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2화
정민석은 태화가 방금 지은 미소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너. 정말 해볼 생각인 거구나.”
“그럼요. 열심히 준비했는데요.”
정민석은 태화의 대답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정민석은 태화의 대답에서 단지 치기 어린 행동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태화 저 녀석을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오늘 같은 저런 표정은 처음이다. 저건 자신감의 표현이다. 오만하지 않은…….’
정민석은 태화의 데뷔작이 장편이라는 것에 관해서 더는 의문을 품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좀 더 현실적인 질문으로 방향을 잡았다.
“근데 예산은 있고?”
“저예산 영화예요. 좀 빡빡하긴 하지만.”
“그래. 저예산 영화면 가능하지.”
“…….”
“근데 이거 잠깐 읽어봐도 되니?”
“네. 그래도 돼요.”
“하하. 태화 네가 장편 시나리오를 썼다니.”
정민석은 태화가 쓴 시나리오를 읽어갔다. 정민석은 10분 정도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다시 시선을 태화에게 돌렸다.
정민석의 표정엔 재미와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태화야. 이거 재밌다. 몰입도도 있고.”
“그렇게 읽었다니 다행이네요.”
“근데 깜짝 놀랐다. 네가 이렇게 시나리오를 잘 쓸 줄은 몰랐어.”
“그렇게 봐주니 고마워요. 근데, 형.”
“왜?”
“사실 저 오늘 형한테 제안하러 왔어요.”
“제안?”
“이 작품에 개퍼로 참여해 줘요.”
“뭐. 개퍼? 태화야. 나 이제…….”
“형. 잠깐만.”
“…….”
“이 작품 촬영감독이 누군지 알아요?”
“누군데?”
“아마 들으면 놀랄 거예요.”
“놀란다고?”
“네. 바로 한철 선배예요.”
태화의 예상대로 정민석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철이 형? 그게 정말이야? 너하고 한철이 형은 예전에…….”
정민석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정민석도 태화와 이한철 사이의 일에 관해선 몰랐으니 말이다.
“민석이 형. 저하고 한철 선배. 서로에게 악감정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악감정이 없다니?”
“말 그대로입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 거야?”
“네.”
태화는 정민석에게 자신과 이한철과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정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어쨌든 너도 참 대단하다. 그래도 한철이 형은 쉽지 않았을 텐데.”
“알아요. 한철 선배가 깐깐한 면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내 말이.”
태화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뭐.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일이 잘 풀렸어요.”
“그러게.”
“그럼. 지금까지 작업 진행 상황 설명할게요.”
“그래.”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정민석은 태화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태화 녀석. 그새 많이 변했구나. 이렇게까지 일을 진행하다니. 그것도 영화 작업이 처음인 녀석이.’
태화가 말을 이어갔다.
“형이 개퍼로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저예요.”
“네가?”
“네. 형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철 선배도 그랬어요. 형이 개퍼로 참여한다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다시 조명 일 했으면 좋겠다고.”
“태화야. 근데 왜 나냐? 알겠지만 나는…….”
“알아요.”
“그러니까. 내 말이.”
“형. 제 말 끝까지 듣고 결정해요.”
정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태화가 잠시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전 이 작품이 형한테 뭔가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계기?”
“네. 전에 형 봤을 때 뭔가 마음속에 미련이 남아 있는 거 같았어요.”
“미련?”
“네. 당연히 그 미련은 당연히 영화에 관한 미련일 거고요.”
“…….”
“전 그때 느꼈어요.”
“뭘?”
“제발 자기 손을 잡아달라고……. 하지만 그때 전 형한테 손을 내밀 수 없었어요.”
“…….”
“그때 전 손을 내밀 자격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능력도 없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저한테 기회가 생겼어요. 저는 이 기회가 나 혼자만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민석은 태화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지만 감독만의 작품도 아니다.
영화 한 작품은 수많은 스태프와 연기자가 참여하는 협업의 결과물이다.
스태프와 연기자는 배움을 위해 혹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영화제작에 참여한다. 그 말은 영화제작이 감독에게만 기회를 제공해주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는 형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요.”
“태화. 너…….”
정민석은 태화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정민석의 가슴속에 무언가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정민석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정민석의 흐느낌은 그동안 가슴에 맺혀 있었던 응어리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부상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그동안 정민석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정민석의 흐느끼는 모습은 언 듯 당당한 체격과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태화는 정민석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더 짠해졌다.
[영감님. 민석이 형은 당당한 체구만큼 항상 자신감이 넘쳐 있었어요. 그런 사람이 지금 흐느끼고 있어요.]
[태화 군. 정민석의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아프구먼. 어쨌든 정민석은 저 눈물로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될 걸세.]
[정말 그렇게 될까요?]
[그럴 걸세. 트라우마라는 게 오랜 시간 치유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엔 순식간에 치유가 되기도 하지.]
[지금 민석이 형의 경우는 후자가 되겠군요.]
[그렇네.]
박도봉 감독은 내적 고통으로 힘들었던 사람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카타르시스.
정민석은 지금 눈물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었다.
태화는 테이블에 있는 냅킨을 정민석에게 건넸다. 정민석은 그 냅킨을 건네받아서 눈물을 닦았다.
[이제 자네는 정민석에게 손을 내밀게.]
[제 손을 잡아 줄까요?]
[걱정하지 말게. 정민석은 분명 자네가 내민 손을 잡게 될 걸세. 나를 믿어보게나.]
[네.]
