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8화
태화는 적은 예산 때문에 제대로 된 사무실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태화는 당분간 카페에서 사람들과 만나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태화 군. 자네도 이제 그 코피스족이 된 건가?]
[뭐 그렇다고 봐야죠. 그래도 앞으로가 걱정이네요.]
[걱정?]
[네. 지금이야 나하고 재영이만 있으니까 카페에서 회의한다지만 사람이 늘어나면 그것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너무 미리 걱정하지 말게. 그때가 되면 어떤 돌파구가 생길 수도 있을 테니. 일단은 현재에 집중하게나.]
[네. 영감님.]
태화와 한재영은 ‘민들레’ 카페에서 감독과 프로듀서로서 첫 미팅을 갖기로 했다. 태화가 ‘민들레’ 카페에 오자 가장 반긴 사람은 다름 아닌 카페 사장 장소영이었다.
“어머. 태화 씨. 어쩐 일이야?”
“여기서 당분간 회의 좀 하려고요.”
“회의? 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야?”
“네.”
장소영은 태화와 인사를 나누고서 시선을 한재영에게 돌렸다.
“태화 씨하고는 어떤 사이죠?”
“대학 친구이자 이번에 같이 일할 동료입니다.”
“어머, 그래요? 근데 이름이 뭐예요?”
“한재영입니다.”
“아. 재영 씨. 반가워요. 난 장소영이에요.”
“네. 반갑습니다. 근데 태화가 여기서 일했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태화 씨가 여기서 일 잘했지.”
“태화 이 녀석 한다고 마음먹으면 하는 녀석이라 잘했을 거예요.”
“그런 것까지 아는 거 보니 친한 친구 맞네.”
장소영은 한재영과 대화가 끝나자 태화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어디 앉을 거야?”
“테라스 자리에 앉을게요. 그래도 되죠?”
“그럼. 당연히 되지.”
“저하고 재영이는 테라스 자리로 갈게요.”
“그렇게 해.”
태화와 한재영은 주문했던 음료를 각자 들고서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한재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준 시나리오는 다 읽어봤어.”
“느낌이 어때?”
“좋았어. 그런데 잘하면 천만 원 예산으로 찍을 수 있겠더라. 너 시나리오 쓸 때 예산 고려하고 쓴 거 맞지?”
“응. 욕심내지 않고 현실적으로 썼지.”
“너 때문에 내가 요즘 너무 자주 놀란다.”
“일단 놀라는 건 여기까지 하고. 재영아. 어떤 일부터 진행하는 게 좋을까?”
“일단 현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연출부하고 제작부 스태프를 꾸리는 거야.”
“내 생각은 여건상 많은 스태프를 쓸 순 없고. 나하고 너 밑에 각각 한 명씩 두는 거로 하려고.”
“내 생각은 조금 달라.”
“말해봐.”
“솔직히 제작부는 나 혼자 해도 충분해.”
“가능하겠어?”
한재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해. 영화의 규모가 크지 않잖아. 차라리 널 도와줄 연출부 스태프 한 명하고 촬영 현장에서 심부름하고 잡일을 해줄 친구를 두는 게 차라리 나아.”
“잠깐만. 생각 좀 해보고.”
태화가 보기에 한재영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태화 군. 한재영의 말대로 하게.]
[영감님도 재영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보는군요.]
[그렇네. 나도 한재영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네. 자네 밑에 조수를 두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굳이 한재영 밑에 조수를 둘 필요는 없네. 한재영의 진정한 쓰임새는 현장 진행보다는 다른 것에 있네.]
[재영이의 진정한 쓰임새는 바로 기술 스태프 선정에 있겠죠.]
[그렇네. 상업영화는 한 편만 경험해도 거기서 수많은 스태프를 알게 되네. 영화인들 사이엔 이런 말이 있지. 몇 다리만 건너면 웬만한 스태프 다 알 수 있다고. 한재영의 쓰임새는 바로 거기에 있어.]
[제가 당장 할 수 없는 영역이죠.]
[그래서 자네와 궁합이 맞는 걸세. 어쨌든 한재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
[그리고 하나 더 있어요.]
[하나 더?]
[네. 제가 점찍어 두었던 연기자.]
[아. 그 경찰관 역할 했던 배우를 말하는 거로구먼.]
[그 연기자를 섭외하기 위해서도 재영이의 쓰임새가 있습니다.]
[그렇군. 최소한 그 연기자의 연락처라도 알아낼 수 있으니 말일세. 난 자네가 제대로 사람을 섭외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태화는 한재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재영아. 네 말대로 하자. 두 명 모두 연출부 스태프로 공고 올리자.”
“오케이.”
“그리고 너한테 하나 물어볼 게 있어.”
“뭐?”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에서 주인공 검문하던 경찰관 있잖아.”
“태화 네가 오디션 봤었던 그 역할?”
한재영은 그 역할을 바로 기억해냈다. 그건 한재영이 태화에게 그 배역 오디션 보라고 정보를 보내준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응. 그 경찰관 역할 했던 배우. 이름이 정원석이던데. 어느 기획사 소속이야?”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한번 확인해 볼게. 근데 왜?”
“그 배우 이번 작품 남주로 생각하고 있어.”
태화가 정원석을 남주로 생각한 건 처음부터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저예산 영화에선 연기자의 출연료를 충분히 지급해 줄 수 없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는 연기자를 주연으로 캐스팅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단역 배우 중 캐릭터에 부합하고 연기력을 갖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이건 태화가 영화 <엘 마리아치>를 보면서 느꼈던 단점. 즉 배우의 부족한 연기력을 돌파하는 방안이기도 했다.
