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1화
한재영이 한탄하듯 말했다.
“어휴. 그놈의 돈이 문제지 뭐.”
“한 피디. 이번엔 그냥 남자로만 갑시다.”
잠시 후 태화가 낙점했던 스태프 두 명이 태화의 시선에 잡혔다. 그 두 사람은 면접 때 봤던 얼굴이라 서로를 기억하고 있었고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만난 상황이었다.
태화가 손을 들어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태화의 손짓을 본 그 두 명은 태화가 있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강은 잡혔네. 감독이 손짓하니까 뛰어오고.”
“재영아. 너도 저랬냐?”
“당연하지. 감독님이 부르는데 어디서 걸어오냐? 나중에 무슨 욕을 먹으려고. 없던 힘도 짜내서 뛰어야지. 크크.”
“요즘 현장 부드러워졌다며?”
“그래도 감독님이 부르는데 뛰어와야지. 다른 건 다 변해도 아마 그건 안 변할 거다.”
두 사람이 뛰는 모습은 꽤 관전하는 재미가 있었다. 태화는 스태프를 뽑으면서 체력을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체격이 다부졌는데 달리는 모습이 그냥 뛰는 게 아니라 마치 돌진하는 느낌이었다.
한재영이 두 사람이 뛰어오는 모습을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야. 이건 연출부가 아니라 운동부다.”
“개성 있고 좋잖아. 안 그래?”
태화와 한재영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새로 합류할 스태프 두 명이 ‘민들레’ 카페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도착하자마자 태화와 한재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이우섭이라고 합니다.”
이우섭은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에 키는 180㎝, 나이는 25살로 현재 휴학 중이다. 그리고 전에 단편 영화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우섭의 인사가 끝나자 같이 온 스태프 한 명이 태화와 한재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김현석입니다.”
김현석은 귀여운 인상에 키는 178㎝, 나이는 23살로 군 제대 이후 휴학 중이다. 영화에 관심은 많지만,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은 전무 하다.
두 사람 모두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태화는 영화 전공자를 일부러 배제한 건 아니었다. 몇몇 영화 전공자들이 왔지만, 조건이 맞지 않았다.
태화가 원하는 스태프는 현장에서 자신의 의도대로 발 빠르게 움직여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영화 전공자들은 자기 고집이 있거나 아니면 원하는 페이 수준이 비교적 높았다.
태화는 인사하고 나서 멀뚱멀뚱 서 있는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말을 건넸다.
“두 사람 반가워요. 일단 자리에 앉아요.”
이우섭과 김현석은 마치 합을 맞춘 듯 동시에 대답했다.
“네.”
이우섭과 김현석이 자리에 앉아 태화가 한재영을 소개했다.
“이쪽은 한재영 프로듀서.”
“반가워요. 한재영입니다. 두 사람 보니 든든하네요. 하하.”
태화가 다시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말했다.
“우선 내가 제시했던 조건이 좋지 않은데도 이렇게 스태프를 하겠다고 해줘서 고맙네요.”
“…….”
“하지만 중요한 사항이기 때문에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스태프는 현장에서 발 빠르게 움직여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고집이 센 사람은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해줄 수 있습니까?”
먼저 연장자인 이우섭이 태화의 질문에 답변했다.
“내 고집을 부릴 만큼 아직 영화 제작 과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배우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태화는 대답을 듣고 나서 시선을 김현석에게 돌렸다. 그러자 김현석이 태화에게 대답했다.
“저는 영화 제작 과정을 아예 모릅니다. 그냥 배우는 자세로 일하겠습니다.”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의 대답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분 앞으로 잘해봅시다.”
“네.”
“이제 한배를 탔으니 앞으로 호칭은 편하게 하도록 할게요. 괜찮겠죠?”
이우섭과 김현석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두 사람은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도 앞으로 날 그냥 형이라고 불러요.”
이우섭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돼. 호칭은 편하게 부르되 일은 칼같이 하는 게 난 좋거든. 이 반대는 정말 질색이야.”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피디님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요?”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독이 그렇게 하자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 나도 편하게 해. 나도 호칭은 편하게 부르되 일은 칼같이 하는 걸 좋아해.”
“그럼 앞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우섭에 이어 김현석이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화는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업무에 관한 사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 사항은 콘티까지 만들어진 상태야.”
태화의 발언에 이우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하지만 그 콘티가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야. 앞으로 일의 진행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어. 그럼 지금부터 업무 분담을 할게.”
“…….”
“우선 촬영 스케줄은 나하고 재영이가 상의해서 짜게 될 거야.”
본래 촬영 스케줄은 조감독이 하는 고유의 업무다. 영화 제작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이 촬영 스케줄을 짜는 건 어렵다.
경험 있는 스태프를 채용하면 좋겠지만 현재 재정 여건상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화가 조감독 업무까지 겸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한테 시나리오는 바로 보내줄 거야. 시나리오 받으면 일단 씬 분석표를 작성해야 해. 우섭아 할 줄 알지?”
씬 분석표는 시나리오의 씬을 보면서 그 씬에 필요한 요소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표로 정리한 문서로 이 문서를 작성하는 게 연출부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다.
