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9화
“내일까지 한철 선배한테서 연락이 안 오면 모레 내가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 거야.”
태화의 말투는 결연했다.
“정말 네가 직접 전화한다고?”
“변수를 없애야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아. 너도 그 일정에 맞춰서 일 진행해. 한철 선배 대신할 사람 구하는 거.”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야. 시원시원해서 좋다. 난 네가 오히려 시간을 질질 끌 거로 생각했는데.”
“일정이 있는데 그럴 순 없잖아. 어쨌든 촬영은 제때 들어가야지.”
“그렇지. 네 말대로 제때 들어가야지. 영화 촬영은 시간 끌면 안 돼. 그러다 엎어진다고.”
영화도 찍을 수 있을 때 찍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괜히 시간이 늘어지다 보면 그만큼 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난 내가 할 수 있는 건 했어. 그래도 바라는 결과가 안 나온다면 어쩔 수 없잖아. 빨리 대안을 찾아서 일 진행해야지.”
“오케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나도 좀 편하다.”
“그나저나 스태프 섭외는 어떻게 되어가냐?”
“그건 걱정하지 마.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까.”
“그래. 믿는다.”
“이따가 오후에 사운드 팀 올 거야.”
“정말?”
“응. 왜 놀랐냐?”
“당연하지. 사운드가 촬영만큼 중요하잖아.”
영화에서 사운드 스태프는 배우의 동시 녹음을 비롯한 폴리(발소리처럼 인위적으로 효과음을 만들어내는 작업) 등을 담당한다.
영화에서 오디오는 사운드 스태프가 전문 장비를 사용해서 카메라와 별도로 녹음된다. 그래서 실제 촬영 현장에선 항상 카메라와 함께 동기화돼서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사운드 스태프는 현장에서 촬영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팀인데?”
“필름 사운드라는 업체에 소속된 팀이야.”
“필름 사운드?”
“응. 필름 사운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 사운드 업체 정할 때 마지막까지 남은 두 개 업체 중 하나였어. 그때 여기가 아니고 다른 곳이 선정됐었는데 내가 좀 눈여겨봤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넌 연출보단 제작일이 체질이구나.”
“나도 요즘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실력은 있겠구나. 최종까지 남은 거 보면.”
“응. 메이저 업체는 아닌데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 업체야.”
“근데 계약 조건 얘기는 했냐?”
“당연하지. 이따가 오는 것도 계약서 사인하러 오는 거야.”
“근데 어떤 사람들이야?”
“너도 사람 만나려면 어느 정도 정보는 알아야겠지.”
#.
오후 시간.
태화와 한재영은 옥탑방 안에서 각자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태화는 전에 만들어두었던 콘티를 다시 한번 점검했고 한재영은 스태프 섭외 관련 리스트를 점검했다.
태화는 콘티를 다시 점검하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감님. 문제가 뭘까요?]
[자네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건 당연하네.]
[당연하다고요?]
[콘티를 만들었던 당시에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지금 다시 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네. 반대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게 중요하게 다가올 수도 있고.]
[하. 이거 결정하기가 쉽지 않네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중요한 건 그 씬을 통해서 자네가 보여주고 싶은 게 뭔지 명확하게 하는 거네. 일단 기술적으로 그 씬의 쇼트를 어떻게 나누는 게 먼저가 아니라는 소릴세.]
[먼저 씬의 전반적인 콘셉트를 잡으라는 말이군요.]
[자네 말도 일부 맞기는 하지만, 정답은 아니네.]
[그럼 뭡니까?]
[정답은 해당 씬의 감정의 흐름이네.]
[감정의 흐름이요?]
[그렇네. 영화의 쇼트엔 등장인물의 감정이 담기게 마련이네. 그리고 쇼트와 쇼트의 연결은 감정의 흐름과 연결되어야 하네. 그 연결이 매끄러우면 관객도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따라가게 되어 있네.]
[감정의 흐름이라. 일단 그걸 중점적으로 다시 봐야겠어요.]
그때였다. 옥탑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무도 안 계세요?”
순간 태화와 한재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태화야. 왔나 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가자.”
태화와 한재영이 옥탑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기른 남자와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장발의 남자가 한재영을 보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재영 피디님.”
“안녕하세요. 박 팀장님.”
박 팀장이 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갑습니다. 박지형입니다.”
“안녕하세요. 서태화입니다.”
“아. 감독님이시구나. 그렇죠?”
“그렇습니다.”
“이거 감독님이 너무 잘나신 거 아닌가요? 현장에서 배우들 기가 죽겠습니다.”
“박 팀장님도 멋있습니다. 로커 같으세요.”
“근데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시죠?”
박지형이 같이 온 남자를 향해 말했다.
“네 소개해라.”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네. 전 조용우라고 합니다. 박 팀장님 조수입니다.”
태화가 조용우를 향해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태화와 박지형, 그리고 조용우는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한재영은 옥탑방으로 들어가 음료수를 꺼내왔다.
“대접할 게 별로 없습니다.”
한재영에게 음료를 건네받은 박지형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희야 어쩔 수 없이 여기를 임시 사무실로 쓰지만, 손님을 맞이하기엔 좀 누추합니다. 여기 말고 카페에서 만나도 되는데.”
