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7화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하게. 어쨌든 한재영이 잘못을 했지만, 이 상황 그대로 두어서는 곤란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이 맞는다고 판단했다. 태화가 한재영의 궁색한 처지를 계속해서 내버려 두는 건 전혀 좋지 않다.
혹시라도 한재영이 태화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는다면 태화 입장에선 언제 터지질 모르는 폭탄을 안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태화는 현 상황에서 가장 나은 선택지를 골랐다. 그건 바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다.
“최수빈 님. 의상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기로 하죠.”
“아니. 저는 피디님이 지적하기에…….”
최수빈은 시선을 슬쩍 한재영을 바라보았다. 최수빈의 시선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한재영.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한재영은 최수빈과 눈빛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슬쩍 시선을 피했다. 최수빈은 한재영의 이런 태도가 더 못마땅했다.
‘한재영. 너 이 자식……! 내 눈을 피해?’
한재영과 최수빈의 신경전이 벌어지자 태화는 여기서 확실히 못을 박아야겠다고 판단했다.
“최수빈 님. 어쨌든 과한 건 사실입니다.”
“네?”
“지금 중요한 건 의상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연기입니다. 거기에 집중하죠.”
태화의 말이 맞았기에 최수빈도 뭐라고 되받아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최수빈은 태화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태화가 자신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오디션에 준비한 최수빈 님의 의상. 어떤 의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태화의 뜻밖의 발언에 최수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최수빈은 순간 태화에게 가졌던 서운한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최수빈은 태화의 눈빛을 보았다. 태화는 최수빈의 눈빛을 애써 피하지 않았다.
‘방금 한 말 그냥 한 말이 아니야. 정말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그 서태화 맞아?’
최수빈은 태화가 과거의 ‘서무스’ 시절의 서태화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최수빈 님. 그러니까 이제 연기에 집중했으면 좋겠군요.”
최수빈 입장에서도 태화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어요. 연기에 집중하죠. 그게 중요하니까.”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상대 역할인 박성욱은 여기서 오디오로 들려줄 겁니다. 최수빈 님은 그에 맞춰서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태화는 원래 한재영을 편드는 것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하려고 했었다.
[태화 군. 애초에 계획했던 것과는 다른 흐름이네.]
[네. 제 머릿속에 순간 스치는 생각 때문에요.]
[스치는 생각?]
[네. 과연 이렇게 하는 게 옳은 걸까? 한재영을 궁색한 처지에서 구해내는 건 좋지만 최수빈에게는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어쨌건 최수빈은 내 영화에 참여하기 위해서 오디션을 보러 온 연기자다. 최소한 내가 주최한 오디션에 참가한 이상 공정하게 오디션을 치를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들이요.]
[훌륭한 생각들일세. 사람들은 순간순간 중요한 점을 놓치기도 하지. 나도 자네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아까는 발언하지 않았네.]
[왜 그런 겁니까? 혹시 절 시험한 겁니까?]
[시험이라기보다는 자네가 이런 판단을 했으면 좋겠다고 기대했었다고 보는 게 맞네.]
[말이 길어서 그렇지. 시험이 맞는군요.]
박도봉 감독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100%보다는 80% 정도만 말하곤 했다. 그리고 박도봉 감독도 자신의 핑계가 궁색하다는 걸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박도봉 감독의 말투가 다소 조심스러워졌다.
[자네. 혹시 삐쳤나?]
[삐쳤다기보다는 제 판단이 맞았다는데 방점을 두고 싶네요.]
[다행일세. 어째든 이번 상황에서 자넨 중심을 잘 잡았네.]
태화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최수빈은 녹음된 박성욱의 대사에 따라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태화는 최수빈의 연기를 집중하면서 지켜보았다. 최수빈의 연기는 분명 선혜영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괜찮았다. 태화는 일단 선혜영과 비교하기 위해서 같은 방식으로 최수빈의 오디션을 진행하기로 했다.
“최수빈 님. 여기서 다른 장면도 연기도 할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
“그럼. 제가 임의로 하나 골라서 진행하겠습니다. 괜찮겠죠?”
“네. 그런데 대사는 누가 쳐주나요?”
“제가 직접 합니다.”
최수빈은 순간 당황했다. 순간 과거 태화와 함께 연기했던 ‘서무스’의 기억이 최수빈에게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네?”
태화는 최수빈의 당황하는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인지도 태화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짐짓 모른 척 발언했다.
“최수빈 씨. 무슨 문제가 있나요?”
“…….”
“연기력은 크게 기대하지 마세요, 난 연기자가 아니라 감독이니까.”
최수빈은 어쩔 수 없었다. 인제 와서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닙니다. 감독님.”
“그럼. 시작하죠.”
태화는 자신이 임의로 고른 한 씬을 가지고 최수빈의 연기를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최수빈은 갑자기 결정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태화는 최수빈의 집중력을 높이 샀다. 일반적으로 연기자는 주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수빈은 자신에게 불리했던 상황을 뒤로하고 자신이 맡은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태화도 이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 님. 수고하셨습니다.”
태화의 이 발언은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감독님. 다 끝난 건가요?”
