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5화
한재영의 모습이 사라지자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 군. 자네가 바로 송윤주에게 전화를 한 판단은 아주 좋았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타이밍이 훨씬 빨랐지. 사실 난 자네가 며칠 정도 고민할 거로 판단했었네. 그래서 난 자네에게 빨리 송윤주에게 최수빈에 관해 말해야 한다고 말할 참이었지.]
[괜히 시간 끄는 것보다 빨리 결정을 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시간을 끈다고 해서 더 나은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자네가 송윤주에게 던진 메시지는 아주 단호하면서도 유연했네.]
[…….]
[자네는 송윤주에게 오디션은 자네의 권한이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네. 이건 단호함이네. 그러면서 자네는 이 일로 서로 감정이 상하지 말자고 송윤주에게 제안했지. 이건 유연함이네. 송윤주는 자네의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네. 송윤주도 자신의 실책이 뭔지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자네의 제안이 고맙게 느껴졌을 거네. 만약 자네가 단호한 메시지만 송윤주에게 전달했다면….]
[아마도 윤주 누나는 마음이 상했겠죠.]
[그렇네. 이번에 자네는 훌륭한 정무적 감각을 보여주었네.]
#.
며칠 후 일요일.
“신랑 신부님 고생하셨습니다.”
태화는 폐백실에서 신랑 신부의 폐백 촬영을 마쳤다. 이게 태화에겐 예식장 마지막 촬영이다.
태화는 원래 지난주에 예식장 촬영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태화야. 네가 이번 주에 관두면 다음 주에 촬영 펑크 날지도 모른다. 한 주만 더 부탁하자.”
태화도 유진호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할 순 없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다음 주까지입니다.”
“알았어.”
태화는 폐백 사진을 촬영한 사진사 박 과장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박 과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태화 씨도 고생 많았어. 오늘까지 하고 관둔다면서?”
“네.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요.”
“참 아쉽네. 그래도 태화 씨만 한 사람 없었는데.”
“하하. 과찬이십니다.”
박 과장은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화도 박 과장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태화 씨는 어딜 가든 잘할 거야.”
“네. 고맙습니다.”
“그럼 건강하게 지내요.”
“박 과장님도요.”
태화는 박 과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사무실로 향했다. 폐백실에서 사무실로 가는 길에 안내데스크가 있다. 황민영이 태화를 보자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태화 씨. 오늘까지라면서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너무 아쉽다.”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됐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태화는 황민영과 인사를 나누고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
태화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유진호가 태화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수고했다. 촬영하면서 문제없었지?”
“네. 없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촬영 후 이렇게 긴장하지 않고 물어보는 것도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 같다.”
“오늘 관둔다고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닙니까?”
태화의 말에 유진호가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띄워주는 거 맞아.”
“하하. 그런가요?”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태화는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태화야. 언제 크랭크인이냐?”
“아마 몇 주 후가 될 거 같은데요?”
“서태화. 이 기특한 놈.”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놈보다는 녀석이 어감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래. 알았다. 이 기특한 녀석아.”
“확실히 듣기가 더 좋군요.”
“넌 나보다 난놈이다.”
“오늘 마지막이라고 절 너무 과하게 띄워주는 거 같은데요?”
유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넌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잖아.”
“그래서. 고생 좀 했죠.”
“난 그렇게 하지 못했거든.”
“…….”
“내 의지가 너처럼 강하지 못했던 거지.”
태화는 새삼 박도봉 감독이 강조했던 욕망의 크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유 팀장님 욕망의 크기가 컸다면 아마도 자신의 장편영화 한편 정도는 만들었을지도 몰라. 결국 유 팀장님은 욕망의 크기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던 거야.’
유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태화야. 앞으로 네가 만들 영화…. 반드시 극장 개봉까지 가야 한다. 알겠지?”
“네. 그렇게 되게 할 겁니다.”
순간 유진호의 얼굴엔 복잡 미묘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 표정엔 태화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자신이 하지 못했던 걸 해낸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래. 넌 해낼 거야.”
“자신하십니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네가 찍은 영상을 보면 기본기가 확실히 다져져 있어. 그러면서도 다른 촬영자들처럼 기계적이지 않았지.”
웨딩 촬영은 일반적으로 안정성을 추구한다. 리얼 타임으로 진행되는 사항에서 다시 촬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말 그대로 찍을 것만 찍는다.
유진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찍을 것만 찍는 것에도 제한을 가했다. 촬영할 때 촬영자의 위치까지 사전에 정해 놓고 쇼트의 화면 사이즈와 각도까지 미리 정해놓고 촬영자를 교육했다. 이 결과 촬영 결과물이 안정적으로 나왔지만, 영상은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진호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과거 경험 때문이다. 과거에 촬영자에게 자율성을 부여했다가 몇 번의 사고가 났었다.
결혼식을 치르는 당사자는 자신의 중요한 인생 기록을 놓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유진호는 몇 번의 컴플레인을 당했었고 심지어 금전적인 손해까지도 봤었다.
하지만 유진호는 태화에게 다른 촬영자처럼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건 태화가 촬영해 온 첫 결과물을 보고서 내린 판단이었다.
유진호도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던 사람이었고 그에 맞춰 준비했던 사람이었다. 촬영자가 촬영해 온 영상을 보면 그 촬영자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서태화 씨. 내가 말한 대로 촬영하지 않았군요.”
“그 상황에서 제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 근거는?”
