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4화
한재영의 발언은 장난스러웠지만 실은 태화에 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한재영이 보기에 태화는 지금껏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었다.
한재영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오디션 지원자에 관한 서류를 훑어보았다. 잠시 후 한재영은 오디션에 지원한 연기자 프로필을 보던 중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그러는데?”
“야. 이거 좀 봐라.”
“뭔데 그래?”
태화는 한재영이 보라고 말한 파일을 보았다. 그 파일에는 여자 주인공 심수영 역할에 지원한 한 연기자의 프로필이었다.
“최수빈?”
“태화야. 왜 얘가 여길 지원했지? 그냥 우연인가?”
태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윤주 누나야.”
“뭐? 윤주 누나?”
#.
이한철과 송윤주가 태화를 만나러 한재영의 옥탑에 간 날, 저녁.
최수빈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최수빈은 그녀의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최수빈은 스마트폰을 들어 자신에게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머. 윤주 언니.”
-뭐 하고 있었니?
“그냥 드라마 보고 있었어요.”
-내가 네 메일로 시나리오 한 편 보내줄게.
“시나리오?”
-응. 저예산 영화긴 한데 꽤 재밌어.
송윤주는 만약 자신이 태화의 작품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면 최수빈에게도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송윤주가 최수빈에게 시나리오를 보내준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후배인 최수빈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다음은 태화와 최수빈이 화해하길 바라서였다.
송윤주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이번에 이한철이 태화의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게 계기가 됐다. 송윤주는 이한철이 태화의 작품에 참여할 가능성을 아주 낮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한철은 태화의 작품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저예산 영화? 혹시 단편?”
-아니. 장편이야.
“장편?”
-그래.
최수빈은 장편이라는 말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수빈도 단편은 몇 번 출연했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편 영화라도 성과가 있으려면 이름있는 영화제에 출품이 돼서 상을 탈 정도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예산 영화라도 장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능성은 적지만 작품이 괜찮게 나와서 극장에서 개봉된다면 자신을 관객과 영화 관계자들에게 알릴 기회가 된다.
-수빈이 너도 장편이라면 나쁘지 않잖아.
“그렇지. 언니 그럼 시나리오 보내줘.”
-알았어.
“근데 시나리오 누가 쓴 거야?”
-그런 건 따지지 말고 일단 읽어봐.
“알았어요. 언니.”
며칠 후 최수빈은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송윤주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언니. 나예요.”
-응. 그래.
“언니가 보내준 시나리오 읽어봤어요.”
-어때? 재밌지?
“응. 재밌네. 근데 이 시나리오 감독이 직접 쓴 거지?”
-그래. 왜 오디션 보게?
“응. 근데 감독이 누구야?”
-너 놀라지 마라.
“놀라?”
-그래.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언니. 그냥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요.”
-알았어. 그 작품 감독이 누구냐면 태화야.
“누, 누구라고?”
송윤주는 또박또박 발음했다.
-서. 태. 화.
“정말이야? 내가 아는 그 서태화?”
-그래. 그리고 나 이 작품에 스태프로 참여해. 한철 오빠도 참여하고.
“그게 정말이야? 어떻게 한철 오빠도?”
-놀라운 건 태화가 먼저 한철 오빠를 섭외한 거야.
최수빈은 송윤주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수빈아. 솔직히 나한테 너나 태화. 내가 좋아하는 동생들이야. 이번 기회에 너희 둘 풀 수 있으면 풀어. 수빈아 내 말 듣고 있니?
“언니 그만 끊을게.”
-수빈아. 수빈아!
최수빈은 화가 나서 송윤주와 통화를 끝냈다.
“윤주 언니. 너무한 거 아냐?”
최수빈은 이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 태화가 이 작품의 감독이 태화라는 걸 알았다면 이 시나리오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송윤주도 이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감독이 태화라고 최수빈에게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최수빈은 시간이 지나고 이성이 돌아오자 처음과 달리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수빈은 며칠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존심을 부리기엔 작품이 나쁘지 않아. 나도 이제 저예산 영화라도 비중 있는 역할로 이름을 올려야 해. 일단 오디션 지원이라도 해볼까?’
#.
[태화 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이런 걸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라고 하겠죠?]
[그렇네. 하지만 이런 돌발 상황에서도 감독은 뭔가 결정을 해야 하네.]
[알고 있어요.]
[일단 상황을 판단해 보세.]
[그래야겠죠.]
[그러려면 송윤주의 현재 역할과 지위를 판단해야 하네.]
[동의합니다.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한단 말이군요.]
[그렇네. 송윤주는 자네가 이한철을 섭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 사람이네.]
[그만큼 발언권이 있다고 보는 거죠?]
[그렇네.]
[하지만 전 조금 다르게 이 상황을 보고 있어요.]
[다르게 본다?]
[네. 영감님의 염려가 어떤 건지 알아요. 여기서 윤주 누나를 무시하게 되면 자칫 분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시는 거잖아요?]
[그렇네.]
[하지만 윤주 누나는 최수빈을 무조건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윤주 누나는 자신의 공을 내세워서 뭘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자신할 수 있나?]
[네. 윤주 누나가 만약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최수빈의 캐스팅을 저한테 직접 요구했을 겁니다.]
[하지만 직접 요구하지 않더라도 은근히 압박하는 것일 수도 있네.]
[아뇨. 윤주 누나의 의도는 제가 잘 알아요. 이 작품을 계기로 나와 최수빈이 잘 지내길 바라는 거죠. 나와 최수빈. 두 사람이 계속 영화판에 있게 된다면 계속 만나게 될 거고요.]
