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0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감님. 왜 정원석이 저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자네와 정원석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걸게. 자네가 만약 오디션에서 경찰관 역할을 따냈고 정원석이 탈락했다고 생각해 보게. 자네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나? 상대방에게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까?]
[사실을 몰랐을 때야 내가 잘나서 배역을 따냈다는 마음이 들 수 있지만, 사실을 알게 되면 좀 미안한 마음이 들죠. 그 사람의 실패가 있어서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한 건데.]
[그 미안한 마음. 그게 마음의 빚일세.]
[마음의 빚이라. 영감님 말은 정원석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하라는 것인데.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태화가 이런 반발심이 드는 건 당연했다. 태화는 시나리오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정원석도 그에 호응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자넨 그렇게까지라도 해야 하네. 왜 그런지 아는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자넨 지금 쥐뿔도 없기 때문일세.]
태화는 순간 발끈했다.
[영감님. 그게 지금 할 말입니까?]
[아니. 지금이니 해야 할 말일세. 자네는 지금 시나리오에 대한 자신감에 너무 도취해 있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주연급 연기자가 작품을 선택하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당연히 출연료와 시나리오를 우선 보죠. 그리고 어떤 감독인지 보고요.]
[좋네. 그럼 한번 따져보세. 시나리오는 일단 합격. 하지만 출연료는 당장 줄 수 없다고 볼 수 있네.]
[그렇죠.]
[그럼 마지막 남은 건 감독이네. 불행하게도 자넨 감독으로서 이력이 없어. 그럼 정원석이 이 작품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시나리오뿐이네.]
[하지만 정원석은 현재 조연입니다. 제 작품을 통해서 주연을 할 수 있습니다. 제 작품에 출연하는 건 정원석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이건 아까 영감님도 인정한 부분 아닙니까?]
[그건 정원석이 분명 욕심을 낼 만한 부분이고 선택에 일정 부분을 차지하네. 하지만 이번 경우엔 결정적인 건 아닐세.]
[그럼 뭐가 결정적입니까?]
[자네 작품이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가?]
이 부분에서 태화는 갑갑함을 느꼈다.
[없죠. 그냥 가능성일 뿐이죠.]
[극장 개봉이 되지 않는 영화에서 주연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미 없죠.]
[만약 개봉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정원석은 시나리오만 보고 자네의 캐스팅 제의에 응할 걸세. 아마 출연료를 자진해서 받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말이 마음의 빚이지 결국 동정심에 호소하는 거 아닙니까?]
[일단 자네는 정원석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하네. 그것이 설령 동정심이라도 말일세.]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지금 쓴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만큼 현 상황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 주연을 캐스팅 못 하면 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어. 자넨 지금 차가우리만큼 냉철해져야 하네.]
[아. 화가 나네요. 영감님 말이 틀린 게 없어서.]
[지금은 나중을 생각해야 하네. 그깟 자존심은 버려야 할 때일세.]
[영감님. 잠깐만요. 생각 좀 하고요.]
태화는 잠시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휴. 감정에 흔들리지 말자. 이 작품은 무조건 완성시켜야 한다. 그래야 다음도 있다. 쪽팔림은 잠깐이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스스로 결심하도록 말을 걸지 않았다. 억지로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현 상황은 영감님 말처럼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시 현명한 판단일세. 분명 자네가 오디션 이야기를 하면 정원석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고 할 걸세.]
[아무래도 감정이 편하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그렇네.]
[그럼 영감님은 제가 정원석이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는 그 흐름을 차단하라는 말이군요.]
[바로 그걸세. 역시 자네는 이해가 빨라.]
[하지만 그건 정원석이 상식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잖아요. 만약 정원석이 이기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면……?]
[아쉽지만 이 캐스팅 자체가 어렵다고 봐야 하네. 이기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이 굳이 자네 영화에 출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좋습니다. 대신 이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영감님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왜 이런 말을 하는 이해했다. 이건 태화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래도 끝은 내가 본다는 그런 자존심.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걸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전략을 짜고 나서 정원석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정원석은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지려고 하자 통화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원석은 통화를 마치고 나서 본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통화가 좀 길었네요.”
“괜찮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태화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원석 님은 저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언제 저하고 감독님하고 만난 적이 있나요?”
“정원석 님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에서 맡으셨던 그 배역. 사실 저도 그 오디션 봤었습니다.”
“네? 그게 사실입니까?”
“네. 당연히 저야 그 오디션에서 탈락했지만.”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태화는 기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태화는 연기 지망생이었다.
카메라 앞에선 한없이 적어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태화는 슬슬 감정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정원석 님. 그 오디션이 저한텐 마지막 오디션이었습니다.”
“네? 정말입니까?”
“네. 하지만 전 연기를 그만둔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얼마 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에서 정원석 님이 연기하는 걸 보고 깨달았습니다.”
