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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45화 (45/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5화

연기자는 자신이 출연하고 싶은 작품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 전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연기자가 연예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다면 해당 소속사에서 로비를 통해 배역을 따낸다. 하지만 연기자가 선혜영처럼 소속사가 없는 경우, 연기자는 감독 같은 주요 스태프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아는 스태프라도 있으면 그걸 통해서 오디션이나 감독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선혜영처럼 친한 연기자를 활용해 감독과 안면을 트기도 한다.

감독도 사람이라 연기자가 캐스팅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걸 그냥 보아 넘기기는 힘들다. 감독은 비슷한 연기력이라면 한 번이라도 더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은 연기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네. 저도 오디션에서 선혜영 님의 연기 기대합니다.”

“네. 저도 열심히 준비할게요.”

#.

태화와 한재영은 정원석과의 미팅을 끝내고 카페를 나섰다. 한재영이 태화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태화야. 그 상식적인 심성이라는 거 말을 좀 어렵게 해서 그렇지. 그거 동정심 같은 거 아니냐?”

태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재영에게 대답했다.

“그렇다. 왜? 놀리려고?”

“멋있다. 서태화.”

“뭐?”

“멋있다고. 자존심 강했던 네가 누군가에게 동정심 같은 걸 호소하는 거, 싫었을 거 아냐.”

“좋진 않았지. 당당하게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데 네가 그걸 했다는 거야.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지.”

“쪽팔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상황이 지나고 보니까 아찔하더라. 내가 만약 자존심 부렸으면 오늘 결과와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겠지.”

“그러니까 멋있다고. 작품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놨다는 거 아냐. 감독이 폼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멋있는 건 너처럼 중요할 때 쪽팔림을 무릅쓸 수 있는 용기야.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냐.”

“어쨌든 큰 고비 하나는 넘겼다.”

“정원석과 계약한 건 큰 고비 하나 넘긴 거 이상이야.”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남주가 계약서에 사인했으니 이제 다른 연기자한테 그게 가이드라인이 될 거 아냐?”

“그렇지. 가장 비중이 큰 배역을 맡은 사람이 그 조건에 계약했다는 데 다른 연기자는 할 말 없는 거지.”

“앞으로 일 진행하는 데 한결 수월해질 거야.”

“그렇지. 연기자 중 계약 내용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럼 나머지 배역은 오디션으로 진행할 거지?”

“응. 그렇게 할 거야.”

“그럼 다음은 촬영감독 섭외해야 하는데. 일단 촬영부 중에서 퍼스트 급으로 섭외해 보자. 내가 좀 알아볼게.”

촬영부 퍼스트는 촬영감독 바로 아래 위치한 조수다. 한재영이 퍼스트 급으로 잡은 건 촬영부로서 어느 정도 경험도 있는 데다가 장편영화 데뷔를 해야 하는 처지라 태화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재영아. 나 촬영감독으로 생각해 놓은 사람 있다.”

“뭐? 누구?”

“이한철 선배.”

한재영은 태화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한철이 누구던가? 태화가 첫 주연으로 참여해서 망작이 되어버린 그 졸작의 촬영을 맡았던 선배 아니던가.

“뭐?”

“왜? 안 돼?”

“야.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무슨 생각이냐니?”

“야. 이한철 선배는 네 흑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야.”

“이미 지난 일이야.”

“뭐?”

한재영은 태화의 결정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재영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태화야. 너 요즘 너무 업 된 거 아니냐? 요즘 일이 좀 풀리니까 뭐든지 하면 다 될 거 같고 그렇지?”

“야. 이제 나도 흑역사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냐?”

“그러니까 흑역사를 벗어나는 건 이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그냥 이 작품 잘 만들면 돼.”

“그냥 정면으로 돌파하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한철 선배 실력도 좋잖아.”

“한철 선배 실력이야 좋지.”

“재영아. 한철 선배로 가자. 작품을 위해서도 한철 선배가 도움이 될 수 있어.”

한재영은 태화를 몇 초간 말없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 자신 있어?”

“이건 자신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작품을 위해서야.”

한재영은 태화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어쩔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좋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일단 추진해 볼게. 감독이 원한다는 데 일단 해봐야지.”

실제로 감독이 촬영감독 선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감독과 호흡을 맞춰 영상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바로 촬영감독이기 때문이다.

“고맙다. 재영아.”

“근데 너 그 사실 알고 그런 거 아니지?”

“어떤 사실?”

“한철 선배가 만약에 한다고 하면 같이 딸려오는 사람이 있어. 1+1이 되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한철 선배하고 윤주 누나 사귄다.”

“윤주 누나면 송윤주?”

“그래.”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 학교 때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잖아.”

“나도 우연히 들은 얘기야. 스태프들하고 술자리 하다가 알게 된 거야.”

“…….”

“전에 한철 선배하고 윤주 누나하고 같은 작품을 한 적이 있는 스태프가 말해준 거거든.”

이한철과 송윤주는 촬영 현장에서 만났지만, 처음엔 서먹한 사이였다. 하지만 촬영 현장은 고달프다.

비록 두 사람은 학교 때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같은 과 선 후배 사이라는 사실은 촬영 현장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의식하게 했다. 그러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게 됐고 마침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다.

“사람 일 모른다더니 두 사람이 그렇게 사귀게 될 줄이야.”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긴 전쟁터에서도 로맨스는 이루어지니까.”