태화는 정민석의 감정이 어느 정도 추슬러지자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민석이 형. 제 손 잡아줘요.”
정민석은 태화가 내민 손이 마치 우물에 빠진 자신을 구원해 주는 손길이었다. 그리고 이 손길은 자신이 갈망했던 바로 그 손길이었다. 정민석은 망설일 필요도, 그리고 이유도 없었다.
정민석은 태화가 내민 손을 잡았다.
“태화야. 고맙다.”
“저도 고마워요.”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네.”
잠시 후 정민석은 세수하고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정민석의 얼굴은 깔끔한 상태였다. 그리고 표정도 한결 편안해 보였다.
“형. 이제 괜찮아요?”
“응. 이제 괜찮아.”
“그럼. 일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할게요.”
“그래.”
“우선, 형 몸부터 확인할게요. 다친 곳은 어때요?”
“수술은 잘 됐어. 가끔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괜찮겠어요?”
“응. 아직 젊어서 운동 꾸준히 하면 나아진대. 그동안 운동을 소홀히 했었는데 이제 열심히 해야지.”
“알겠어요. 꼭 몸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알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
“좋아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올게요. 시나리오 보면 알겠지만, 조명이 필요한 장면은 얼마 안 돼요.”
정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작비 때문에 그랬겠지.”
“네. 그래서 따로 조명팀을 구성하기보다는 형을 개퍼로 영입하려고 했던 거고요.”
“이해한다.”
“그리고 조명이 필요한 촬영은 뒤로 미룰 거예요. 형이 스케줄이 괜찮은 날짜로 맞출게요.”
“오케이.”
태화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서 정민석에게 건넸다.
“이거 계약서입니다.”
“계약서? 굳이 이거 안 써도.”
“아니에요. 형도 이 작품에 스태프가 된 거니까.”
정민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다.”
정민석은 계약서를 읽어가다 마지막에 가서 다른 사람들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이 N분의 1 조항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냐?”
“이번 작품은 그렇게 하려고요. 형도 이 작품에 참여하는 순간 가치에 투자하는 겁니다.”
“가치에 투자?”
“네.”
“태화. 너 참 멋진 생각을 했구나.”
정민석은 별다른 고민 없이 계약서에 바로 사인했다. 그런 후 태화는 정민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앞으로 잘해봐요.”
정민석이 태화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래. 그렇게 하자.”
“촬영 일정은 잡히는 대로 알려드릴게요.”
“알았다.”
“그리고 한철 선배 말고 형이 아는 사람들 꽤 있을 거예요.”
“아는 사람?”
“네. 재영이도 이 작품에 프로듀서로 참여해요.”
“정말?”
“네. 그리고 윤주 누나도 참여하고요.”
“윤주면 송윤주?”
정민석은 송윤주보다 한 학번 위다.
“네. 윤주 누나하고 한철 선배하고 사귀거든요.”
“정말? 하하. 다들 보고 싶네.”
“금방 보게 될 거예요. 그리고 한철 선배가 전화 달라고 했어요. 지금 할까요?”
“그렇게 해줄 수 있어?”
“그럼요.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태화는 바로 이한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철 선배. 태화입니다.”
-어. 그래 태화야. 어떻게 됐니?
“민석이 형 지금 옆에 있어요. 바꿔줄게요.”
-어. 그래.
태화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정민석에게 건넸다.
“형. 저 민석이에요.”
-그래. 민석아. 잘 지냈니?
“네. 형 근데 태화랑 같이 작품 한다면서요?”
-응. 그렇게 됐어.
“형. 나도 앞으로 거기에 낄 겁니다.”
-뭐. 정말?
“네. 방금 태화가 가져온 계약서에 사인했어요.”
-그래? 잘됐다. 우리 한번 잘해보자.
“그래요. 형.”
정민석은 통화를 하고 나서 태화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한철 선배. 저 태화예요.”
-고생했다. 기대는 했지만 민석이가 정말 참여할 줄이야.
“저도 기뻐요.”
-서태화. 넌 괜찮은 녀석이다. 이거 투자한 보람이 있는걸.
“선배. 앞으로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야죠. 민석이 형도 합류했는데.”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태화는 통화를 종료하고 나서 정민석에게 말했다.
“형. 그럼 전 가 볼게요.”
“태화야. 같이 나가자.”
태화와 정민석은 함께 카페 밖으로 나왔다. 정민석은 바로 학원 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노량진역까지 태화를 배웅했다.
태화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형. 건강관리 잘하세요.”
“그래. 그동안 운동해서 내 몸 건강하게 해놓고 있을게.”
“알았어요. 그럼. 전 가 볼게요.”
“그래. 또 보자.”
#.
다음 날 태화가 정민석이 섭외되었다고 말하자 한재영은 즐거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태화야. 그게 정말이냐?”
“그래. 민석이 형 이 작품에 참여할 거야.”
“나도 좋긴 한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한재영의 얼굴엔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태화가 한재영의 표정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그런 게 뭐냐고? 그 무슨 상식적인 뭐 그런 거냐?”
“아니.”
“그럼 뭐냐고? 나 진짜 궁금해서 미치겠다.”
“알려줘?”
“그래.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태화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마음이야.”
“뭐?”
“난 그냥 민석이 형한테 내 진심을 말했을 뿐이야. 같이 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게 통했을 뿐이야.”
“정말 그게 다야?”
“정말이야. 민석이 형 그동안 다친 것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것 같더라.”
“그랬었구나. 하긴 진심만 한 게 없지.”
“그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