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3화
다음 날.
이우섭과 김현석은 ‘민들레’ 카페가 아닌 한재영의 옥탑방으로 출근하는 날이다. 한재영은 두 사람이 혹시 옥탑방을 못 찾아올 거 같아서 마중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건물이나 신축 건물을 찾기는 쉬워도 낡은 다가구 주택을 찾아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재영은 자신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이우섭의 번호였다. 한재영은 이우섭의 번호가 확인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중 나가야겠구나.”
한재영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 어디야?”
-재영이 형. 혹시 녹색 대문이 있는 집 맞습니까?
“어. 맞는데? 잘 찾아왔네. 문 열려있지?”
-아뇨. 잠겨 있습니다.
보통은 문을 열어 놓는데 오늘은 누군가 외출하면서 문을 잠근 모양이었다.
“잠깐 기다려.”
-알겠습니다.
한재영은 전화를 끊고 중얼거렸다.
“이거 의외네. 집도 잘 찾아오고.”
한재영은 대문을 열어주기 위해서 밑으로 내려왔다.
“어. 뭐야? 태화랑 같이 온 거야?”
한재영의 질문에 이우섭이 대답했다.
“네. 태화 형은 여기 오면서 만났습니다.”
이우섭의 발언이 끝나자 태화가 한재영을 보며 말했다.
“얘네 둘이 저기 편의점 있는 데서 헤매고 있더라고. 그래서 데려왔지.”
“어쩐지 쉽게 찾아오나 했다. 올라가자.”
태화와 한재영을 비롯한 네 명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네 명은 옥탑에 도착하자 평상에 둘러앉았다.
이우섭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 여기 전망이 좋네요. 아늑하고요.”
김현석이 이어서 발언했다.
“어제 새로 출근할 곳이 어떤 곳일까 상상해 봤거든요.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좋네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그래도 옥탑 중에선 전망이 괜찮지.”
태화는 비닐봉지에서 빵을 꺼내서 한재영에게 건넸다.
“네가 좋아하는 단팥빵이다. 아침은 먹어야지.”
“땡큐.”
태화를 비롯한 네 명은 평상에 둘러앉아서 아침으로 빵을 먹었다. 한재영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 옥탑방에서 서류를 들고 나왔다.
“우섭아, 현석아.”
“네.”
“이거 계약서야.”
한재영은 어제 태화와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후 바로 집에서 계약서를 만들었다. 이우섭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는 계약서도 씁니까?”
“그럼. 써야지, 안 쓰냐?”
“보통 저예산 영화는 그냥 구두계약으로 하지 않나요?”
“보통 그렇게 하는데, 감독이 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해서.”
이우섭과 김현석이 동시에 태화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엔 태화에 관한 호의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러자 태화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볼 거 없어. 당연히 해야 하는 걸 하는 것뿐이니까.”
이우섭과 김현석은 계약서를 읽어갔다. 잠시 후 계약서를 다 읽던 이우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로 계약서 조항이었다.
-극장 개봉 순이익이 발생했을 때 그 순이익의 50%를 이 작품에 참여한 모든 연기자와 스태프에게 균등하게 배분한다.
“태화 형. 이거 괜찮습니까?”
“뭐가?”
“순이익 50% 배분 조항 말입니다. 너무 많잖아요.”
“너무 설레지 마라. 수익이 날지 안 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도 전 기분이 좋습니다.”
“왜?”
“뭔가 절 생각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어서 김현석이 발언했다.
“제가 영화 제작에 처음 참여하는 거라 잘 모르지만, 이 계약 조항은 파격적인 거 같아요. 제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된 거 같고요.”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석이 말처럼 너희 두 사람은 중요한 사람들이고 열정이 있는 녀석들이다. 당장 경제적 보상이 없는데도 이 작품에 참여하니까. 난 거기에 대한 보상이 나중에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열심히 해.”
태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우섭과 김현석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그 두 사람의 대답엔 기합이 단단히 들어갔다.
“네!”
“그럼. 빨리 사인하고 일 얘기 하자.”
이우섭과 김현석은 바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서 사인한 두 사람은 이빨이 보이도록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좋냐?”
이우섭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네. 영화 일하면서 계약서 처음 써봅니다. 현석이 너는 진짜 운이 좋다. 첫 작품에 계약서를 써보다니.”
“그런가요? 어쨌든 기분은 좋습니다.”
“자. 기쁨을 즐기는 건 여기까지 하고. 일 얘기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걸 말해야 해.”
태화가 한재영에게 물었다.
“뭔데?”
“바로 식사 문제야.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것도 결국 질리게 되어 있거든.”
한재영은 자신의 본래의 임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실제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와 연기자의 식사 문제는 제작부에서 챙긴다. 식당을 예약해서 먹을지 아니면 도시락을 사 올지 그게 아니면 밥차를 부를지. 이런 사항들은 현장 상황을 보고 제작부에서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래서 네 말은 뭐야? 여기서 밥을 해 먹자는 말이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나도 자취 생활 좀 해서 몇 가지 요리는 할 줄 아는데 메뉴가 좀 한정적이어서. 그리고 여기서 밥을 해서 먹는 게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제작비 절감에 아주 큰 도움이 되거든.”
“…….”
“혹시 요리 좀 할 줄 아는 사람.”
한재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현석이 손을 들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네. 저 군에 있을 때 취사병이었습니다. 반찬 몇 가지는 만들 수 있습니다.”