“아뇨. 직접 이렇게 와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전망도 좋고 괜찮은데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습니다.”
태화가 박지형에게 말했다.
“박 팀장님은 저예산 영화에 스태프로 종종 참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동안 기회가 있어서 몇 번 작업했었습니다. 대표님도 현장 경험을 쌓는다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 장려하기도 하고요.”
“그러셨군요.”
“무엇보다 저예산 영화는 사람 냄새가 나요. 그래서 돈은 안 돼도 참여하곤 합니다.”
“저희야 박 팀장님 같은 분이 스태프로 합류해 주시면 좋죠.”
“시나리오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인상 깊었어요.”
“어떤 점이 그랬습니까?”
“무엇보다 스토리가 재미를 주는 데 충분했습니다. 작가주의 경향이 아닌 것도 좋았고요.”
“고맙습니다. 그게 이 작품의 장점이죠.”
박지형은 말을 하느라 목이 탔는지 음료수를 한잔 마시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
“전에 제가 시나리오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저예산 영화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어요.”
“정말입니까?”
“네. 작품에 참여하다 보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었거든요.”
“이해합니다. 때론 감독의 머릿속엔 있지만, 시나리오엔 미처 그 내용이 담기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난해한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전 촬영 현장에서 졸고 말았습니다.”
박지형의 말에 사람들은 순간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웃음이 잦아지자 박지형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감독님. 계약 조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계약 조건. 감독님이 직접 만든 거라면서요?”
“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감독님이 궁금해지더군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이렇게 직접 보니 그냥 느낌이 오네요.”
“느낌이요?”
“그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요.”
“과찬이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예산 영화감독은 보통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그동안 도와주자는 마음에 작품에 참여했고요.”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 작품도 저예산 영화입니다.”
“그런데 전 계약 조건을 듣는 순간 단순히 도와준다는 생각 버렸어요. 동정심보다 그냥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버렸어요.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후회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박지형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네요. 그렇게 될 거 같네요.”
태화와 박지형의 대화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한재영이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자.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죠?”
한재영은 계약서 두 장을 각각 박지형과 조용우에게 건넸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통 계약이 아니라 개별 계약입니다.”
통 계약은 한 부서의 대표가 전체 부서를 대리해서 하는 계약방식이고 개별 계약은 스태프별로 하는 계약이다. 전자의 경우는 계약한 사람이 부서 전체 임금을 받아서 자신이 다시 스태프에게 임금을 나눠주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계약한 사람이 돈을 독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요즘은 스태프별로 개별 계약을 한다.
박지형과 조용우는 각각 자신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태화는 박지형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박 팀장님 이 작품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앞으로 잘해보죠.”
태화는 박지형과 악수를 끝내고서 조용우에게 손을 다시 내밀었다.
“조용우 님. 이 작품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한 박지형과 조용우는 다음 일정 때문에 서둘러 옥탑을 떠났다.
“재영아. 수고했다.”
“뭐. 이 정도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널 프로듀서로 영입한 거 말이야.”
“그걸 이제 알았냐? 나도 요즘 느끼고 있다. 연출도 나름 재밌지만 내 적성은 제작이라는 걸.”
태화는 미소를 지으며 한재영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한재영. 아주 멋져.”
“태화야.”
“왜?”
“넌 이제 어떻게 영화를 잘 만들지, 그것만 고민해라.”
“그래. 고맙다.”
#.
다음 날 오전.
한재영의 옥탑방 평상에서 태화는 중간 점검을 위한 연출 제작 회의를 열었다.
“재영아. 스태프 섭외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지?”
“현재 촬영하고 분장팀만 빼고 거의 정해진 상태야.”
촬영하고 분장팀이 빠진 건 이한철과 송윤주 때문이다.
“다른 스태프는 그쪽 스케줄 봐서 미팅 잡을 거야. 다들 알다시피 어제 사운드 팀은 계약했고.”
“좋았어. 재영아.”
태화가 시선을 이우섭에게 돌렸다.
“우섭아. 장소 헌팅은 어느 정도 진행됐지?”
“네. 전체적으로 삼 분의 일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봤던 골목길은 픽스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오. 그래?”
“네. 근처에 당분간 큰 공사가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거 예정지가 있긴 한데 거긴 그 골목길하고 거리가 좀 멀어서 큰 영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제 철거될지도 모르고요.”
“좋았어. 그럼 오디션 상황은?”
“네. 태화 형 말대로 시나리오 정보는 비공개로 했는데도 역할별로 지원자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되지?”
“현재까지는 평균 2 대 1 정도는 됩니다. 앞으로 지원자는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에 선정된 게 가장 큰 이유야. 오디션 지원자들한테 긍정적 신호가 간 거지.”
“긍정적 신호요?”
“그래. 공적인 기관에서 하는 지원 사업에 선정됐다는 건 최소한 시나리오가 중간 이상은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거니까.”
“아. 그렇군요.”
“그럼.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오디션 지원자들 역할별로 정리해 줘.”
“알겠습니다.”
태화는 일의 진척 상황을 보고 받고 만족스러웠다.
“다들 고생이 많다. 조금만 더 준비하면 크랭크인(촬영 시작) 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