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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44화 (44/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4화

전화기 너머로 정원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태화 감독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네. 저도 잘 지냈습니다.

서로 간의 간단한 안부를 묻고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5초 정도의 정적이 이어진 후 태화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시나리오는 읽어 보셨나요?”

-네. 재밌게 잘 봤습니다.

“그렇습니까?”

태화는 일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결론이 난 건 아니다.

-시나리오는 재미있지만 아무래도 못할 거 같네요.

이런 식의 반전 결말로 가는 건 정말 태화에겐 최악이었다.

“그럼. 이 영화에 참여하실 겁니까?”

정원석은 태화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약 3초 정도 뜸을 들였다. 태화에게 그 3초는 근래에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네. 할게요.

“정말입니까?”

-네.

“하하하. 고맙습니다.”

-감독님. 그렇게 좋으세요?

“네. 너무 좋습니다.”

-감독님이 좋아하시니 저도 좋네요.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제 캐스팅 제안에 응한 겁니까?”

-자세한 건 만나서 말씀드리죠. 혹시 오늘 괜찮으신가요?

“당연히 괜찮습니다.”

-그럼. 저번에 만났던 카페에서 6시에 뵙죠.

“알겠습니다.”

태화는 전화를 끊고 나서 두 손을 번쩍 들고서 옥상을 뛰어다녔다. 태화는 단순히 뛰어다니지만은 않았다.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도 했다. 그만큼 태화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마침 장 보러 갔던 한재영과 김현석이 돌아왔다.

한재영이 태화의 모습을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현석아. 태화 쟤 왜 저러는 거 같냐? 얘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건 아닐 테고.”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지.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다. 태화야. 태화야!”

한재영의 부름에 태화가 한재영과 김현석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태화야. 너 무슨 좋은 일 있냐?”

“아니.”

“뭔가 있는 거 같은데?”

태화는 정원석이 이 작품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하고 싶었다. 스태프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하지만 아직 하나의 변수가 남아 있었다. 정원석이 계약서에 사인할 때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냥 운동한 거야. 작업하느라 몸이 찌뿌둥해서.”

“뭐? 정말이야.”

“그래. 오늘 운동하기 좋은 날씨 아니냐? 햇볕을 쬐니까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재영은 태화의 태도에 뭔가 수상함을 느꼈다.

“현석아. 장 본 거 정리 좀 해줄래?”

“네.”

김현석이 장 본 걸 정리하러 자리를 뜨자 한재영이 태화에게 다시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참 너 눈치 빠르다?”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 거 같냐?”

“정원석 이 작품 한단다.”

“뭐? 정말이야?”

“그래. 나한테 연락 왔어.”

“그런데 왜 아닌 척한 거야?”

“아직 계약서에 사인한 거 아니잖아.”

한재영은 계약서라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 그렇지.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정원석이 이 작품에 참여한다고 한 이유가 뭐냐? 혹시 저번에 말한 상식적 그거냐?”

“나도 몰라.”

“왜 몰라?”

“얘기 안 해주던데?”

#.

태화와 한재영은 그리고 정원석은 저번에 미팅을 가졌던 대학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화가 먼저 정원석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공연 일정이 없으시죠?”

“아. 그걸 어떻게?”

“뭐 그 정도는 알아야죠.”

“하하. 고맙습니다. 저한테 신경 써주셔서.”

정원석은 오늘 공연이 없고 연습 일정만 잡힌 날이다. 그래서 6시에 약속 시간을 잡은 것이다. 태화는 정원식을 만나기 전 오늘 정원식이 속한 극단이 공연이 없음을 확인하고 온 상태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태화의 이런 행동은 정원석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했다.

“정원석 님. 아까 제 질문에 답변하지 않으셨어요.”

“아. 왜 작품을 하게 됐냐고요?”

“네.”

이미 결정된 사항인데 태화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거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감독은 연기자의 심리상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연기자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도 그중 하나다.

감독과 연기자는 항상 교감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래야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연기자가 현장에서 보여줄 수 있다.

감독과 연기자의 교감이 잘 이루어지는 경우 감독은 특정 배우를 자신의 페르소나(감독의 영화 세계를 대변하는 분신과 같은 배우)로 내세우기도 한다.

“<내 복권 내놔!> 시나리오는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출연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이해합니다. 개봉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요.”

“네. 그래서 극단에 있는 동료한테 물어봤습니다. 이 작품을 해도 괜찮은지.”

“…….”

“동료들은 반대 의견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시간 낭비로 끝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동료들 말대로 못 하겠더라고요.”

“혹시 그 이유가…….”

“네. 감독님과의 인연이요.”

“아. 네.”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인연인데 왠지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내가 그 배역을 맡은 건 어쨌든 감독님처럼 그 당시 오디션에서 탈락한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

“그리고 그런 인연이 있는 사람하고 한번 작업해 보는 것도 기억에 남을 일이 될 거 같았고요.”

태화는 정원석이 자신의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의 빚이 원인이 될 거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게 현실로 다가오자 태화는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시나리오의 자신감에 도취했다면 오늘의 이 결과는 반대가 됐을 터였다.