등장인물, 미술, 소품, 의상, 분장, 특수효과, C.G, 장소에 대한 콘셉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영화 제작과 관련된 업무는 바로 이 씬 분석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네. 전에 단편 영화 참여하면서 해봤습니다.”
“좋아. 그럼 등장인물, 소품, 의상을 중심으로 씬 분석표 작성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편하고 단편하고 큰 차이는 없어. 그냥 분량의 차이지.”
“네.”
태화는 시선을 김현석에게 돌렸다.
“현석이는 우섭이를 도와 같이 씬 분석표를 작성한다.”
“네. 형. 그렇게 할게요.”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한재영이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사람 씬 분석표 어설프게 작성해서 가져오면 안 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영이 말은 공갈포가 아니야. 재영이는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 연출부 출신이거든.”
태화의 말에 이우섭과 김현석은 깜짝 놀랐다. 이 두 사람에게 상업영화 이력이 있다는 건 엄청난 이력이기 때문이다.
실제 수많은 영화학도가 연출부 생활을 하지만 실제 개봉하는 작품을 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100편의 영화가 기획되더라도 실제 제작되고 개봉까지 하는 작품은 그중 20편도 되지 않는다. 그만큼 요즘은 연출부 이력을 쌓아가기도 쉽지 않다.
오죽했으면 연출부로 일하는 게 감독으로 입봉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겠는가.
박도봉 감독이 연출부 이력을 쌓아가는 정식 루트가 아니라 바로 장편영화 제작을 태화에게 제안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 현재 장편영화 제작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부터 두 사람은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출근하게 될 거야.”
이우섭이 태화에게 질문했다.
“그럼. 우리 어디로 출근해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야.”
“전망이 좋은 곳이요?”
“그래. 그리고 아주 아늑하기도 하지.”
잠시 후 태화는 이우섭과 김현석에게 새로 출근하게 될 곳의 개략적인 위치를 알려주고 나서 두 사람을 바로 퇴근시켰다. 시나리오를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업무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태화와 한재영도 이우섭과 김현석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영아. 저 두 명 어떨 거 같냐?”
“그냥. 느낌은 나쁘지 않았어. 잘 따라올 거 같아.”
“동감이다. 나도 우직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어. 그럼 우리도 슬슬 퇴근하자.”
한재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아직 퇴근하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러지 뭐.”
“무슨 시간을 따지냐? 우리 같은 사람은 일 없으면 그냥 퇴근이잖아.”
태화와 한재영은 카페 사장 정소영에게 인사를 건네고 카페를 나섰다. 그때였다.
태화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태화는 스마트폰의 화면에 뜬 화면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지. 아는 번호가 아닌데.”
“야. 그거 무슨 대출 하라는 번호 아니냐? 그냥 끊어버려.”
“잠깐만. 그래도 모르잖아.”
“야. 그거 자꾸 받아주고 그러니까 그런 전화가 오는 거라고. 헤어진 애인한테 전화 오듯이.”
태화는 피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태화 씨 맞죠?
“네. 그런데요?”
-나 석무열입니다.
“네? 누구시라고요?”
-석무열입니다.
태화는 석무열의 이름을 확인하자 의아함을 가졌다.
“근데 무슨 일이시죠? 저는 지원작에서 탈락한 거로 알고 있는데요.”
-탈락했었는데 상황이 좀 바뀌었습니다.
“상황이 바뀌어요?”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죠. 혹시 오늘 시간이 됩니까?
“네. 가능합니다.”
-그럼 저번에 면접 봤던 곳에서 보기로 하죠. 혹시 여기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한 시간 내로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죠. 도착하면 이 번호로 연락해 줘요.
“알겠습니다.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태화의 통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한재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태화야. 무슨 일이야?”
“나도 잘은 모르겠어. 일단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그러니까 어디 가냐고?”
“너 오늘 특별히 할 일 없지?”
“없지.”
“그럼. 같이 가자.”
태화와 한재영은 석무열을 만나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감님. 상황이 변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무열이한테 직접 연락이 온 거 보면 그 상황변화가 자네한테 나쁠 게 없다는 건 분명하네. 기대할 만한 결과가 예상되는구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태화는 한재영과 함께 1차 면접을 봤던 건물에 도착했다. 태화는 도착하자마자 석무열에게 전화를 걸었고 만날 장소를 안내받았다.
“재영아. 저기 편의점에서 잠깐만 기다려.”
“오케이.”
태화가 석무열과 만날 장소는 지난번 면접을 봤던 곳이 아니라 다른 층에 있는 작은 사무실이었다.
태화는 노크하고 나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석무열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또 보는군요. 서태화 씨.”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는데 귀찮은 일이 생겨 버려서 지금 여기 있죠. 다른 심사위원들이 나보고 일을 마무리하라고 해서.”
“근데 상황이 변했다니 무슨 말입니까?”
“지원작에 선정됐던 한 작품이 제작에 못 들어가게 됐어요.”
“이유가 뭡니까?”
“서태화 씨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운이요?”
“그 작품을 제작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유학을 떠나게 됐어요. 그래서 심사위원이 다시 모여서 탈락했던 작품 중 다시 선정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서태화 씨 작품은 마지막까지 논쟁거리였습니다. 결국 결론을 못 내고 다수결로 결정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