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6화
오전에 진행된 오디션은 빠르게 진행됐다. 기본적으로 대사가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인상에 남은 연기자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30대 초반의 남자 연기자였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중년의 역할에 지원했다. 태화가 그 연기자에게 질문했다.
“이재성 님. 이거 본인 나이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이재성은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제가 좀 노안이어서 중년 역할도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재성의 다소 엉뚱한 대답에 오디션장은 순간 웃음이 터졌다.
또 한 명은 노신사였다.
“우한수 님. 연세에 비해서 연기경력이 얼마 안 되시네요?”
“감독님. 내가 원래 젊었을 적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 그럴 만하셨겠어요. 지금 봐도 멋있으세요.”
“허허. 그런가요?”
“네.”
“그동안 먹고 사느라 연기를 못 했어요. 그래서 이제라도 하려고요.”
“멋지십니다.”
우한수의 대답을 들은 스태프는 잠시 숙연해졌다.
#.
태화를 포함한 스태프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오후 오디션에 들어갔다. 여자 주인공 오디션이라 그런지 확실히 오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오후 오디션이 오전과 달랐던 점은 남자 주인공인 정원석의 대사 연기를 오디오로 녹음해서 들려준 점이다. 아무래도 주연이다 보니 스태프가 현장에서 어설프게 대사를 치는 것보다 정원석이 직접 녹음한 파일을 들려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디션 현장의 분위기는 뜨거울 수밖에 없었고 태화도 집중해서 오디션 지원자들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어느새 오디션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어떤 거 같냐?”
“다들 연기력은 평균 이상은 되는 거 같다.”
“나도 그런 생각은 드는데. 그래도 확실한 사람은 아직이지?”
“응. 확 들어오는 사람이 없네.”
“이제 두 명 남았다.”
태화는 남은 두 명의 연기자의 파일을 보았다. 한 명은 최수빈이고 다른 한 명은 선혜영이었다.
[태화 군.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선혜영과 최수빈 둘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네.]
[네. 영감님. 그렇게 되었네요.]
선혜영, 최수빈 두 명 모두 태화에겐 어느 정도 부담이 되는 연기자들이었다. 선혜영은 아무래도 정원석의 존재가 부담이었고 최수빈은 감정적인 부분에서 부담이었다. 그래서 태화 입장에선 선혜영과 최수빈 두 사람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기를 바랐다.
두 사람이 아닌 제3의 선택지가 있었다면 태화에겐 오디션을 본 부가적인 효과이자 최상의 결과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결과는 태화의 바람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 오디션을 볼 연기자가 들어왔다.
#.
“안녕하세요. 선혜영입니다.”
태화와 한재영은 선혜영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태화가 선혜영에게 물었다.
“그때 봤던 모습하고 완전히 다른데요?”
태화가 기억하고 있는 선혜영의 모습은 깔끔하고 선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현재 선혜영의 모습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특히 선혜영은 긴 생머리에서 파마머리로 변화를 줬는데 이게 심수영의 이미지와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의상도 다소 파격적이었다.
“그런데 복장이 오늘 오디션 볼 장면과 맞지 않는 거 같은데요?”
“노래방 도우미라는 역할 때문에 나름 연구하고 온 거예요.”
태화는 선혜영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사실 오늘 오디션 보는 장면으로 공지했던 내용은 노래방 도우미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복장을 하고 왔다는 건 자신을 어필하기 위함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혹시 전에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 적이 있었나요?”
“네. 전에 했던 연극 중에 호스티스 역할이 있었어요.”
“아. 그랬군요. 선혜영 님. 오디션 볼 부분은 미리 통지받으셨죠?”
“네.”
“그럼. 오디션 시작하겠습니다.”
“네.”
“상대 역할인 박성욱은 여기서 오디오로 들려줄 겁니다. 그에 맞춰서 하면 됩니다.”
“네.”
오디션으로 볼 부분은 남주 성욱에게 여주 수영이 잡히는 장면이다.
성욱: (분노에 찬 표정으로) 야.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수영: (성욱을 비웃는다) 뭐가? 어차피 그거 가진 놈이 임자 아냐?
성욱: 뭐가 어쩌고 어째? (성욱 손으로 수영의 머리채를 잡는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수영: (악을 쓰며) 어차피 오빠도 그거 주운 거 아냐?”
성욱: (수영의 뺨을 때리며) 이게 어디서 악을 써! 악을! 다 필요 없고. 내 복권 내놔!”
수영: (처절하게) 없어! 없다고!
성욱: (눈을 부라리며) 이게 미쳤나? 너 말할 때까지 이제 나한테 맞는다.
태화는 선혜영의 연기를 집중해서 보았다. 확실히 선혜영의 연기는 앞서 보았던 연기자들과는 달랐다. 다른 연기자들이 억지로 맞춰간다는 느낌이라면 선혜영은 심수영이라는 역할이 마치 맞춤옷처럼 딱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태화 군. 선혜영의 꽤 좋았네. 하지만 한 가지 확인을 해봐야 하네.]
[영감님.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남주인 정원석과의 관계를 고려해야죠.]
정원석과 선혜영은 같은 극단 출신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방금 나온 연기가 두 사람의 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선혜영이 연기력 때문인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선혜영 님.”
“네. 감독님.”
