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8화
박도봉 감독이 몹시 궁금하단 말투로 태화에게 물었다.
[누구인가?]
[네이비색 야구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
[체격이 꽤 건장하구먼.]
[학교 때도 체격이 좋았어요.]
[음. 그럴 만하지. 아무래도 촬영부는 무거운 촬영 장비를 옮겨야 해서 힘을 좀 써야 하니까.]
태화는 이한철이 다가오자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한철도 태화의 모습을 확인하자 자신의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이한철이 태화가 있는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이한철은 키가 태화와 비슷한 데다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확실히 포스가 느껴졌다.
태화도 나름 꾸준히 운동해서 몸이 좋은 편이었지만 이한철과 달랐다. 태화의 체격이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몸매라면 이한철의 몸은 웬만한 웨이트 트레이너 저리 가라 할 몸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구릿빛 피부와 쌍꺼풀지지 않은 눈매와 각진 턱선. 여기에 살짝 기른 턱수염은 이한철을 좀 더 남성미가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태화가 정식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너도 잘 지냈냐?”
“네.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몸이 좋으십니다.”
“내가 볼 땐 너도 나쁘지 않아.”
“선배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이한철이 태화에게 손을 건넸고 태화는 이한철이 건넨 손을 맞잡았다.
“오늘 윤주는 오지 않을 거야.”
“예상했었습니다. 윤주 누나한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알았다.”
두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근데 윤주 누나가 선배랑 사귀는 이유를 알 거 같네요.”
“뭐?”
“윤주 누나는 선배처럼 남자다운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했었거든요.”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네. 선배. 음료 드시죠. 이 집 커피 맛있어요.”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네.”
잠시 후 태화와 이한철은 각자 마실 커피를 테이블에 놔둔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이한철이 먼저 입을 뗐다.
“솔직히 시나리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태화 네가 그 시나리오를 썼다는 데 많이 놀랐고.”
“재밌게 읽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놀란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네가 날 이 작품의 촬영감독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네.”
“이유를 설명해 봐. 무슨 영감처럼 떠올랐다는 그런 설명 말고.”
“저도 선배의 이름이 떠오르고 나서 왜 그랬는지 생각을 해봤어요. 내 기억을 더듬어봤고요.”
“그래서?”
“그 이유를 찾았습니다.”
“이유를 찾았다고?”
“네. 선배. 박기영 선배 졸작 촬영 마지막 날 기억하세요?”
“촬영 마지막 날?”
“네.”
#.
박기영 졸작 촬영장.
졸작의 마지막 촬영 장면이 진행 중이었다. 태화는 이날도 립싱크 연기를 하고 있었다.
태화의 연기를 보던 박기영이 큰소리로 외쳤다.
“컷! 오케이!”
박기영의 외침과 함께 스태프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터졌다.
“수고하셨습니다!”
태화는 자신의 립싱크 연기를 끝내고 나서 촬영장 한쪽 구석으로 갔다.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졌다.
태화는 자신의 손으로 우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두 손으로 막기엔 무리였다.
“흑흑.”
그런 태화에게 누군가 다가가 태화의 어깨를 짚었다.
“서태화.”
태화를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를 짚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로 이한철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
“네가 립싱크 연기를 해야 한다고 기영이한테 제안한 사람은 나다.”
“선배가…… 제안했다고요?”
태화는 말없이 이한철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그래. 넌 지금 나한테 배신감을 느끼고 있겠지. 그래도 난 내 행동에 후회하지 않는다. 어쨌든 작품은 찍어야 했으니까.”
“근데 왜 그 사실을 밝힌 겁니까? 다 끝난 마당에.”
“내가 너한테 지금 말 안 한다고 이 사실이 안 밝혀지는 건 아니야.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밝혀지겠지.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그 사실을 듣는 것보다 나한테 직접 듣는 게 낫지 않겠어?”
“정말 화가 나는군요. 농락당한 기분입니다.”
“…….”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기영 선배가 성격이 좀 더러워도 그런 결정을 내릴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는데.”
태화의 말처럼 박기영은 겉은 요란하지만 속은 콩알만 한 간을 가진 인물이었다.
“서태화. 난 네가 마음에 든다.”
“지금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겁니까?”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제안 받자마자 그만뒀을 거다.”
이한철의 말은 맞았다. 무성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닌데 어떤 연기자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마도 다른 연기자였다면 그 제안을 받자마자 차라리 관두겠다고 소리치며 나갔을 게 뻔했다.
“하지만 넌 끝까지 네가 할 일을 했다. 난 네가 그런 점에서 다른 녀석들과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
“서태화. 넌 네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책임감으로 그 일을 해냈어. 내가 너한테 고생했다고 했던 말. 그냥 한 소리가 아니다. 그 말 진심이야.”
#.
태화가 이한철을 향해 말했다.
“기억나십니까?”
이한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기억난다. 그때 일은 잊어버리기가 쉽지 않지.”
“대부분 사람은 내가 립싱크 연기를 했다는 것, 그리고 선배가 그 제안을 했다는 것만 기억하지, 당시 나와 선배가 나눴던 대화는 몰라요.”
“그런 거 같더구나. 그러고 보면 너도 은근히 입이 무거워.”
