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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53화 (53/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3화

한재영이 궁금한 듯 태화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친 데는 괜찮데?”

“수술은 잘 됐다고 했어. 가끔 욱신거린다고는 했는데.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하긴 운동 열심히 하면 좋아진다고 하더라.”

“민석이 형도 다시 운동한다고 하더라.”

“민석이 형도 속으론 조명 일 하고 싶었나 보다.”

“네 말이 맞아. 그걸 트라우마라는 장벽이 막고 있었지.”

정민석이 섭외되고 이후 촬영 준비는 착착 되어갔다. 먼저 미술과 소품은 한 팀이 맡아서 같이 진행하기로 했다.

미술과 소품을 같이 하는 팀이 있는데 한재영이 그 팀을 섭외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상팀도 섭외가 끝난 상태였다.

특이한 사항은 등장인물들 사이에 몸싸움하는 장면이 몇 개 있어서 연기자들끼리 합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합을 맞춰줄 액션 스태프도 섭외했다.

지금까지 구성된 주요 스태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감독-서태화

프로듀서-한재영

연출부-이우섭, 김현석

촬영감독-이한철

개퍼-정민석

사운드-박지형

미술. 소품-전윤석

분장-송윤주

의상-하유정.

액션-강진호.

장소 헌팅은 80% 이상이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태화는 이한철과 함께 헌팅 된 장소를 돌아봤고 이한철이 직접 헌팅 장소에서 테스트 촬영까지 진행했다.

“한철이 형 어때요?”

태화와 이한철은 얼마 전에 호칭 정리를 했다. 이한철은 태화에게 자신을 선배라고 부르지 말고 형으로 부르라고 말했다. 단 실제 촬영장에서는 서로의 직함을 부르기로 정했다.

태화로선 이한철의 제안이 반가웠고 바로 호칭을 선배에서 형으로 바꿔 불렀다.

“헌팅 잘했다. 그림도 잘 나오고.”

“우섭이 하고 현석이가 고생했죠.”

이한철이 이우섭과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 수고 많았어.”

이우섭과 김현석은 대답 대신 활짝 웃었다. 이우섭과 김현석 두 사람은 이한철이 실력자라는 걸 그동안 알게 된 정보로 알고 있었다. 이런 실력자에게 칭찬을 들으니 두 사람 모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장소 헌팅도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오디션이었다. 그리고 오디션을 보려면 장소가 필요했다.

태화는 지금 오디션 장소를 섭외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태화는 목적지로 보이는 건물 앞에 섰다.

‘독립영화재단’

#.

‘독립영화재단’은 독립영화와 관련한 여러 사업을 한다. 그중 영화 워크숍 교육도 한다. 그래서 ‘독립영화재단’엔 강의실로 쓰는 공간이 몇 개 있다. 그 공간을 빌리면 오디션 장소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혹시라도 영화 제작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라.”

태화는 석무열이 지난번에 했었던 이 말을 잊지 않고 있었고 바로 그에게 연락했다. 석무열도 자신이 한 말이 있으니 태화의 부탁을 거절할 순 없었다.

태화는 석무열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어서 오게나. 그리고 난 이사님이라는 소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여기 직원이야 그렇게 부르지만.”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나한텐 그게 친근하고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선생님.”

“촬영 준비는 잘 돼가는 모양이지. 오디션 장소를 섭외하러 온 거 보면?”

“네. 현재까진 큰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스태프 구성도 끝났고요.”

“정말 의외네. 난 꽤 고전할 줄 알았는데.”

“좋은 분들이 많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

“선생님. 혹시 제가 고전할 걸 기대한 거 아닙니까?”

태화의 질문에 석무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조금은…….”

“너무 솔직하신 거 아닙니까? 보통은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숨길 텐데요?”

“난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왜 실망했나?”

태화가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선생님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해서 그렇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칭찬했다면 오히려 당황했을 겁니다.”

“크크. 역시 자네는 보통내기가 아니야.”

여기까지가 서론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근데. 선생님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서 오디션 보는 거 말인가?”

“네.”

“내가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석무열의 대답에 태화가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좋은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석무열은 문득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로 일했던 그때 그 시절.

자신이 처음으로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방금 태화처럼 좋아했었다.

‘그때 참 가슴이 벅찼었지……. 근데 이런 감정이 드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그동안 석무열에게 이런 감정이 들게 했던 사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독립영화재단’ 영화 제작 워크숍을 수강하는 학생들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끼곤 했었다. 영화 제작을 처음 하는 수강생들은 영화 초보 석무열의 젊은 시절과 겹쳐 보였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석무열은 이런 감정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감동적인 것도 일상이 되어버리면 그 감동도 무뎌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태화는 석무열이 잃어버렸던 그 감정을 다시 깨우고 있었다. 그만큼 석무열에게 태화는 남다르게 다가왔다.

“강의실을 쓰면 될 걸세. 그리고 평일은 안 돼. 평일엔 교육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화는 잠시 석무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나?”

“제가 장례식장에 서 봤던 그 사람과 정말 같은 사람 맞습니까?”

“왜 헷갈리나?”

“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석무열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땐 뭐 내가 술도 좀 마시고, 감정도 좀 욱한 상태였어.”