“연기 좋았습니다. 갑작스럽지만 다른 부분 연기를 좀 봐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사는 누가 쳐주나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감독님이 직접이요? 아. 맞다. 감독님도 전에 연기했었다고 했었죠.”
“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알겠어요.”
태화는 즉흥적으로 한 씬을 골라서 바로 선혜영의 연기력을 테스트했다. 선혜영은 갑작스럽게 요구를 받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해나갔다.
태화는 선혜영의 연기가 만족스러웠다. 선혜영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요구에도 괜찮은 연기를 했다는 건 시나리오의 흐름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선혜영 님.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신혜영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선혜영이 나가자 한재영이 태화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냐?”
“현재까지 제일 나아.”
“나도 네 말에 동감이다. 사람이 저렇게 달라져 보일 수가 있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져야 하는 게 연기자 아니냐?”
“하긴 연기자는 그래야지.”
#.
잠시 후 이번 오디션의 마지막 참가자인 최수빈이 오디션장으로 들어왔다.
태화와 한재영은 최수빈을 보자 둘 다 놀랐다. 최수빈도 선혜영처럼 파격적인 복장을 하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최수빈도 파격적인 복장이 제법 잘 어울렸다. 차이가 있다면 최수빈이 선혜영보다 퇴폐미가 더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었다. 선혜영이 노래방 도우미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느낌이라면 최수빈은 경력자(?) 같은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최수빈입니다.”
최수빈은 최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인사를 건넸다. 이건 태화도 마찬가지였다.
“최수빈 님. 반갑습니다.”
태화는 선혜영과 똑같이 최수빈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복장이 오늘 오디션 볼 장면과 맞지 않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중요하기도 하잖아요. 안 그런가요. 감독님?”
“그렇군요.”
순간 태화와 최수빈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였다. 한재영이 태화와 최수빈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의상이 과하다고요?”
“네.”
한재영이 태화와 최수빈의 대화에 끼어든 이유는 간단했다. 한재영은 처음부터 최수빈이 오디션에 참여하는 게 탐탁지 않았었다.
게다가 최수빈은 감독인 태화와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태화가 신인 감독이라지만 오디션부터 이런 태도라면 한재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수빈이 정색하며 한재영에게 물었다.
“그럼 피디님은 이런 복장에 대해서 잘 아시나 봐요?”
“뭐라고요?”
한재영은 순간 당황했다. 최수빈이 되받아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답변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재영은 한동안 말문이 막혀 있었다. 그냥 다른 작품 준비하면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면 됐을 텐데 한재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최수빈은 한재영이 답변을 못 하자 재차 한재영을 향해 말했다.
“한 피디님. 아는 게 있으면 알려주시죠. 저도 많이 궁금하거든요.”
한재영은 더 궁색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한 한재영에게 최수빈의 이 발언은 도발 그 이상이었다.
[영감님. 재영이가 구석으로 몰렸네요.]
[그렇네. 태화 군. 최수빈의 저 발언은 한재영에게 그만 넌 여기서 빠지라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재영이가 아예 말을 못 하게 막아버린 거죠. 최수빈이 상대하고 싶은 건 재영이가 아니라 저니까요.]
[맞네. 대화를 더 끌어봐야 한재영에게 좋을 게 없어. 자네가 나서서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하네.]
[맞습니다.]
태화는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영감님.]
[왜 그런가?]
[최수빈의 저 과한 듯한 복장. 의도한 것일까요?]
[최수빈이 한재영 혹은 자네에게 도발을 끌어내기 위해 그런 것인지 묻는 건가?]
[네. 연기자가 특정 콘셉트의 의상을 오디션장에 입고 왔다는 건 의도가 있는 거잖아요.]
[자네 말에도 일리는 있어. 나도 오디션을 많이 봤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최수빈의 저 복장에 관해서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없네.]
[그런가요?]
[그렇네. 오늘 최수빈의 의도는 자네나 한재영에게 도발하기보다는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네. 나는 작품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의상도 입을 수 있다.]
박도봉 감독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 연기자 중에 의상 때문에 촬영 중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최수빈도 박도봉 감독이 분석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최수빈은 자신이 다른 오디션 참가자보다 불리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의상을 통해서 자신을 좀 더 어필하려고 했었다.
[최수빈이 오늘 오디션장에서 도발해봤자 득보단 실이 더 많네.]
[저와의 관계를 생각했다면 도발을 의도하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겠네요.]
[그렇네.]
[제가 좀 민감했어요.]
[아닐세.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네. 돌아가는 상황이 그러니 말일세.]
[네. 현재 벌어진 상황을 보면 재영이가 최수빈의 도발에 넘어간 듯하기도 하니까요.]
[최수빈도 나름 고민을 했을 거네. 자신이 준비한 의상이 다소 과할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평범하게 해서는 승부가 되지 않을 걸 판단한 거지.]
[하지만 도발까지 할 의도는 아니었죠.]
[맞네. 정확하게 말하면 한재영이 도발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게 맞는 거지.]
[이제야 상황이 좀 분명하게 보이는군요. 현 상황은 한재영의 도발에 최수빈이 대응하면서 벌어진 것이군요.]
[정확하게 봤네. 중요한 건 감독은 특정 상황에 빠지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판단해야 한다는 걸세.]
[그럼. 일단 벌어진 상황을 정리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