[음. 자네 판단에 일리가 있네. 최수빈이 오디션 공고에 지원할 걸 보면 자네에게 캐스팅까지 요구하는 건 아닌 것 같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는 않아. 자넨 어떻게든 송윤주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 일을 처리해야 하네. 방법은 있는가?]
[영감님. 전 원칙대로 할 겁니다.]
[원칙대로?]
태화의 설명이 이어졌다.
[네. 오디션을 보고 결정할 겁니다. 오디션을 치르고 나서 최수빈이 탈락했다면 윤주 누나도 이해할 겁니다.]
[혹시라도 최수빈의 오디션 점수가 가장 좋다면 자넨 어쩔 건가?]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캐스팅해야죠.]
[옳은 판단이네. 자넨 최수빈을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되네. 자네가 감정적으로 나가는 순간 지금까지 자네가 힘들게 만들어온 결과들이 무너질 수도 있어.]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하지 않을 겁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요.]
[그럼. 됐네.]
잠시 말이 없던 한재영이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맞다. 윤주 누나하고 최수빈하고 친하지.”
“아마 윤주 누나는 나하고 한철이 형 모습 보고 그랬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누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너하고 수빈이가 어떤 사이인 줄 알면서…….”
“누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누나는 나하고 최수빈. 둘 다 좋아했으니까. 이 기회에 어떻게든 사이를 풀려고 한 거지.”
“그래서 너 어떡할 거야?”
“뭘?”
“야. 네가 그냥 최수빈 서류에서 탈락시켜 버리면 되잖아.”
“아니. 그럴 순 없어.”
“뭐?”
“윤주 누나가 왜 시나리오를 최수빈한테 보냈겠냐?”
“…….”
“내가 속 좁게 행동하지 않을 거로 판단하고 한 거야.”
“그럼 최수빈도 그렇게 판단하고 오디션 지원을 한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겠어? 나하고 자신의 사이를 뻔히 아는 윤주 누나가 시나리오를 보여준 건데? 최소한 오디션은 볼 수 있다는 신호를 준 거지.”
“그래서 넌 어떡할 건데?”
“어떡하긴. 일단 오디션은 본다.”
한재영은 자기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진짜 미치겠다. 어떻게 된 게 잊을 만하면 뭐가 이렇게 터지냐?”
“일단 오디션 보고 나서 판단하자. 현재로선 그 방법밖에 없다.”
“태화야. 이거 가정인데. 너 혹시라도 최수빈이 캐스팅되면 잘할 자신 있냐?”
“그런 질문을 왜 하냐?”
“너 솔직히 최수빈 불편하잖아. 감독과 촬영감독의 관계와 감독과 연기자의 관계는 아주 다르다.”
태화는 한재영이 말한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감독과 촬영감독이 영화의 외적인 부분을 다룬다면 감독과 연기자는 내적인 부분을 다룬다. 그래서 감독과 연기자는 정신적으로도 잘 맞아야 한다. 오죽하면 페르소나라는 말까지 있을까.
(페르소나-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특정 감독과 배우는 오랫동안 함께 작업한다.)
“알아. 하지만 작품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해야지. 난 만약 최수빈이 캐스팅된다면 과거의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갈 거야. 그러니까 넌 이 일에 더는 신경 쓰지 마라.”
“어떻게 하려고?”
“윤주 누나한테 말해야지.”
“언제 말하려고?”
“지금.”
“뭐? 지금?”
“응. 지금 전화하려고.”
“야.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아니. 이건 시간을 끌 문제가 아냐.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게 나아. 시간을 끌수록 괜한 기대감을 줄 수도 있어.”
한재영은 더는 태화에게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한재영은 태화의 판단이 신속하면서도 정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화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송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윤주는 바로 태화의 전화를 받았다.
“누나. 저예요.”
-그래. 태화야. 무슨 일 있어?
“그건 아니고요. 오디션에 최수빈이 지원했더라고요,”
-진짜?
“누나가 알려준 거죠? 시나리오도 보내주고.”
송윤주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맞아. 수빈이 지원 안 할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했나 보네. 태화야 난…….
“누나 생각이 뭔지 알고 있어요. 나하고 최수빈. 이번 작품을 계기로 잘 지내길 바라는 거잖아요.”
-미안하다. 너한테 먼저 상의했어야 했는데. 너희 둘은 워낙 서로에게 으르렁대니까.
“누나. 이해해요.”
-정말?
“네. 최수빈. 오디션 지원했으니 전 보게 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최수빈의 연기가 이 작품과 맞지 않으면 캐스팅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연기가 이 작품과 어울린다면 캐스팅할 거고요.”
-나도 태화 네가 꼭 수빈이를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 말대로 하면 돼.
“알았어요. 누나.”
-태화야. 이해해 줘서 고맙다.
“전 이 일로 누나하고 어색한 관계가 되지 않을 거예요. 누나도 그렇게 할 거죠?”
-그야. 당연하지.
“알았어요. 그럼 전화 끊을게요.”
-응. 그래.
태화가 송윤주와 통화를 끝내자 한재영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 정리된 거지?”
“응. 너도 들었잖아.”
“휴. 다행이다.”
태화가 한재영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그렇게 돼야지. 태화야.”
“왜?”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머리 좀 식혀야겠다.”
태화는 한재영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간 태화의 작품 준비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그래. 다녀와.”
한재영은 옥탑과 연결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