“그때 선배와 나 둘만 나눴던 대화니까요. 굳이 다른 사람이 알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요지가 뭐냐?”
“일단 선배는 저한테 악감정이 없다는 겁니다.”
“뭐?”
“제가 요즘 사람들 좀 놀라게 하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나한테 악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도 선배한테 악감정은 없습니다.”
“…….”
“제가 만약 선배한테 악감정이 남았다면 선배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겠죠. 만약 떠올랐더라도 무시했을 거고요. 제가 성인군자는 아니거든요.”
“그래. 네 말대로 난 너한테 악감정은 없다. 그렇다고 너하고 같이 작품을 해야 하는 건 아니야.”
“한철 선배. 솔직히 시나리오 읽어 보고 나서 이 작품에 관심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
“윤주 누나도 현장에서 뛰는 프로입니다. 누나가 선배한테 시나리오를 보여줬다는 건 단순한 모니터링만 요구한 건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한철은 태화에게 당장 대답하지 않았다.
“한철 선배. 혹시 이 작품의 연출자가 저라서 쉽게 결정을 못 내는 겁니까? 또는 내가 후배라서?”
이한철의 눈매가 순간 사납게 변했다.
“서태화. 날 그런 옹졸한 사람으로 몰지 마라.”
“그럼 뭡니까?”
“내가 작품에 참여할 땐 그 작품이 잘되는 걸 가장 먼저 생각한다. 근데 난 아직 너를 잘 모른다. 시나리오를 잘 쓰는 거하고 연출을 잘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그래도 선배는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건.”
“물론 윤주 누나가 부탁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단지 그 이유뿐입니까?”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난 네 녀석이 궁금해졌다. 윤주에게서 들은 너의 행보, 꽤 흥미로웠어.”
“그럼 제가 흥미로운 제안을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제안?”
“네. 한철 선배. 가치에 투자해 주십시오.”
“가치에 투자?”
“네. 전 이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가치에 투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예산 영화지만 이 영화는 만들어질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가치 투자에 작품의 완성도가 담보되지 않아.”
“전에 선배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었죠. 넌 네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책임감으로 그 일을 해냈어라고. 이 작품은 제 작품이고 그래서 책임지고 잘 만들고 싶습니다.”
“…….”
“투자 위험 제가 최대한 줄이겠습니다.”
태화의 말에 이한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언변이 능한 녀석인지 몰랐네.”
“그럼. 이 작품에 참여하는 겁니까?”
“아니. 좀 더 고민해 봐야겠어. 투자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따져봐야 할 거 같고.”
“한철 선배. 그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뭘?”
“계약 조건이요.”
“계약 조건? 너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니냐?”
“아뇨. 나중에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하겠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뭐냐?”
태화는 자신이 만든 계약 조건을 이한철에게 설명했다. 태화의 설명을 들은 이한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순익이 발생하면 그중 50%를 전 스태프와 연기자에게 n분의 1로 주겠다고?”
“네. 이게 제가 이 작품의 가치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내건 계약 조건입니다. 이미 그렇게 몇 명은 계약했고요.”
“그래. 알았다. 더 할 말 있니?”
“혹시 이 작품 참여를 결정하게 되면 윤주 누나한테도 계약 조건을 말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한철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알았다. 서태화.”
“네.”
이한철이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여튼 오늘 만나서 반가웠다.”
태화가 이한철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저도요. 하지만 선배의 결정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알았다. 빨리 결정해서 알려주마.”
“네.”
이한철은 태화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먼저 카페를 나섰다.
[태화 군. 자넨 최선을 다했네. 혹시 이한철이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게.]
[네. 다른 대안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네. 자네는 이번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 작품을 끝까지 만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네.]
[알고 있어요. 그래도 한철 선배가 함께했으면 좋겠네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먼.]
#.
이우섭과 김현석은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장소 헌팅을 나갔다. 현재 옥탑엔 태화와 한재영만이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상에 앉은 채 대화를 했다.
“태화야. 어제 한철 선배랑 얘기는 잘됐냐?”
“내가 해야 할 말은 다 했어.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한재영은 태화의 대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예상과 너무 다른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고? 어색하거나 그러지 않았고?”
“응.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하고 한철 선배 흑역사 이후 만난 적이 없잖아.”
“근데 대화 나눠보니까 사람 괜찮더라고.”
한재영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태화에게 물었다.
“뭐? 괜찮아? 그럼 하겠대?”
“어제 결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결정이 너무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한철 선배도 오래 고민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럼 기대해도 되는 거냐?”
“너 한철 선배 불편하다며?”
“야. 넌 날 그렇게 모르냐?”
“뭘?”
한재영이 손으로 태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도 인마 너만큼 이 작품 잘되길 원하는 사람이야. 내가 불편한 것보다 감독인 네가 원하는 게 더 중요하지. 게다가 한철 선배 실력이야 다 아는 거고.”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마.”
한재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화 잘 됐다며?”
“사람 마음 모르는 거잖아. 그리고 내일까지 연락 안 오면 바로 결정 보려고.”
“그럼 모레 결정한단 말이야?”
“응.”
“생각보다 빠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