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7화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계속 업무 지시를 내렸다.
[태화 군.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일세.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이제야 뭔가 하는 것 같다는 실감도 나고요.]
[그 기분 충분히 이해하네.]
박도봉 감독도 이 순간 옛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작품을 연출할 때 느꼈던 그 설렘.
그 기억만큼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우섭아, 그리고 현석아.”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네.”
“마지막으로 장소 헌팅이다.”
태화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한재영이 바로 발언했다.
“태화야. 장소 헌팅은 내가 할 말이 좀 있어.”
“그래. 해봐.”
“이 동네 촬영 장소로 괜찮은 곳이 꽤 많아. 여기 봐서 알겠지만, 이곳이 약간 달동네 느낌이 나잖아.”
한재영의 말에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영이 말이 맞아.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들이 아니야.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동네하고 콘셉트가 맞아. 이 동네 골목길도 많이 있고. 우섭아.”
“네.”
“일단 이 동네 중심으로 훑어봐. 그리고 두 사람은 당분간 장소 헌팅에 집중한다.”
“알겠어요.”
“장소에 관한 콘셉트는 씬 분석표 작성할 때 정리했으니까 따로 설명할 필요 없겠지?”
“네.”
“두 사람은 필요하면 밥은 식당에서 사 먹어. 나중에 돈 줄 테니까.”
한재영이 이어서 발언했다.
“영수증 꼭 끊어라. 나중에 비용처리 해야 하니까.”
“알겠어요.”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오늘도 힘내자.”
“넵!”
아침 회의를 마치고 이우섭과 김현석은 옥탑방으로 들어가고 태화와 한재영 둘만 평상에 남았다.
“태화야. 어제 윤주 누나 만났냐?”
“응.”
“윤주 누나 반응은 어때?”
“반응이야 뻔하지. 많이 놀라던데.”
“그럴 만도 하지. 네가 갑자기 감독한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 아니냐? 게다가 네가 한철 선배를 촬영감독으로 생각한다고 하니 안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게다가 너하고 한철 선배 묘하게 묶여 있잖아.”
“그렇지.”
“그래도 윤주 누나는 너 도와줄 거야.”
“알아. 내가 말했던 대로 한철 선배하고 만남은 주선해 주겠지.”
“앞으로 윤주 누나한테 잘해. 누나가 너 친동생처럼 챙겨줬잖아.”
“그래야지.”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철 선배하고 너하고 호흡을 맞춘다. 지금도 상상은 안 되는데…….”
“아직 결정된 거 없어.”
“그렇긴 한데.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다.”
한재영은 손으로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지금까지 그렇게 부정적이더니 이제 궁금한 모양이다? 손으로 턱을 어루만지는 거 보니.”
“모든 걸 떠나서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야. 궁금한 건 궁금한 거지. 안 그래?”
#.
태화는 며칠간 장소 헌팅에 집중했다. 주요 스태프 섭외 작업과 별개로 장소 헌팅은 매우 중요하다. 연기자와 스태프, 그리고 촬영 장비가 다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촬영이 이루어질 장소가 섭외되어 있지 않다면 촬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우섭과 김현석이 헌팅 갔던 장소를 스틸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어왔고 태화를 비롯한 스태프는 그걸 바탕으로 1차 분석과정을 거쳤다.
태화는 1차 분석을 통해서 여러 헌팅 후보지를 줄이고 유력 후보지를 선정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실제 헌팅 후보지로 가서 눈으로 점검한다. 실제 촬영이 적합한 장소인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태화를 포함한 네 명은 영화의 중요한 공간이 될 골목길 헌팅을 위해서 이동 중이었다. 이우섭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형. 여깁니다.”
“일단 혼자 둘러볼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네.”
태화는 골목길을 눈으로 쭉 훑어보았다. 이때 태화가 그동안 훈련했던 게 빛을 발했다.
태화는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 프레임을 그리고 있었다.
[태화 군. 어떤 거 같은가?]
[일단 나쁘지 않아요. 일단 골목길 폭이 너무 좁지 않아서 촬영 공간 확보가 충분하고요. 또 골목길 길이도 짧지 않아서 연기자의 동선을 잡는데, 나쁘지 않아요. 골목길이 적당히 경사가 있는 데다가 일직선이 아니고 뱀처럼 휘어진 모양이라 공간적으로 지루하지도 않아요.]
[아주 좋은 분석일세. 하지만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네.]
[그것도 지금 말하려고 했습니다.]
[말해보게.]
[이곳은 너무 시끄럽지 않아요.]
[정답일세. 동시 녹음을 해야 하는데 주변이 시끄러우면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이곳은 포기해야 하네.]
[네. 그런데 이곳은 그렇게 시끄럽지 않잖아요. 이 정도면 촬영 장소로 결정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나도 동의하네. 하지만 이곳으로 결정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네.]
[뭡니까?]
[혹시라도 근처에 큰 공사가 예정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하네.]
[아. 그렇군요. 그건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요.]
[거기까지 확인이 된다면 이곳을 촬영 장소로 결정해도 좋을 걸세.]
태화는 장소에 대한 분석이 끝나고 나서 한재영과 이우섭, 그리고 김현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수고했다.”
“네.”
“이 골목길. 아주 마음에 들어.”
이우섭과 김현석은 태화의 말을 듣자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한 가지 더 확인할 사항이 있다.”
이우섭이 바로 반응했다.
“뭡니까?”
“근처에 큰 공사가 예정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오디오 때문 아닙니까?”
“그래. 그것만 확인되면 이곳이 촬영 장소로 확정이다.”
“알겠습니다.”
“너희들 오늘 뭐 먹고 싶어? 수고했으니까 맛있는 거 먹어야지.”
이우섭과 김현석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우섭이 대답했다.