태화는 ‘전쟁터에서도 로맨스’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두 사람 사귄 지 얼마나 된 거야?”

“한 일 년 정도 된 거 같은데? 그런데 말이야. 내 생각엔 한철 선배보다 윤주 누나 먼저 접촉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왜?”

“나 솔직히 한철 선배 좀 불편하단 말이야.”

한재영이 이한철을 불편해하는 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긴 한철 선배는 후배들이 다가가기 힘든 스타일이지. 포스가 좀 있다고 해야 하나? 어느 과에도 그런 선배 한두 명은 존재하잖아.”

“어쨌든 넌 윤주 누나 먼저 만나. 그게 나을 거야. 윤주 누나가 학교 때도 너 좀 챙겼잖아.”

“윤주 누나. 얼마 전에 만났어.”

“진짜야? 어디서?”

“주문진에서.”

“뭐. 주문진? 그 좋은 델 너만 갔냐?”

“그때 넌 영화 스케줄 때문에 갈 수가 없었을 거야.”

“하긴.”

“재영이 네 말대로 윤주 누나 먼저 만나보자. 누나가 나한테 연락하라고 했거든. 이번 기회에 연락하지 뭐.”

“그거 지나간 말로 한 거 아니지?”

“지나간 말로 한 사람이 내 폰에 자기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까지 했겠냐?”

“그래? 잘됐네.”

태화와 한재영은 전철을 타기 위해 혜화역으로 들어갔다.

[태화 군.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뭔가?]

[그 졸작에서 제 연기는 엉망이었죠. 그런데 한철 선배가 저를 잡은 그 화면은 느낌이 좋았어요.]

[음. 확실히 실력이 있다는 말이군.]

[네. 한철 선배는 휴학을 자주 하는 편이었는 데 그때마다 실제 영화 현장에서 촬영부로 일했어요.]

[실력 있는 스태프와 일하고 싶은 건 감독의 욕구이기도 하지.]

[특히 저처럼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처지에선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단지 실력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뭔가?]

[그냥 머릿속에서 촬영감독을 떠올렸는데 이한철이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어떤 역할에 적합한 사람은 그 사람이라고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가. 그것도 영감이라면 영감일세.]

[그런 것도 영감입니까?]

[자네가 정원석을 처음 영화에서 보고 이 영화의 남주로 점찍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네. 안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

다음 날.

한재영의 옥탑방 평상에서 태화를 비롯한 네 명이 둘러앉았다. 오전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태화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섭이하고 현석이한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제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우섭이 태화의 발언을 듣자마자 바로 반응했다.

“중요한 일이요?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그래. 그 일은 아주 잘 해결됐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걸 말하려고 이렇게 모인 거야. 어제 남주 캐스팅이 확정됐다.”

“태화 형. 정말입니까?”

“그래. 확정됐어.”

태화가 정원석이 사인한 계약서를 펼쳐 보였다.

“어제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으니까 확실한 거지.”

“근데 그 사람이 계약 조건에 쉽게 동의했습니까?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뭐. 쉬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았어.”

“와우!”

이우섭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정말 이 작품 들어가겠네요.”

이우섭이 이렇게 말한 건 당연했다. 제작 준비를 하던 영화가 좌초되는 이유 중 가장 많은 게 바로 주연배우의 캐스팅 불발이기 때문이다. 이우섭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현석이 태화에게 물었다.

“형. 정말 작품 들어가나요?”

“그래도 가장 어려운 고비는 넘겼다고 봐야지.”

“정말입니까? 하하하.”

막내 김현석의 웃음은 티끌 한 점 없이 순수했다. 그래서일까?

김현석의 웃음을 바라본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태화가 웃음기 띤 얼굴로 김현석에게 말했다.

“현석아. 좋냐?”

“그럼요. 제가 영화 제작은 처음 경험하지만, 작품 만들어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섭이하고 현석이는 앞으로 촬영 준비 잘해야 해.”

이우섭과 김현석은 서로 맞추어 본 것처럼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네.”

“자. 그럼 오늘 일 시작하자.”

태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우섭과 김현석은 업무를 보기 위해 옥탑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평상에는 태화와 한재영만 남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평상에 앉아 있었다.

“태화야. 윤주 누나 언제 만날 거냐?”

“가능한 한 빨리 만나야지. 이따가 윤주 누나한테 연락해 보려고.”

태화는 시선을 돌려 한재영을 쳐다보았다. 한재영의 얼굴엔 걱정스러운 표정이 담겨 있었다.

“왜? 아직도 걱정되냐?”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안 그래? 너한테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한테도 이 작품은 중요해.”

“알아.”

“어젯밤에 생각을 좀 했지.”

“무슨 생각?”

“태화. 저 녀석 요즘 왜 저러나. 그냥 무난하게 가도 되는데 왜 자꾸 그럴까.”

한재영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계약서 조항도 나름 괜찮은 내용이었고 가치라는 명분도 있었다. 다행히 정원석이 동의해서 일이 잘 마무리되었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었던 건 분명했다.

“태화야. 너 무난하게 가면 좀 불안하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네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좀 그랬잖아. 그래서 뭔가 무난하게 일이 진행되면 불안감 느끼고 그런 거 아니냐고?”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일부러 내가 힘들고 어려운 길을 자처하는 거다?”

“그런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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