최수빈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최수빈 님. 아쉬운가요?”
“좀 그러네요.”
“다시 하겠다면 그 요청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현재의 상태는 연기자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최수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방금 했던 연기보다 잘 나올 거 같지는 않네요.”
“알겠습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최수빈이 오디션장을 나가고 한재영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재영은 그러고 나서 태화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태화야. 고맙다.”
태화는 한재영의 발언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태화가 화제를 돌린 덕에 한재영은 자신의 궁색한 처지에서 벗어났었다. 하지만 태화는 모른 척 대답했다.
“뭐가?”
“아니, 뭐……. 그런 게 있어.”
한재영의 입가에 남몰래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한재영 자신이 판단하기에 태화는 모른 척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한재영은 태화의 이런 태도가 더 고마웠다.
‘태화. 이 녀석. 오늘 제법 멋있네.’
한재영은 재빨리 화제를 돌려서 말했다.
“와. 최수빈 쟤 정말 마음먹고 왔나 보다.”
“왜?”
“말투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와. 난 좀 살벌하더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여주가 걸린 건데.”
“근데. 최수빈 쟤도 연기 괜찮았지?”
“응. 나쁘지 않았어.”
한재영은 왜 최수빈한테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 원인이 자신한테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히 이야기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했다.
“누구로 갈 거냐? 선혜영이야 아님 최수빈이야?”
“며칠 고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우섭아.”
“네. 형.”
“오늘 오디션 찍은 영상. 내가 먼저 볼 테니까 메모리 카드 나한테 좀 줘.”
“알겠어요.”
이우섭은 캠코더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태화에게 건넸다.
“우섭아. 넌 선혜영과 최수빈 중 누가 나은 거 같아?”
“네?”
“네가 촬영하면서 느낀 게 있을 거 아냐?”
“솔직히 전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괜찮은 거 같아서요.”
“그래. 알았다.”
잠시 후 김현석이 문을 열고 오디션장으로 들어왔다.
“태화 형. 다 끝난 거죠?”
“그래. 현석이도 오늘 수고 많았다.”
태화가 스태프를 향해 말했다.
“자. 오늘 다들 수고 많았다. 이제 정리하고 퇴근하자.”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태화야. 이런 날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치맥 어때?”
“난 좋아. 우섭이는 어때?”
“전 좋습니다.”
“현석이는?”
“네. 저도 좋습니다.”
“재영아. 어디 괜찮은 데 알아? 난 이 동네는 잘 모르는데.”
한재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고 이 동네 맛집 알아놨다는 거 아니냐. 거기 가면 돼.”
“역시 넌 제작 체질이야.”
#.
태화를 포함한 네 명은 오디션 정리를 마치고 ‘독립영화재단’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최수빈이었다. 최수빈은 이미 오디션 복장이 아니라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최수빈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최수빈. 혹시 날 기다린 거야?”
태화는 오디션장이 아닌 이상 편하게 말을 놓았다. 그건 최수빈도 마찬가지였다.
“응.”
태화는 최수빈과의 대화가 빨리 끝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재영아.”
“왜?”
“얘들 데리고 먼저 가 있어. 뒤따라갈게.”
“알았어.”
한재영은 이우섭과 김현석을 데리고 먼저 호프집으로 향했다. 태화가 그들의 모습을 본 뒤 시선을 돌려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왜 날 기다린 거야?”
“그냥.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서.”
“고마워? 뭐가?”
“아까 너 나한테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더라. 솔직히 놀랐어.”
“당연한 거 아니냐?”
“당연하다고?”
“그래. 너하고 오디션장에서 감정을 소비할 만큼 난 지금 한가하지 않아. 내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이 작품을 잘 만들까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히 그런 거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
“…….”
“근데 용건이 뭐야? 그냥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서 기다렸던 거야?”
“그것도 있고 또…….”
태화는 최수빈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얼버무렸지만, 그녀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 감을 잡았다.
“또 뭐? 혹시 너 내가 널 감정적으로 오디션에서 떨어뜨릴 거로 생각하는 거냐?”
최수빈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태화의 질문에 대답했다.
“너 그럴 거 아냐? 오디션장에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 거랑 나를 떨어뜨리는 건 다른 문제니까.”
“뭐?”
태화는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꾹 참아냈다.
“너 이 작품 왜 하고 싶냐?”
“시나리오가 괜찮잖아. 여주인 심수영 캐릭터도 강하고. 여배우라면 솔직히 욕심이 나지.”
“…….”
“솔직히 나 같은 처지의 여배우한테는 더더욱…….”
태화는 최수빈의 발언에 심적으로 살짝 동요되었다.
나 같은 처지라는 바로 그 발언.
태화는 최수빈이 말한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단편과 단역을 전전하는 그러한 처지. 그래서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뭔가 한 방이 필요한 그러한 처지.
[영감님. 최수빈이 나 같은 처지라는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저한테 저런 말을 하다뇨. 예전 같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오히려 저런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더 세게 말이 나왔을 텐데…….]
[그만큼 최수빈한테는 절실하다는 말이겠지. 여배우가 20대 후반인데 아직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