“…….”

“이젠 자네도 좀 잊었으면 좋겠네만.”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태화의 부탁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리고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만 하는 게 아니었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시나리오 전체 리딩을 해야 될 거 같아서요.”

태화의 부탁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일정을 소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기도 했다.

시나리오의 전체 리딩을 위해서 다른 장소를 섭외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소 섭외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보다 차라리 촬영 준비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

석무열은 태화의 청을 듣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 부탁 들어주지.”

“고맙습니다.”

태화는 의의로 쉽게 석무열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성급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자네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하네.”

“네?”

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저한테 부탁할 게 있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게나.”

“…….”

“정 없으면 나중에 사무실 청소라도 시키려고.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제안인 거 같은데?”

“네. 그렇게 하죠. 어쨌든 공간을 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태화가 석무열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석무열이 태화를 불러세웠다. 석무열의 이런 행동은 이성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냥 본능이었다.

“서태화 씨.”

“네.”

“방금 난 자네에 관한 기대를 조금 해보기로 했네.”

“네? 그게 무슨…….”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네.”

“그 기대 왠지 부담되는데요?”

“부담가지라고 한 말이네. 뭔가 부담을 느껴야 더 열심히 할 거 아닌가? 게다가 내가 이렇게 자네의 부탁을 두 개나 들어주는데……. 안 그런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여기 나중에 다시 와서 청소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태화는 석무열과의 대화를 마치고 ‘독립영화재단’을 나왔다.

[영감님. 석무열이라는 사람.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욱할 때가 있지만 근본은 선한 녀석일세. 자네 무열이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구먼.]

[그런 거 같습니다. 솔직히 첫인상이 너무 안 좋았잖아요.]

[자네가 무열이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듯 무열이도 마찬가지네.]

[저에 관한 평가가 바뀌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무열이가 자네에 관해 관심이 생긴 건 분명하네.]

[그건 맞는 것 같습니다.]

[무열이가 자네 부탁을 하나 더 들어주는 조건으로 자신도 뭔가를 제안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게 관심의 증거네. 무열이는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까지 하지 않네. 그랬다면 아예 자네의 마지막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을 거네.]

[저에게 기대한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네. 무열이는 아무에게나 기대한다는 말을 하지 않네. 어쨌든 자넨 무열이에게 자네의 존재감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네.]

#.

다음 날.

태화는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과 평상에서 오전 회의를 했다. 태화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오디션 장소 섭외했다.”

태화의 말에 이우섭이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그래. 어제 섭외 완료했다.”

“와. 대단합니다. 원 샷 원 킬! 그냥 한 방에 끝내시네요. 그런데 거기가 어딥니까?”

“독립영화재단.”

“독립영화재단이요?”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나 거기 알아.”

“어떻게?”

“거기서 하는 영화 워크숍 출신들이 현장에 꽤 있어.”

“그래?”

“응. 거기 영화 워크숍 나름 오래됐을 거야. 근데 거길 어떻게 섭외한 거야?”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독립영화재단 이사야.”

“그래?”

“나한테 그러더라고.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야. 그 사람이 너 잘 봤구나.”

“그런 셈이지.”

태화는 시선을 다시 이우섭에게 돌렸다.

“독립영화재단에 강의실이 몇 개 있어. 오디션은 거기서 진행될 거야. 평일은 안되고 일요일에 진행하게 될 거야.”

“네.”

“나중에 오디션 보러 올 연기자한테 그곳 위치 알려주면 돼. 인터넷 검색하면 나오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오디션은 이번 주에 잡을까요?”

“이번 주는 좀 빠듯해. 그리고 내가 일이 있어. 다음 주로 잡아.”

“그렇게 할게요.”

“오디션에 지원한 연기자들 정리는 했니?”

“네. 정리는 거의 다 된 상태입니다.”

“좋았어. 그럼 정리 마저 하고 내 메일로 좀 보내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오디션 공고는 끝낼까요?”

“지원하는 사람 이제 별로 없지?”

“네. 거의 없습니다.”

“그럼. 공고 끝내.”

“네.”

잠시 후.

이우섭과 김현석은 오늘 장소 헌팅을 하러 옥탑을 나갔다. 태화와 한재영은 오디션을 지원한 연기자 파일을 살펴보고 있었다.

“태화야.”

“왜?”

“다른 건 문제가 없는데 음악은 어떻게 할 거야?”

“갑자기 왜 음악이야?”

“다른 건이 다 돼 가는데 음악은 해결 방법이 없다.”

“나도 그걸로 고민하긴 했는데. 일단 음악 감독은 나중에 섭외하자.”

영화 음악은 다른 스태프와 달리 저작권을 비롯한 복잡한 문제가 있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어느 정도 편집이 끝나면 하자 이거지?”

“응. 일단은 촬영에 집중하자. 작품이 괜찮게 나오면 누군가 붙지 않겠어?”

“그래. 그렇게 하자.”

“오. 웬일로 쉽게 넘어가?”

“나는 네가 요즘 기적 같은 일을 많이 해내서 그냥 믿게 된다. 뭐 어떻게 되겠지. 안 그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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