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9화
태화의 말에 한재영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너도 이제 인생의 흑역사는 뒤로하고 새역사를 만들어나가야지.”
“정말 고맙다. 재영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영화 프로듀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야. 이 영화는 나한테도 기회라고.”
“영화 완성하고 꼭 개봉까지 가자.”
“당연히 그래야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건배사를 말했다.
“<내 복권 내놔!>를 위하여!”
“위하여!”
태화와 한재영은 건배하고 나서 각자 맥주를 쭉 들이켰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태화와 한재영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도봉 감독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태화 군이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려면 리더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리더의 기질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하나는 정무적 감각. 여기엔 과감한 결정과 행동이 필요하다. 이건 그동안 내가 태화 군을 지켜본 결과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매력. 이 매력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다. 호감을 넘어서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해야 한다. 한재영이 말한 저 매력이 사실이라면 태화 군은 확실히 리더의 기질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영진은 확실히 이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 그 자리에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영진의 매력과 태화 군의 매력은 다르다. 어쩌면 이 차이가 두 사람의 승부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겠군.’
#.
며칠 후.
태화와 한재영은 혜화역에서 내렸다. 태화가 남주로 점찍었던 정원석을 캐스팅하기 위해서였다.
한재영이 수소문해서 알아본 결과 정원석은 특정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배우가 아니었다. 정원석은 대학로의 한 극단에 소속된 배우였다. 현재 정원석이 소속된 극단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태화는 최대한 빨리 정원석을 만날 수 있게 일정을 잡았다. 무엇보다 남주 캐스팅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태화야 극단이 공연 중이라 오히려 잘됐다.”
“맞아. 정원석 배우의 연기하는 것도 한번 보고. 근데 공연 끝나고 정원석하고 미팅 잡은 거 맞지?”
“오케이. 그리고 알아보니까 정원석이 출연하는 연극이 한 달 후에 끝나더라고.”
태화는 실제 영화 촬영을 한두 달 후로 잡고 있었다.
“대략 우리 영화 스케줄 하고 맞아떨어지네.”
“그렇지. 캐스팅만 된다면 이만한 조건이 없어.”
태화와 한재영은 소극장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석이 연기자로 참여한 연극은 2시간 정도 공연으로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정원석이 맡은 배역은 연극의 주연이 아닌 조연이었다.
[태화 군. 정원석이 주연이 아닌 게 차라리 다행일 수 있네.]
[저도 영감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주연이라면 오히려 조건이 까다로울 수 있잖아요.]
[정원석도 자신이 조연이기 때문에 주연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을 걸세.]
[연기자가 욕심이 있다면 당연히 그러겠죠.]
정원석은 조연이었지만 태화가 그의 연기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건 정원석이 비록 조연이지만 무대에 충분히 등장했고 그때마다 자신의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영감님. 정원석의 연기력은 괜찮군요. 단역이지만 영화 연기를 해봤다는 경험도 있고요.]
[자네 말대로일세. 하지만 자네가 정원석의 연기력과 함께 주의 깊게 봐야 할 게 있네.]
[그게 뭡니까?]
[정원석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보이는 관객의 반응일세.]
[관객의 반응이라.]
[연극 공연은 라이브로 진행되네. 그래서 관객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이뤄지지.]
[그렇죠.]
[관건은 정원석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관객이 얼마나 그에게 집중하느냐일세.]
[그 말은 정원석이 얼마나 관객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느냐를 평가하는 거군요.]
[그렇네. 정원석은 자네 영화에 주인공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배우네. 주인공 역할을 할 배우는 어쨌든 관객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어야 하네.]
[그 말은 주인공으로서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걸세. 매력이 없는 배우는 아무리 연기가 좋아도 주연으로 써서는 안 되네. 반대로 연기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그 배우가 매력이 있다면 주연으로 쓸 수도 있네.]
[결국 배우로서 매력이 그 연기자가 주연급으로 올라가느냐 아니면 조연으로 평생을 가느냐의 기준이기도 하겠군요.]
[그렇네.]
[오늘 공연 보러 오길 잘한 거 같아요.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그 점을 간과했을 테니까요.]
태화는 이후 정원석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관객의 반응도 함께 관찰했다. 관객의 반응은 현장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관객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 행동으로 나타났다.
관객들은 크게 주목하지 않는 부분에선 같이 온 사람들과 귓속말로 대화를 하든지 휴대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주목하는 부분에선 이런 행동 없이 무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정원석은 조연에 불과했지만, 그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주연만큼 관객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영감님. 정원석이 나오는 장면에서 이 정도 반응이라면 나쁘지 않은데요?]
[음.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일세.]
태화는 낮게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재영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한재영의 모습을 본 태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곤할 만하지. 작품 끝나고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한재영은 잠들었으면서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 샀던 꽃다발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재영이 너도 참 대단하다. 이 상황에서도 꽃다발을 안 놓고.’
잠시 후 정원석이 출연했던 연극 공연이 막을 내렸다. 이어서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재영은 박수 소리에 잠을 깼다.
