오의 전반적인 느낌과 해당 배역의 이미지가 맞는지. 그걸 평가한다.”
“…….”
“다음으론 연기력이다. 연기자의 발성이나 표정 등을 중점적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기타 항목이다.”
“기타 항목이요?”
“그래. 위의 두 개의 항목 빼고 적으면 된다.”
“그럼. 태도 같은 것도 들어가겠군요.”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어차피 영화란 작업도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거다. 태도가 좋지 못한 사람은 함께 하기 어렵지. 하지만 태도는 건방져 보이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다.”
“네?”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것도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오디션에서도 자신감이 없는데 실제 촬영 현장에선 더 위축될 수 있어.”
“아. 그 부분을 놓칠 뻔했네요. 그것도 주의해서 보겠습니다.”
“그리고 배역마다 토론하는 과정을 거칠 거야.”
“토론이요?”
“그래. 그래야 우섭이나 현석이도 뭔가를 배우지. 또 그렇게 해야 더 책임감을 느낄 거 아냐?”
이우섭과 김현석은 태화의 말에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자신들이 배역 선정에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기도 했고 비로소 영화 일을 한다는 실감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다른 질문 없지?”
“없습니다.”
“좋아. 재영아.”
“시작할까?”
“그래.”
한재영이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자 오디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
캐스팅 작업은 사흘간 이뤄졌다. 예상보다 길어졌지만,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태화의 말처럼 이우섭과 김현석은 배역 결정 토론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고 작품에 대한 책임감도 더 커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자 주인공인 심수영 배역을 빼놓고 나머지 배역은 완성된 상태였다.
태화가 이우섭에게 지시했다.
“우섭아. 오디션 결과 연기자한테 통보해 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선혜영이냐 최수빈이냐? 이에 대한 답을 태화는 찾지 못했다. 한재영,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도 둘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제 남은 건 태화의 결정밖에 없었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영아.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래. 너도 머리 아프겠지. 같이 갈까?”
“아니. 혼자 갔다 올게.”
태화는 한재영의 옥탑을 나와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태화 군. 머리가 아프지?]
[네. 꽤 아프네요.]
[좋은 리더는 신속한 판단이 중요하네.]
[근데 이번 사안은 쉽지 않네요. 영감님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나도 두 사람의 이미지와 연기력만으로 결정한다면 아마 자네처럼 결정하기 힘들었을 걸세.]
[그 말은 이미지와 연기력 이외에 다른 판단 기준이 있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게 뭡니까?]
[자넨 이런 말을 들었을 거네. 만약 두 사람의 능력이 대등하다면 누구를 뽑겠는가?]
태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능력이 대등하다는 건 일을 맡겼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가 비슷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업무 능력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차별성을 찾아야 한다. 대부분 조직에서 능력이 대등하다면 성격이 좋은 사람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성격이 원활해야 그 조직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 그거 자체가 바로 이익이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질문한 해답을 찾아냈다.
[그건 그 사람을 뽑았을 때 조금 더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 아닌가요?]
[바로 그거네. 자넨 선혜영과 최수빈 둘 중 누구를 뽑았을 때 이 작품에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따져봐야 하네.]
[영감님 말이 맞아요.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 선혜영과 최수빈의 이미지와 연기력만 가지고 결정하겠다고 한 것 자체가 문제였어요.]
[자넨 철저하게 이익의 관점에서 여자 주인공 캐스팅을 결정해야 하네. 그래야 자네는 둘 중 한 명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어.]
[이제야 실마리가 조금 풀리네요.]
태화는 바로 발길을 돌려서 한재영의 옥탑으로 향했다.
태화가 다시 옥탑으로 돌아오자 한재영 혼자 평상에 앉아있었다. 이우섭과 김현석은 옥탑방에서 태화가 지시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한재영은 태화를 보자마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산책 끝내고 돌아온 거야?”
“응.”
“근데 결론은 냈냐?”
“그래.”
한재영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누구로 결정했는데?”
“…….”
“혹시 최수빈이야?”
“아니. 선혜영.”
“진짜?”
한재영은 발언한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태화가 한재영의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근데 넌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들켰냐?”
“그래. 인마. 네 표정 너무 티 났어. 한숨까지 내쉬고.”
“사실 최수빈이 되면 좀 그렇잖아. 아무리 둘 사이 해묵은 감정을 정리하기로 했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워? 사람 마음이 이제부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가지는 않잖아.”
“내가 선혜영을 선택한 건 그런 이유가 아냐.”
“그럼. 이유가 뭐야?”
“선혜영을 캐스팅했을 때 작품에 더 이익이 되니까.”
“뭐? 이익?”
“그래. 한번 생각해 봐. 남주를 맡은 정원석과 선혜영은 같은 극단 소속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라고.”
“듣고 보니 네 말에 일리가 있다. 정원석도 너한테 고마움 같은 걸 느낄 테고.”
“게다가 정원석의 공연 일정이 끝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해.”
“그렇지. 남주하고 여주하고 친해질 시간이 거의 없지.”
보통 영화에 남주와 여주가 캐스팅되면 서로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어색함이 없어야 촬영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도 알겠지만, 정원석과 선혜영은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이미 친밀한 사이니까.”
한재영은 태화의 대답을 듣고 나서 손뼉을 쳤다.
“태화 너 이번엔 진짜 잘한 결정이다.”
“그럼 이전에 내가 했던 결정은 이상했냐?”
“그게 아니고. 네가 전에 좀 어렵게 갔잖아. 그래서 내가 속으로 얼마나 애가 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