순간 김현석을 제외한 세 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태화가 김현석을 향해 말했다.
“네가 낸 이력서에는 그런 내용 없던데?”
“그게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적지 않았습니다.”
태화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 녀석 은근히 엉큼한 놈이네. 혹시 귀찮은 일 생길까 그런 건 아니고?”
“아닙니다. 그런 의도 없습니다. 귀찮은 일 떠맡는 게 싫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근데 왜 자발적으로 밝힌 거냐?”
“저를 가치 있게 봐주는 거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저도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
“그러려면 제가 그래도 잘하는 걸 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태화는 김현석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현석아. 훌륭하다.”
태화는 더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 말 외에는 당장 생각이 나지 않았다. 김현석이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시름 놨다. 현석이는 이따가 나랑 마트 가서 장 좀 보자.”
“네.”
태화는 이 순간 속으로 감정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태화 군. 자네 지금 감정적으로 벅차오르고 있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네의 감정이 벅차오르는 건 바로 효능감 때문일세.]
[효능감이요?]
[그렇네. 자네가 어제 계약서를 만들면서 생각했던 기대가 있을 걸세. 그건 내가 상대를 이렇게 배려했으니 상대도 그것에 맞게 행동할 거라는 생각 말일세.]
[네. 맞아요.]
[그걸 김현석이 방금 보여준 거네. 김현석은 자네의 진심을 알았고 그것에 맞게 자신이 행동에 옮긴 걸세.]
[그래서 전 그 효능감을 느낀 거군요.]
[그렇네. 하지만 그 효능감은 자네만 맛보아서는 안 되네.]
[당연하죠. 이 작품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맛보게 해야죠.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이 작품은 극장 개봉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노력한 대가를 가져가게 될 테니까요.]
[역시 잘 알고 있구먼.]
#.
몇 시간 후.
한재영과 김현석은 장을 보러 마트에 가고 현재 태화와 이우섭만 옥탑방에 남은 상태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가져온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업무에 집중한 탓에 대화가 서로 오가지 않았다. 대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방 안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이우섭은 태화가 지시했던 씬 분석표을 작성하고 있었고 태화는 촬영 스케줄을 어떻게 짤지 고민하고 있었다.
실제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모든 연기자와 스태프는 촬영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그만큼 촬영 스케줄은 아주 중요하다.
[영감님. 머리가 좀 아프군요.]
[촬영 스케줄이라는 게 좀 그렇네. 나도 조감독 처음 맡고 나서 촬영 스케줄을 짰던 생각이 나는구먼. 그때 나도 사고를 좀 쳤었네.]
[사고요?]
[그래. 어떤 창고를 촬영 장소로 섭외했는데 날짜를 헷갈린 걸세. 갔더니 창고가 비어 있어야 하는데 꽉 차 있더군.]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어떡하긴? 감독님한테 혼나고 스태프 다 데리고 창고 치웠지. 어떻게든 촬영은 진행해야 하니까. 그때 스태프들한테 어찌나 욕을 얻어먹었는지. 허허허.]
[마음 같아서는 그냥 씬 순서대로 찍고 싶네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작비가 감당이 안 되겠죠.]
태화의 말처럼 영화는 제작비 때문에 씬 순서대로 찍지 않고 한 장소에 찍을 수 있는 건 다 모아서 한 번에 찍는다. 이 때문에 촬영 순서는 시나리오상의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될 수밖에 없다.
촬영 스케줄을 짤 때는 장소뿐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영화에 출연하는 연기자의 스케줄, 특정 장소를 헌팅했다면 그 장소를 예약한 날짜, 특별한 촬영 장비를 쓴다면 언제 그 장비가 대여되는지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다 고려해서 짜야 한다. 여기에 예산이 적은 태화는 제작비에 맞추기 위해 촬영 회차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태화 입장에선 당연히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다.
[태화 군. 처음부터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네. 우선 장소별로 묶는 게 우선일세. 그리고 나중에 장소 헌팅을 하면서 두 장소의 위치가 가까우면 한 회차로 묶으면 되는 거고.]
[알겠어요. 그리고 새롭게 생겨날 변수는 여기에 추가로 고려해서 조정하면 되고요.]
[바로 그걸세. 사안이 복잡할수록 그걸 나눠서 단순하게 생각해야 하네.]
[네. 이제 좀 감이 잡히는군요.]
잠시 후 태화는 슬쩍 이우섭을 쳐다보았다. 이우섭은 뭔가 집중할 때 살짝 입을 벌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현재 모습이 그랬다.
‘열심이네.’
태화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태화가 평상에 눕자 파란 하늘이 보였다.
“참 날씨 좋구나. 딱 놀고 싶은 날씨네.”
부드러운 햇살 때문인지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태화가 두 눈을 감고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태화는 자신의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누구냐. 나의 휴식을 깨는 인간이.”
태화는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본 태화는 깜짝 놀랐다.
바로 정원석이었다. 순간 태화는 가슴이 뛰었다.
정원석이 태화에게 전화한 건 뻔하기 때문이었다. 태화의 캐스팅 제안에 응하느냐 응하지 않느냐.
만약 정원석이 캐스팅에 응한다면 영화 제작의 큰 산을 하나 넘는 게 된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남주 캐스팅을 위해서 다시 고달픈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태화는 정원석을 만나고 나서 한재영에게 캐스팅될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중요한 순간이 오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화는 긴장감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