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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51화 (5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1화

“재영아. 도착할 때 되지 않았냐?”

“응.”

한재영이 대답하자마자 옥탑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화야. 도착했나 보다.”

“그런가 보네.”

몇 초 후 계단에 다 오른 이한철과 송윤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태화가 평상에서 일어나 송윤주와 이한철에게 다가갔다. 송윤주는 태화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태화야!”

“누나!”

“이거 받아.”

송윤주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종이백을 태화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비타민제야. 다들 피곤할 텐데 같이 먹어.”

“고마워요.”

태화가 시선을 이한철에게 돌렸다.

“선배 제 제안 받아들여줘서 고마워요.”

“나도 네가 그런 제안을 해줘서 고맙다.”

“무슨 별말씀을요.”

“아냐. 솔직히 나도 다른 작품 준비하고 있다가 그 작품이 엎어졌었거든. 어쨌든 네 덕에 나도 장편영화 촬영감독으로 입봉하는 거지.”

“근데 너무 비싸게 구신 거 아닙니까?”

이한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싸게 굴었다기보단 신중했던 거다.”

이한철의 대답에 태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선배. 농담이었습니다.”

태화가 송윤주와 이한철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일단 저쪽 평상으로 가요.”

세 사람이 평상으로 향하자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고개를 숙여 이한철에 송윤주에게 인사했다. 이한철과 송윤주는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송윤주가 한재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재영아. 너 어떻게 된 거야? 어떡하다 옥탑에 온 거니?”

“전에 살았던 곳 집주인이 보증금을 너무 올려서 그냥 이곳으로 옮겼어요.”

“짜증이 나서 그랬다?”

“네. 근데 나쁘지 않잖아요. 전망도 좋고.”

“재영이 너 홧김에 지르는 성격 아니지 않았니?”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근데 이번에는 질러야겠더라고요.”

“요즘 내가 너하고 태화 때문에 많이 놀란다.”

한재영은 송윤주와 인사를 건네고 나서 이한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 오랜만입니다.”

“재영이 네 소식 듣긴 했다. 신창우 감독님 작품에 참여했었다며?”

“네.”

“힘들지 않았어?”

“신 감독님이 대사에 너무 집착하셔서 그것 때문에 좀 힘들긴 했죠. 가끔 그것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 안 좋아지기도 하고.”

“어쩌겠냐? 그게 스타일인데.”

“그렇죠. 뭐.”

이한철과 송윤주는 이우섭과 김현석과도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평상에 앉았다.

태화는 시선을 이한철이 어깨에 멘 가방으로 옮겼다.

“선배. 이 가방 뭡니까? 혹시 카메라입니까?”

이한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내가 가지고 있는 DSLR 카메라다.”

영화 현장에선 고가의 영화 카메라로 촬영하지만 저예산 영화에선 DSLR 카메라의 동영상 기능으로 촬영해도 좋은 화질을 얻을 수 있다.

“마침 잘됐네요. 그렇지 않아도 선배한테 카메라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 그럴 줄 알았다. 저예산 영화 예산 뻔하잖아.”

“어쨌든 고맙습니다.”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나도 투자하는 거니까.”

“그럼 투자라고 치죠.”

“나한테 편한 점도 있어.”

“편한 점이요?”

“그래. 내가 쓰던 거라 딱히 적응할 필요도 없잖아.”

“그런 점이 있었네요.”

이한철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카메라를 보고 한재영이 살짝 놀랐다.

“와. 그거 상급 기종 아니에요?”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래도 촬영감독인데 아무거나 쓸 수는 없잖아.”

이한철은 고개를 돌려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재영아.”

“네. 선배.”

“당분간 카메라 여기에 맡겨둘게. 그래도 되지?”

“네. 얼마든지요. 앞으로 헌팅도 다녀야 하는데 그때마다 카메라 들고 다니기 귀찮잖아요.”

촬영감독은 장소 헌팅이 어느 정도 결정되면 실제 그곳에 가서 테스트 촬영을 진행한다. 그래서 실제 촬영에 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한철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조명은 어떻게 할 거야?”

박도봉 감독의 예상처럼 이한철은 태화에게 조명에 관해서 물었다.

“그래서 저도 조명이 들어가는 실내 장면은 최소화하긴 했는데…….”

“그래도 실내 장면이 없진 않잖아. 게다가 밤 장면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제 생각엔 조명팀을 따로 가기보다는 한철 선배가 개퍼를 데리고 가는 거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네 말은 DP로 가자는 거지?”

“네.”

태화의 제안을 들은 이한철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은 좋은데 쉽지 않을 거야.”

태화와 이한철의 대화를 듣던 한재영이 발언했다.

“태화야. 나도 한철 선배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나라에선 촬영팀과 조명팀은 자존심 같은 게 있거든. 특히 조명팀은 자존심이 더 강하고.”

“…….”

“영화는 빛의 예술이라고도 하니까.”

“일단 쉽지 않겠지만 한번 해봐야죠.”

이한철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 할 사람 있는 거냐?”

“네.”

“누군데?”

“민석이 형이요.”

이한철은 순간 깜짝 놀랐다.

“뭐? 정민석?”

“네. 민석이 형이면 나쁘지 않잖아요.”

“네 말대로 나쁘진 않은데……. 태화 너 소식 못 들었어? 민석이 이제…….”

“알아요. 촬영 때 다쳤던 거 때문에 지금은 조명 일 안 한다는 거.”

한재영이 바로 태화에게 발언했다.

“그러니까. 알면서 왜 그러냐고.”

“사실 나 민석이 형 얼마 전에 만났어.”

“만나? 어디서?”

“노량진에서.”

“뭐?”

“공무원 준비한다더라.”

