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2화
석무열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수결 결과는 찬성 3 대 반대 2. 나는 당연히 반대표를 던졌고요.”
“근데 본인이 반대표 던졌다는 그 말을 굳이 왜 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확실하게 전달해야 할 건 해야 하니까. 난 아직도 서태화 씨가 제대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면접 때 답변 좀 잘했다고 해서 작품 제대로 만드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그 걱정 덜어드리겠습니다.”
“결과 없이 말뿐인 건 허세에 불과합니다.”
“그럼 결과로 보여드리죠.”
석무열이 피식 웃으면 말했다.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친 석무열은 태화에게 서류를 건넸다. 그 서류는 바로 계약서였다.
“서태화 씨. 지원금을 받으려면 그 계약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신분증은 가져왔죠?”
“네.”
계약서 내용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중요한 사항은 계약서 마지막 부분에 있었다.
그건 지원금과 관련된 사항이었다.
-작품이 완성되고 극장 개봉으로 수익이 발생하면 지원금을 우선하여 상환한다.
만약 개봉 수익이 지원금에 미치지 못할 땐 상환의무는 거기서 종결된다. (단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은 상환의무에서 제외한다.)
-작품 제작이 중단되거나 완성하지 못하면 지원금을 전액 반환해야 한다.
“자. 서태화 씨 서명하시죠.”
“지원금 반환하는 조항이 있군요. 제가 면접 때 쓸데없는 답변을 했네요.”
“그건 그렇지 않아요. 그 답변은 아주 독창적이었으니까.”
“독창적이요?”
“이번에 면접을 봤던 누구도 서태화 씨처럼 답한 사람은 없었어요. 확실히 그 답변은 심사위원들의 눈도장을 찍었어요.”
“…….”
“또 서태화 씨 작품에 찬성했던 심사위원은 서태화 씨의 그 답변을 높게 평가해서 찬성표를 던졌고요.”
“아. 그랬었군요.”
태화는 순간 깨달았다.
[영감님. 결국 그때 던진 승부수가 통한 거군요.]
[그렇네. 오늘 이 결과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만이 아니네. 만약 그때 자네가 승부수를 던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결과는 없었을 거네. 결국 자네의 승부수가 다른 사람이 가져갈 수도 있는 운을 자네가 가져오게끔 한 거네.]
태화는 석무열이 건넨 계약서에 서명했다.
“지원금 이천만 원은 일주일 내에 서태화 씨 통장으로 입금될 겁니다.”
“네.”
지원금이 이천만 원인 건 이 지원금만으로 영화를 제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존에 제작비에 더해서 쓸 수 돈이 바로 이 지원금이다.
석무열이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축하해요.”
태화가 석무열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태화 석무열은 맞잡았던 두 손을 풀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서태화 씨.”
“네? 또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이제부터 공적인 게 아니라 사적인 대화라 말 편히 할게.”
“네. 하세요.”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다.”
태화는 순간 당황했다. 석무열은 태화와 만나면서 한 번도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말이시죠?”
“선영이한테 들었다. 박도봉 감독님 마지막을 지켜봤다면서.”
“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박도봉 감독님의 마지막 모습은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고맙다고.”
순간 석무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태화는 책상에 있는 티슈를 석무열에게 건넸다.
“저기. 이거”
석무열은 태화가 건넨 티슈를 건네받고 피식 웃었다.
“볼 일 다 봤으면 이젠 돌아가도 될 거 같은데.”
“뭐. 너무 의외의 모습이라서요. 처음 봤을 때 그분이 맞나 싶기도 하고요. 혹시 쌍둥이 아니시죠?”
“난 할 말 다 했으니까 인제 그만 가라.”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가려고 했어요. 근데 대단하긴 하네요.”
“뭐가 말인가?”
“고맙다는 사람한테 반대표를 던지셨잖아요.”
태화의 말을 들은 석무열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서태화. 잠깐만.”
“왜요?”
“혹시라도 영화 제작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라.”
“혹여라도 제가 연락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입니다. 전 상대가 고마움을 표시하는데 굳이 사양하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그래. 꼭 연락해라.”
“그러죠.”
#.
태화는 계약서를 손에 쥔 채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태화 군. 축하하네.]
[정말 마음 비우고 있었는데 이런 결과도 나오는군요. 그런데 석무열 저 사람은 아직도 영감님을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네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네.]
[그러니까 좀 잘하지. 왜 그러셨어요.]
[그러게 말일세. 인생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일세. 이렇게 후회할 일이 생기는구먼. 그런데 태화 군.]
[왜요?]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네.]
[뭡니까?]
[자네 작품에 참여하게 될 스태프와 연기자 계약서를 만들어야 하네. 한재영이 비록 프로듀서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선 자네의 의중이 가장 중요하네.]
[그건 어느 정도 생각해 놓은 게 있어요. 이따 재영이한테도 말할 겁니다. 그때 들으세요.]
[자네 생각이 어떨지 궁금하군.]
태화는 건물을 나와서 한재영이 기다리고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한재영은 편의점 밖에 설치된 테이블에 앉아서 생수를 마시고 있었다.
한재영은 태화를 발견하자마자 태화에게 재빨리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태화는 대답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계약서를 한재영에게 보여주었다.
“짠. 이게 뭐게?”
“계약서잖아. 어. 이거. 지원금 지급 계약서네.”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때, 좋은가 한 피디?”
“야. 이제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태화는 한재영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설명에 면접 때 이야기와 석무열 부분은 제외했다.