“공연 끝난 건가?”
“그래. 끝났다. 잘 잤냐?”
“아. 깜빡 잠들었네. 야. 혹시라도 나 잤다는 말. 하지 마라.”
“미쳤냐? 그런 소리를 왜 해. 그나저나 잠은 잘 잤냐?”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몸은 개운하다.”
“아주 꿀잠이었구나.”
“그런 거 같다.”
“일어나. 정원석 배우한테 가 봐야지.”
“그래.”
#.
태화와 한재영은 객석을 빠져나와 출연자 대기실로 향했다. 공연 관계자들이 아니라면 그곳으로 출입할 수 없지만, 한재영과 정원석은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어서 출연자 대기실로 갈 수 있었다.
“태화야.”
“응?”
출연자 대기실에 들어가기 전 한재영은 자신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태화에게 건네주었다.
“자. 받아.”
“왜?”
“나보다는 감독인 네가 연기자한테 전달하는 게 나을 거야.”
한재영은 박도봉 감독 말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행동하고 있었다. 연기자에게 감독의 존재는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감독이 직접 연기자에게 꽃다발을 선물한다는 건 감독이 그 연기자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이건 연기자에게 좋은 신호이자 기분 좋은 일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한재영은 거기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재영아. 네 말이 맞다.”
태화와 한재영은 조심스럽게 출연자 대기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원석을 비롯한 몇 명의 출연자들이 안에 있었다.
정원석은 한재영을 보자 반가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 태화와 한재영이 있는 곳을 걸어왔다.
“한재영 조감독님.”
일반적으로 연출부를 퍼스트, 세컨드, 서드, 막내로 구분한다. 여기서 퍼스트가 바로 조감독이다. 하지만 실제 촬영 현장에선 연출부원을 통칭해서 그냥 조감독이라고 부른다.
한재영은 정원석에게 자신의 현재 직책에 대해서 말했지만, 정원석은 한재영을 아직도 조감독으로 더 인식하고 있었다.
“정원석 님. 저 지금은 조감독 아닙니다.”
“아. 맞다. 지금은 프로듀서라고 하셨지. 미안해요. 전에 영화 같이 했을 때 기억이 남아서.”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저도 프로듀서 맡은 지 얼마 안 됐습니다. 하하.”
정원석은 한재영과 인사하고 나서 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같이 오신 분은 배우신가요?”
“안녕하세요. 서태화라고 합니다. 전 배우가 아니라 작품 연출을 맡을 감독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전 너무 인물이 좋으셔서 배우인 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태화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정원석에게 건넸다.
“오늘 공연 성공적으로 끝난 거 축하드립니다.”
“아. 고맙습니다. 감독님께서 직접 이것도 챙겨주시고.”
“오늘 공연 잘 봤어요. 정원석 님 연기도요.”
“근데 봐줄 만하던가요?”
“네. 괜찮던데요?”
“그랬습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그럼. 정원석 님 분장도 지우고 해야 하니까 저희는 나가 있겠습니다.”
“네. 금방 정리하고 나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분장 덜 지우면 피부 상하니까 확실하게 지우고 나오세요. 하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
태화와 한재영은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정원석을 기다렸다. 카페는 2층짜리였는데 태화와 한재영은 카페 입구가 잘 보이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카페 문을 열고서 정원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한재영이 정원석을 불렀다.
“정원석 님. 여깁니다.”
정원석은 한재영을 발견하자 활짝 웃으며 태화와 한재영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왔다.
“오셨는데 커피 한 잔 주문하시죠.”
“감독님. 아닙니다.”
“저희만 마실 수는 없잖아요. 얘기가 좀 길어질 수도 있어서요.”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겠습니다.”
한재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둘이 얘기 나눠요. 커피는 제가 사 올 테니까요.”
한재영은 곧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태화는 한재영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감독과 연기자로서 대화를 나누라는 의미였다. 태화가 대화를 시작하려는 순간 정원석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 감독님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전화 통화하세요.”
정원석은 통화를 하기 위해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 시점에서 정원석이 전화 통화를 하는 게 태화로선 나쁘지 않았다.
태화는 정원석과 대화하기 전 전략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영감님.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요?]
[이럴 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변죽을 울리는 게 좋네.]
[변죽이요?]
[그렇네. 인연을 이용하게.]
[인연이요?]
[사람이란 존재는 은근히 인연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학연, 지연이라는 게 괜히 생기는 게 아닐세. 그리고 자네하고 정원석은 인연이 있지 않나?]
[그 인연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의 경찰관 배역 말하는 겁니까?]
[그거 말고 다른 게 있겠나?]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요. 전 그걸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처음에 언급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대화도 나름 부드럽게 진행이 될 것 같고요.]
[태화 군. 단지 대화가 부드럽게 진행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네.]
[그럼 뭐가 더 중요합니까?]
[정원석이 만약 상식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다면 자네에게 마음의 빚 같은 걸 느끼게 될 걸세. 자넨 그걸 노려야 하네.]
[마음의 빚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