“이 장면에서 신부가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여기서 줌을 서서히 당겨서 신부의 얼굴을 잡는 게 정서적으로 맞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렌즈의 줌을 당긴다는 건 영상 문법으로 피사체에 다가가는 느낌을 준다. 즉 줌을 넣지 않고 촬영했을 때보다 감정의 증폭을 더 느낄 수 있다.
“그래도 내가 줌은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줌을 쓰다가 자칫 화면이 흔들리는 위험 때문에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전 안정적으로 화면을 잡아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
“그리고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지 않습니까?”
태화의 대답을 들은 유진호는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로웠다.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지만 그동안 촬영된 영상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이 때문에 유진호는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태화의 등장은 유진호에겐 신선했다.
“좋아요. 태화 씨. 앞으로 태화 씨한테는 촬영할 때 자율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자신 있습니까?”
“네.”
유진호는 태화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태화도 유진호의 손을 잡아 그 청에 응했다.
“태화야. 응원할게.”
태화는 순간 유진호의 진심이 느껴졌다.
“고맙습니다. 응원에 보답하겠습니다.”
#.
오디션 당일.
오디션은 오전 10시에 시작할 예정이다. 태화와 한재영,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태화를 포함한 네 사람은 아침 8시에 ‘독립영화재단’에 도착해서 오디션 준비를 했다.
오디션은 강의실 3개를 쓸 예정이다. 한 군데는 실제 오디션장으로 쓸 예정이고 다른 두 군데는 연기자 대기실로 쓸 예정이다. 태화가 연기자 대기실을 두 개나 쓰는 이유는 오디션에 지원한 연기자 수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연기자 대기실 중 하나는 여성 연기자 대기실 다른 하나는 남성 연기자 대기실로 사용할 계획이다.
태화는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오늘 오디션 촬영은 이우섭이 맡았고 오디션 진행은 김현석이 맡았다. 오늘 오디션에 응하는 연기자에겐 사전에 오디션 순서를 공지했다.
김현석은 한 연기자가 끝나면 다음 순번 연기자를 오디션장으로 들여보내는 역할이다. 그리고 연기자의 연기력 평가는 태화와 한재영이 맡을 예정이다.
오디션 중 대사를 해주는 역할은 한재영이 맡았다. 태화는 오늘 오로지 연기자의 연기력만을 평가한다.
이우섭은 오디션장에 삼각대를 세우고 캠코더를 설치했다. 캠코더는 이우섭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걸 가져왔다. 이우섭이 가져온 캠코더는 저가형이었지만 오디션 촬영용으로는 큰 무리가 없었다.
태화는 이우섭에게 촬영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에 관해서 알려주기 위해 이우섭에게 다가갔다.
“우선 한 명이 끝날 때까지 커트는 하지 마.”
“네.”
태화는 확실하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김현석을 불렀다.
“현석아.”
“네.”
“거기 바닥에 테이프로 표시해 놓은 곳에 잠깐 서 봐.”
촬영할 땐 보통 연기자들의 위치를 미리 바닥에 표시해둔다. 오디션에서 이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 오디션장에 들어와서 어디에 서야 하는지 헤매는 연기자들이 가끔 있다. 미리 바닥에 표시해 두면 이런 혼란을 미리 방지할 수 있다.
태화는 김현석을 상대로 이우섭에게 시범을 보였다.
“우섭아. 잘 봐. 연기자가 들어오면 우선 풀샷으로 연기자를 잡아.”
“네.”
처음에 풀 샷으로 연기자를 잡는 이유는 연기자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다.
“현석아, 네 소개해.”
“네. 저는 김현석입니다.”
“연기자가 자기소개가 끝나면 줌을 넣어서 웨스트 샷까지 간다.”
“네.”
태화는 자신이 말한 대로 시범을 보였다.
“이 상태에서 연기자의 프로필을 찍을 거야. 현석아, 왼쪽 오른쪽 프로필 좀 찍을게.”
“네. 형.”
김현석은 태화의 지시대로 자기의 몸을 돌렸다.
“프로필 촬영이 끝나면 연기자의 연기가 시작될 거야. 현석아. 아무 대사나 해봐.”
“네.”
김현석은 시나리오에 한 장면 중 아무거나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이 상태에서 연기자가 연기를 시작하면 바스트 샷까지 들어가. 알겠지?”
“네.”
바스트 샷이 되면 연기자의 연기 중 표정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연기가 끝나면 다시 풀 샷으로 빠지는 거야.”
“알겠어요.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연기자에게 요구사항을 말하는 거, 제가 하나요?”
“응. 우섭이 네가 해야 할 거야. 아마도 나하고 재영이는 오디션에 참가한 연가자들 평가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야.”
태화가 이우섭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어때? 잘할 수 있지?”
이우섭은 다소 부담이 되었지만, 태화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우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오디션은 크게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진행된다. 오전에는 주로 여자 주인공 심수영 역할을 뺀 나머지 배역을 대상으로 하고 오후에는 여자 주인공 역할에 관한 오디션이 진행될 계획이다.
N분의 1 계약 조항과 관련해선 사전에 오디션에 참여할 연기자들에게 공지했다. 그리고 이에 동의한 사람만 현재 오디션에 참여하게 했었는데 공지를 받은 연기자들은 모두 이 계약 조항에 동의했다. 가장 비중이 큰 박성욱 역할의 정원석이 이미 동의했던 계약사항이었기 때문에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