“피자 먹고 싶습니다.”
“피자?”
“네. 저랑 현석이랑 며칠 전부터 피자 먹자고 말했었거든요.”
“오케이. 그렇게 하자. 재영아.”
“그러자. 배달시켜 먹을까?”
태화가 이우섭과 김현석을 보며 말했다.
“그게 낫지 않을까?”
이우섭이 태화에게 대답했다.
“네. 옥탑이 편합니다.”
“그럼. 일단 옥탑으로 돌아가자. 가면서 콜라 좀 사고.”
“네.”
태화를 포함한 네 명은 골목길을 벗어나 옥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몇 분 후 태화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태화는 번호를 확인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혹시?’
태화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서태화.
“누구시죠?”
-나. 이한철이다.
태화는 순간 가던 걸음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한철 선배.”
-네가 쓴 시나리오 봤다.
“네.”
-나 만나고 싶다고 했다며?
“네.”
-그래. 만나자.
“선배. 언제 괜찮나요?”
-내일 시간 되니?
태화는 이한철의 제안이 나쁘지 않았다. 결정을 보려면 빨리 보는 게 촬영을 준비하는 데 낫기 때문이다.
“네. 됩니다.”
-그럼. 내일 오후에 보자. 정확한 시간과 장소는 내가 다시 문자로 보낼게.
“알겠어요. 그럼 내일 보기로 하죠.”
-그래. 그때 보자.
태화가 통화를 끝내자 한재영이 다가왔다.
“한철 선배냐?”
“응. 내일 보자고 하네.”
태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우섭과 김현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섭이랑 현석이는?”
“내가 먼저 옥탑으로 보냈어.”
“잘했다.”
“그런데 시나리오는 읽어봤대?”
“응. 아마 윤주 누나가 시나리오 먼저 보여줬을 거야. 한철 선배는 누가 썼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테고.”
“그리고 거기서 네 이름이 나왔겠지.”
“아마도.”
“근데 넌 어떨 거 같아? 한철 선배가 네 제안에 응할 거 같아?”
“그건 모르지.”
“내가 다시 말하지만, 한철 선배가 아니어도 촬영할 사람 있어. 내일 결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알았어.”
#.
다음 날 오후 4시.
태화는 ‘민들레’ 카페 테라스에서 이한철을 기다렸다. 태화가 ‘민들레’ 카페로 온 건 어제저녁 이한철에게서 온 문자메시지 때문이다.
-시간은 내일 오후 4시로 하자. 시간은 내가 정했으니 장소는 네가 정해라.
그래서 태화는 이한철과 만날 장소로 ‘민들레’ 카페로 정했다.
[태화 군. 심경이 어떤가?]
[그냥 담담하네요.]
[자네가 이한철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송윤주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되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한철 선배를 이곳까지 나오게 한 사람인데요.]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그 의미가 아닐세.]
[그럼 뭡니까?]
[송윤주는 단순히 이한철의 연인이 아니야. 그녀도 현장 스태프란 말일세.]
[그럼 현장 스태프의 관점에서 봐야 한단 말이군요.]
[그렇네. 송윤주가 이한철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했던 행위는 단순히 시나리오 모니터링을 부탁하기 위한 게 아닐세. 그녀도 자네의 시나리오가 나름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한철에게 전달한 걸세.]
[네. 저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시나리오가 나빴다면 윤주 누나는 처음부터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겁니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송윤주는 이한철에게 자네의 시나리오를 같은 현장 스태프로서 추천한 거로 볼 수 있네.]
[윤주 누나는 시나리오가 괜찮으니까 나를 한번 만나 보라는 메시지를 한철 선배에게 준 거군요.]
[맞네. 그리고 이한철은 송윤주의 그 메시지를 받고 이 자리에 나온 걸세.]
[그건 한철 선배도 시나리오가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요.]
[그렇네.]
연출부와 제작부를 제외한 영화의 스태프 즉 현장 스태프도 연기자들처럼 작품에 참여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움직인다. 아는 연출부, 제작부 스태프를 통해서 시나리오를 구해서 읽기도 하고 감독이나 제작자를 찾아가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기도 한다.
특히 감독과 제작자가 참석한 술자리에 이런저런 스태프들이 참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이 하는 말은 대부분 비슷하다.
-뭐, 그냥 지나가다가 들렀어요.
현장 스태프가 이렇게 하는 건 한 번이라도 더 감독과 제작자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다. 송윤주도 어떻게 보면 이한철에게 정보를 준 셈이다. 차이라면 아는 사람을 통해서 뒤로 얻은 정보가 아니라 태화에게 직접 얻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태화 군.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네.]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한철 선배도 나를 만나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이한철이 자네에게 장소의 선택권을 준 것으로 보아선 독선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네. 학교 때도 성격이 이상하다거나 그런 거로 다가가기 힘든 게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좀 궁금하군.]
[뭐가 말입니까?]
[자네의 머릿속에 이한철이 떠오른 거 말일세. 아무리 영감이라도 그렇게 난데없이 자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는 않을 텐데 말일세.]
[역시 영감님은 날카로우십니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말이군.]
[네. 저도 기억을 회상하다 보니 뭔가 있었어요.]
[아마도 그게 자네가 이한철을 설득할 명분이 되겠구먼.]
[네. 그게 뭐냐면요…….]
태화는 박도봉 감독에게 자신이 기억해낸 사연을 말했다.
[음. 그런 사연이 있었구먼. 자네가 머릿속에 이한철을 떠올릴 만도 해.]
태화는 시간을 확인했다. 3시 55분.
태화는 테라스에서 카페 주변 길을 쳐다보았다. 많은 사람이 보였지만 태화의 눈에 유독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오랜만에 본 모습이지만 이한철이었다.
[마침 저기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