“뭘 말입니까?”
“저건 내 역할이 아니었구나.”
“감독님. 저한테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태화는 대화의 흐름을 잘 주도하고 있었다. 상대방을 칭찬함으로써 자신의 그릇이 작지 않다는 걸 어필하면서 동시에 정원석의 가슴 한구석엔 미안한 감정이 올라오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정원석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오디션에서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시도했다.
“감독님 처음 봤을 때 어쩐지 느낌이 배우 같았어요.”
이 순간 태화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원석이 대화의 화제를 돌리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정원석은 상식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태화는 순간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태화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대화의 흐름 차단이었다.
“근데 왜 감독이 되려고 하냐고 물어보려고 하신 거죠?”
“네?”
정원석이 말하려고 한 건 태화가 발언한 내용이 아니었다. 정원석은 그냥 태화의 외모에 관한 칭찬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태화가 갑자기 질문으로 치고 들어오자 정원석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연기는 제 길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래도 더 시도해 보지 그러셨어요. 외모도 준수하신데.”
태화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실력으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원석 님은 경찰관 역을 아주 잘 소화하셨습니다.”
“아. 네.”
“만약 제가 그 역을 한다면 그렇게 잘 소화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그렇습니까?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
태화는 정원석의 표정을 살폈다.
정원석은 웃고 있었지만, 어울리지 않는 또 다른 표정이 함께 있었다. 그건 바로 미안함이었다.
‘현재까지 내가 원했던 대로 대화의 흐름이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오디션 관련 이야기는 끝내자. 더 꺼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태화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판단했다. 태화는 가방에서 제본해 온 시나리오를 꺼내서 정원석에게 건넸다.
“정원석 님. 이거 시나리오입니다.”
“네.”
태화가 정원석에게 시나리오를 건네는 사이 커피를 사러 갔던 한재영이 돌아왔다. 한재영은 정원석에게 커피를 건넸다.
“좀 늦었습니다. 앞에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서.”
“고맙습니다.”
한재영이 자신의 자리에 앉자 태화가 발언을 이어갔다.
“한재영 피디한테 대충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될 영화입니다.”
“네.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경제적으로 정원석 님에게 뭔가 해드릴 수 없습니다. 대신 제가 정원석 님에게 해드릴 수 있는 건 당신의 미래에 지렛대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겁니다.”
“…….”
“저나 한재영 피디나 이 작품 그냥 경험으로 만들려는 거 아닙니다. 제작비 예산이 적다고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거든요.”
“네. 그렇죠.”
“반드시 완성해서 개봉하게 할 겁니다. 정원석 님, 저희와 함께해 주시면 좋겠네요.”
“저한테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 작품을 안 읽어봐서 당장 뭐라고 대답하기 뭐하네요.”
“당연히 지금 결정하라는 건 아닙니다. 시나리오 읽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정원석은 시나리오를 챙기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한 피디님 반가웠습니다.”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정원석이 자리를 뜨자 한재영이 태화에게 말했다.
“어떻게 될 거 같아.”
“한다고 봐야지.”
“왜 그렇게 자신 있어? 무슨 근거가 있는 거야?”
“그냥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뭐냐고?”
태화가 한재영의 표정을 보았다. 한재영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재영의 표정을 본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힌트 줄까?”
“그래.”
“상식적인 심성.”
“상식적인 뭐? 그게 뭔 소리야?”
“못 들었으면 그냥 넘어가. 궁금해도 며칠만 기다려.”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
며칠 후 태화와 한재영은 ‘민들레’ 카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새로 합류할 스태프를 기다렸다. 태화는 한재영과 만난 첫날 바로 영화 관련 커뮤니티에 연출부를 구한다는 공고를 냈고 이 중 몇 명을 추려서 면접까지 진행했다. 그리고 태화는 최종적으로 2명을 낙점했다.
[태화 군. 기분이 어떤가?]
[뭐가 말입니까?]
[자네가 직접 뽑고 자네의 지시를 받는 스태프를 처음 맞이하는 거네.]
[설렌다기보다는 그냥 덤덤하네요.]
[자넨 잘해낼 걸세.]
한재영이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태화야. 그래도 한 명은 여자로 뽑지 그랬냐?”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촬영장에서 연애라도 하시게?”
“꼭 그렇다기보단 연출 제작 스태프가 남자만 4명이라고. 좀 그렇지 않냐?”
“나도 그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그런데?”
“현장 상황이 열악하다는 건 뻔히 보이잖아. 체력적으로도 힘이 들 거고. 불가피한 선택이었어.”
실제로 영화 촬영 현장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게다가 현장 스태프는 때론 무거운 짐을 들어야 할 일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래서 인원수가 부족한 태화 처지에선 남자 스태프로만 연출 제작을 구성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