“태화야. 이거 추가합격 그런 거네.”
“그렇지. 그런데 재영아 지금 막 전투력 상승하는 거 같지 않냐?”
“그럼. 이렇게 막차 타는 놈들이 무서운 거 아니겠냐? 월드컵 같은 데서도 간신히 본선에 올라온 팀들이 선전한다고.”
“아주 적절한 비유다. 재영아.”
“왜?”
태화가 편의점 앞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자리에 앉아봐. 할 얘기가 있어.”
“할 얘기?”
태화와 한재영은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계약서를 보니까 생각난 건데 말이야.”
“응”
“우리도 계약서 만들어야 하잖아.”
“스태프하고 연기자 거하고 만들어야지. 그런데 진짜 만들려고? 상대만 동의하면 구두계약으로 해도 되는데.”
“그냥 만들자.”
“네가 그렇게 하지면 그렇게 해야지.”
“만약 <내 복권 내놔!>가 개봉되면 순익(각종 비용과 제작비를 제외한 순수한 이익)이 생길 거 아냐?”
한재영은 순간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엔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그건 모르지. 김칫국은 금물이다.”
“아니. 그러니까 생긴다고 가정하고.”
“좋아. 계속해 봐.”
“나는 그 순익의 절반을 이 영화에 참여한 연기자와 스태프한테 돌려주고 싶어.”
“뭐? 절반이나?”
“그래. 어차피 이 영화는 투자자가 끼어든 것도 아니어서 나눠줄 부분도 없잖아.”
보통 영화가 개봉하고 순익이 발생하면 투자자와 제작사가 6 대 4 비율로 그 순익을 나눈다. 하지만 태화는 이번에 받게 될 지원금도 원금만 돌려주면 되기 때문에 자신이 100% 순익을 가져가게 된다.
“그렇긴 한데 너 괜찮겠어? 절반은 너무 많은 거 아냐?”
“괜찮으니까 너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아니겠냐?”
“근데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내 처지에선 이 영화에 참여해 주는 것 자체가 고마우니까. 그리고 참여하는 사람들한테 동기부여도 되고.”
“…….”
“만약 이 영화가 개봉돼서 순익이 날 정도가 되면 난 돈보다 더 많은 걸 얻게 될 거 아니냐?”
태화의 생각은 나름 합리적이었고 한재영도 이에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쁜 건 아닌데. 그럼 어떻게 배분할 거야? 스태프나 연기자나 다 자기 역할과 비중이 있는데.”
“쉽게 가자.”
“쉽게?”
“그래. 난 그냥 n분의 1로 하려고.”
“뭐? n분의 1?”
“왜 안돼?”
“야. 그래도 역할과 비중이 다른데.”
“재영이 너도 연출부 일하면서 사실 불만 있지 않았어? 솔직히 고생은 다 같이 하는데 누구는 작품 한 편하고 몇억씩 벌어가는 데 누구는 기껏 몇백만 원 받아 가는 게 말이 되냐?”
“그래도 그건 룰이잖아.”
“그래. 룰이지. 하지만 그건 상업영화에서 하는 룰이지 내가 제작하는 영화에서 통하는 룰은 아냐.”
“그건 네 생각이고. 만약 정원석이 캐스팅된다고 치자. 그 사람이 그걸 받아들이겠냐고.”
“받아들이게 해야지.”
한재영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설득해야지.”
“뭐로 설득하려고?”
“가치.”
“뭐?”
“이 작품에 참여하거나 앞으로 참여할 사람들은 돈 벌려는 목적이 아냐. 저예산 영화에 참여해서 돈을 벌어봐야 얼마나 벌겠냐고.”
“…….”
“다들 이 영화가 만들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야. 나는 그 사람들이 다 소중해. 거기에 굳이 비중을 나누고 싶지 않아.”
한재영은 태화의 말을 듣고 나서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크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근데 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최소한 내 첫 작품은 기존의 룰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가치대로 만들고 싶어서.”
한재영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태화를 바라보다 입을 뗐다.
“태화야.”
“왜?”
“너 요즘 학원 다니니?”
“뭔 소리야?”
“말 멋있게 하는 학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가?”
“뭐?”
“그런 말 있잖아. 평범한 사람도 회사 대표 자리에 앉혀놓으면 정말 대표가 되어간다고 하잖아. 너도 감독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되어가는 거 같다. 태화야.”
“왜?”
“현장에서 연출부로 몇백만 원 받고 일한 나로서 네 생각에 완전히 동의한다. 좋은 생각이야. 한 작품이라도 그렇게 한번 해보자.”
“고맙다. 이해해 줘서. 그럼 이제 퇴근하자.”
“할 말 다 했다 이거냐?”
“응.”
한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6시 10분.
“딱 퇴근 시간이네. 그래. 집에 가자.”
태화와 한재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화 군.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가?]
[얼마 안 돼요.]
[며칠 고민한 거치곤 너무 멋진 생각이었네.]
[절실했으니까요.]
[절실했다?]
[네. 스태프나 연기자들에게 당장 경제적 보상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 상황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경제적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치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거구먼.]
[네. 그리고 그 가치에 투자해 준 사람들에게 그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는 건 당연하고요.]
[훌륭하네. 내가 자네를 안 이후 오늘이 제일 멋졌네.]
[전에도 이런 말 한 거 같은데요?]
[그랬나? 그럼 그건 두 번째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생각을 듣고서 뿌듯함을 느꼈다. 태화는 어느새 또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자넨 한재영 말처럼 정말 감독이 되어가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