태화의 대답을 들은 한재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야.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학원 다니는 사람이 네 제안을 받는다고?”

“확실하지는 않아. 내가 지난번에 만났을 때 다시는 영화 안 한다고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태화야. 좀 평범하게 가자.”

“그런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아니겠냐?”

한재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네가 무슨 외인구단 감독이냐?”

“그래도 한번 설득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한철 선배는 어때요?”

“나도 민석이라면 나쁘지 않아.”

한재영이 이한철에게 다소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선배까지 왜 그래요? 말려야죠.”

“재영아. 나도 민석이가 이 작품에 참여하고 다시 조명 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이 작품에 참여했잖아.”

“선배.”

태화가 이한철에게 말했다.

“한철 선배. 민석이 형한테 따로 연락하지 말아요.”

태화의 말은 자신이 정민석을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는 의미였다.

“그래. 알았다.”

몇 시간 후.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이우섭과 김현석은 퇴근했고 이한철과 송윤주는 돌아갔다. 그리고 옥탑에는 태화와 한재영만이 남았다.

“재영아. 내가 민석이 형 섭외하는 거. 아직도 불만이냐?”

“불만이기보다는 촬영 들어가기 전에 너무 힘 빼는 게 아닌가 싶어서.”

“네 마음 이해한다. 그래도 네가 있으니까 일이 진행되는 거 아니냐.”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민석이 형이야?”

“내 느낌이지만 민석이 형은 정말 영화판을 떠나고 싶어 하는 거 같지는 않았어.”

“그럼. 트라우마 같은 건가?”

“내가 볼 땐 그런 거 같았어.”

“확실해?”

“응.”

“네 감이 틀릴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한번 제안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본다.”

“나도 민석이 형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철이 형한테는 그렇게 반대하더니.”

“그건 경우가 좀 다르지. 민석이 형은 너한테 잘해줬잖아.”

태화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 작품 만드는 거. 내가 만든 기회긴 하지만 민석이 형도 이 작품에 참여해서 뭔가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어.”

“계기라.”

“그래. 정말 조명 일 하는 걸 관둘지 아니면 다시 도전할지. 마음속에 계속 미련이 남아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말 듣고 보니 이 작품은 그냥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아닌 것 같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어. 처음엔 어떻게든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아까 네 말대로 외인구단 분위기가 돼버렸어.”

“네가 계약서에 N분의 1 조항 넣을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렇지 뭐.”

“그래. 네 말대로 하자. 민석이 형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 어쨌든 시간 끌진 않을 거야. 민석이 형이 정말로 영화판을 떠나고 싶다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고. 나도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들이고 싶진 않아.”

#.

며칠 후.

태화는 오랜만에 노량진역에서 내렸다. 정민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민석이 형. 저 태화예요.”

-오. 그래 태화야. 잘 지내니?

“네. 형 좀 만나고 싶은데.”

-나야. 너 만나면 좋지.

“혹시 내일 시간 돼요?”

-응. 시간 돼.

“몇 시쯤 시간이 돼요?”

-내일 오후 시간이 비어.

“그럼 내일 3시에 볼까요?”

-그래. 그때 보자.

정민석은 태화의 전화를 반겼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수험생활이란 게 외롭고 힘들기 때문이다.

[태화 군. 정민석을 설득할 방법은 있는 건가?]

[영감님은 무슨 방법이 있는 겁니까?]

[정민석 같은 경우는 어떤 방법이란 게 없네. 괜히 어설프게 했다간 튕겨 나갈 수 있네. 이럴 땐 그냥 자네의 마음을 전하는 게 최선이네.]

[저도 영감님 생각과 같아요.]

[진심을 전한다는 것. 그거만큼 좋은 방법은 없네.]

태화는 길을 건너기 위해서 횡단보도에 잠깐 멈춰 섰다. 태화는 녹색 신호로 바뀌자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태화의 시야에 반대편 신호등 있는 곳에 정민석이 서 있는 게 보였다. 태화와 정민석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상대에게 흔들어 보였다. 태화가 횡단보도를 다 건너자 정민석이 활짝 웃으며 태화를 맞이했다.

“태화야. 반갑다. 근데 너 얼굴 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좀 바빠서요.”

“바빠?”

“네. 근데 형은 어떻게 지냈어요?”

정민석은 애써 웃음을 유지했지만 어색함이 묻어 있었다.

“뭐. 그냥 지내지. 어디 들어가자.”

“네.”

#.

태화와 정민석은 카페로 들어갔다. 이 카페는 정민석이 안내했는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조용했다.

“형. 여기 괜찮네요.”

“응. 가끔 오는데 조용하고 좋더라.”

두 사람은 각자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빈자리에 앉았다. 정민석이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화 너 뭘 하기에 얼굴에 살이 빠질 정도로 바쁘냐?”

“저 요즘 영화 준비해요.”

“뭐 영화?”

“네.”

“너 그럼. 오디션 된 거야? 잘됐다.”

“형. 저 이제 연기 안 해요.”

정민석은 순간 당황했다.

“뭐? 안 해?”

“네.”

“그럼. 영화 준비한다는 건 뭐야?”

태화는 자신의 가방에서 미리 인쇄해 놓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꺼냈다.

“형. 이거 내가 쓴 시나리오예요.”

태화는 시나리오를 정민석에게 건넸고 정민석은 그걸 바로 받았다.

“네가 쓴 시나리오?”

“네. 이번에 그 시나리오로 작품 준비해요. 연출은 제가 하고요.”

정민석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출? 정말이야?”

“네.”

“근데. 이거 장편인데?”

“기왕하는 거 한번 질러봤어요.”

“질러?”

“네.”

태화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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