“정원석 님의 그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꼭 결과로 만들어내겠습니다.”

“감독님. 꼭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저 동료들한테 큰소리쳤거든요.”

태화와 정원석의 대화를 듣고 한재영이 슬쩍 계약서를 정원석에게 내밀었다.

“한 피디님, 이게 뭡니까?”

“계약서입니다.”

“네.”

“정원석 님 나중에 딴소리 못 하게 묶어놔야죠.”

“하하. 네. 그러시죠.”

태화와 한재영은 순간 긴장했다. 연기자가 영화에 참여한다고 의사를 밝히더라도 나중에 계약서상의 조건 때문에 깨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정원석은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 계약서 내용을 살펴보았다.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을 본 정원석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피디님. 근데 이 계약서 조항?”

“그게.”

한재영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태화가 바로 나섰다.

“정원석 님. 그 조항 제가 만들었습니다.”

“감독님이요?”

“네. 이 작품에 참여하는 연기자와 스태프 모두 이 영화가 만들어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전 그 사람들한테 나중에라도 보상해 주고 싶어서 그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 참여하는 연기자와 스태프 모두 중요하거든요. 경중을 따져서 보상한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원석은 태화의 설명을 듣고 나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감독님은 평범하지 않은 거 같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솔직히 이런 생각 잘 안 하잖아요. 순이익의 절반을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한테 돌려준다는 생각 말이에요. 그것도 n분의 1로 말이죠.”

“그렇긴 하죠.”

“제가 만약 여기서 사인을 안 한다면 전 아주 욕심이 많은 놈이 되겠죠?”

순간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긴장감이 흘렀다.

[태화 군. 이제 자네의 말 한마디에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도 있네.]

[전 제 신념을 지키겠습니다.]

[나도 자네 생각에 동의하네.]

[영감님. 안 말립니까? 전 말릴 줄 알았는데요.]

[어쩌면 정원석은 지금 자네를 마지막으로 시험해 보는 것일지도 모르네.]

[절 시험해 본다고요?]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연기자는 감독의 신념, 신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었거든. 정원석은 자네와의 인연을 생각하고 캐스팅 제안에 응했네. 난 정원석이 그런 부류라는 판단이 드네.]

[저도 영감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태화는 자신이 어떤 대답을 할지 확실히 결심을 굳혔다.

“대신 정원석 님이 사인하면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한번 가치에 투자해 보시죠.”

태화의 대답을 들은 정원석은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화와 정원석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재영은 이 침묵의 시간 동안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화는 그렇지 않았다.

태화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몇 초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정원석의 표정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아. 감독님은 못 당하겠네요. 좋습니다. 저도 가치에 투자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원석은 주저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 모습을 본 태화와 한재영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 두 사람의 표정은 비슷했지만, 내적 심경은 달랐다.

태화는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결과에 담담했고 한재영은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한시름 놓은 심경이었다.

“감독님. 이 영화 꼭 개봉되도록 하겠다는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저도 이 작품이 개봉돼야 나중에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영화계로 진출할 수 있잖아요.”

“네. 꼭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 작품이 성공해야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거든요.”

태화는 정원석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이제 한배를 탄 겁니다.”

정원석이 태화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이 한재영은 재빨리 정원석이 사인한 계약서를 챙겼다.

“정원석 님. 이제 무르기 없습니다.”

한재영의 말에 태화와 정원석은 순간 빵 터졌다.

잠시 후.

태화와 한재영 그리고 정원석이 있는 자리에 한 젊은 여성이 합석했다.

“안녕하세요. 선혜영이라고 합니다. 원석 오빠랑 같은 극단에 있습니다.”

선혜영은 하얀 피부와 수수한 외모가 매력이었다.

정원석이 선혜영에 이어 발언했다.

“이번에 시나리오를 읽고서 유일하게 한번 해보라고 권유했던 친구입니다.”

태화는 정원석의 말을 듣자 선혜영이 반가웠다.

“선혜영 님. 그러셨나요? 고맙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시나리오를 보고 어떤 분이 글을 쓰셨나 궁금했어요. 당연히 감독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궁금했고요.”

“아. 네.”

“듣던 것보다 더 외모가 멋있으세요.”

“고맙습니다.”

“원석 오빠가 농담처럼 말했거든요. 나중에 촬영 현장 가면 감독님을 배우로 보고 자신을 감독으로 볼 거라고. 근데 농담이 아니네요.”

“과찬이십니다. 누가 뭐래도 정원석 님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입니다.”

태화는 정원석과 선혜영의 사이가 꽤 친밀하다는 걸 느꼈다.

“혹시 두 분이 사귀는 사이신가요?”

정원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꽤 친한 사이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감독님. 이 친구도 이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합니다.”

“네? 하지만 전 아직 선혜영 씨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1+1 패키지 같은 거 아닙니다.”

태화는 정원석의 말에 신뢰가 같다. 만약 정원석이 1+1 패키지 조건이었다면 선혜영까지 묶어서 계약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럼?”

“이 친구도 오디션에 참가할 겁니다. 그전에 인사차 온 겁니다.”

“네. 고맙습니다. 제 작품에 이렇게 관심을 보여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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