“재영이 넌 어떤 거 같아?”
“근데 너 남주 오디션으로 뽑을 거 아니었어?”
“일단 캐릭터에 적합한 연기자를 찾았는데 굳이 공개 오디션을 할 필요는 없지.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다.”
“나도 네 생각에 동감이다. 오디션 본다고 그 캐릭터에 맞는 연기자가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일단 그 캐릭터에 어울리는 연기자를 찾았다면 접촉해 봐야지.”
한재영은 잠시 정원석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았다.
“음. 이미지로 봐서는 나쁘지 않은데? 시나리오상 남주의 외모가 너무 튀면 안 되잖아.”
“그렇지. 평범한 이미지지만 뭔가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배역이지.”
“음. 내 기억에도 그 사람 연기력 나쁘지 않았던 거 같아. 특히 대사 소화하는 게 나쁘지 않았어. 만약 대사 소화하는 게 나빴다면 신창우 감독이 그냥 안 넘어갔을 거야.”
“남주 캐릭터하고 이미지가 맞고 연기력도 어느 정도 된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재영아. 그럼 한번 추진해 보자.”
“오케이.”
한재영은 태화에게 대답하고 나서 카페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근데 이 카페 나쁘지 않다. 아늑하고.”
“이 카페 커피도 맛이 괜찮아.”
“그래도 네가 일했던 곳이라고 칭찬이냐?”
“칭찬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야. 근데 재영아.”
“왜?”
“오늘 첫날인데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맥주 한잔하자.”
“오케이. 콜!”
#.
태화와 한재영은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안줏거리를 사서 한재영이 자취하는 곳으로 향했다. 한재영은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다.
태화는 길을 걸어가면서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재영아. 이길 네 자취 집으로 가는 길 아니잖아. 네 자취 집 저쪽 원룸 있는 데 아냐?”
“나. 이사했다.”
“이사했어? 언제?”
“몇 달 됐어.”
“이사할 때 나한테 말하지. 짐이라도 옮기게.”
“별일도 아닌데 뭐. 짐도 많이 없고.”
태화와 한재영은 10분 정도 더 걸어갔다. 그러자 언덕길에 오래된 다가구주택이 밀집한 동네가 나왔다. 한재영은 다가구 주택 중 녹색 대문이 있는 집 앞에 멈췄다.
“여기다.”
“정말?”
“응”
한재영은 녹색 대문을 열고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태화는 의아함을 느끼며 한재영을 따라갔다. 한재영은 옥탑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다 왔어. 여기다.”
“여기 옥탑이 네 자취 집이야?”
“응.”
한재영은 대답하고 나서 옥탑에 있는 평상에 앉았다. 태화도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안주를 평상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 살던 원룸 주인이 보증금 올려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재계약 안 하고 이리로 왔지. 차도 한 대 뽑고.”
“뭐? 차?”
“영화일 하는데 차는 있어야겠더라고. 그냥 중고차 한 대 샀어.”
“부모님은 알고 계시냐?”
“알아. 대신 난리가 좀 났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상의도 안 하고.”
“그래도 어쩌겠냐? 아들이 하겠다는데.”
“야. 근데 내가 알던 캐릭터하고는 좀 다르다?”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땐 감정이 욱했지. 집주인이 올려달라는 보증금도 너무 비쌌고. 또 그걸로 부모님께 전화해서 돈 부쳐달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래서 그랬어.”
“그런 거 보면 재영이 너도 좀 터프한 면이 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지. 태화야.”
“왜?”
“앞으로 스태프 늘면 사무실 필요한 거 아냐? 계속 카페에서 일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그렇지.”
“여기서 하자.”
“뭐?”
“그냥 여기를 사무실로 쓰자고. 어차피 옥탑이라 집주인도 별로 신경 안 써.”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만약 우리 둘 입장이 반대라면 너 나처럼 안 할 거야?”
“당연히 너처럼 하지.”
“됐어. 그럼.”
“그래도 하나만 묻자, 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혹시 프로듀서라는 직책 때문이야? 예산을 어떻게든 아껴야 하는 책임감 그것 때문에?”
“물론 그 이유도 있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냐.”
“그럼?”
한재영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태화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좀 퍼주는 성격이잖아. 크크”
“네가 좀 그렇긴 하지.”
“태화야 그런데, 오해하지는 말아라.”
“오해?”
“그래. 그래도 나 아무한테 막 퍼주는 스타일 아니야. 너니까 그렇게 해주는 거야.”
“왜?”
“태화야. 너는 널 너무 몰라.”
“내가 날 모른다고?”
“그래. 넌 말이야 묘한 매력이 있는 녀석이야.”
“묘한 매력?”
“그냥 뭔가 해주고 싶어진달까?”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냐?”
“불쌍해서가 아니라 왠지 그러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어. 너는 그런 매력이 있어.”
“너 나를 너무 과하게 평가하는 거 아니냐?”
“너 학부 때 박기영 선배 졸작 말아먹고 나서 아싸(아웃사이더)의 길로 갔잖아.”
“그랬지.”
“넌 잘 모르겠지만 그때, 네 안부 묻는 사람 많았다.”
“내 안부를?”
“그래. 학부에서 아싸로 살면 사람들 관심사에서 사라지는 게 일반적이지. 안 봐도 그만이니까. 그런데 너는 안 그랬어. 사람들이 계속 네 안부를 물어봤지. 나도 사람들이 왜 그랬나 생각해 봤는데 그게 네 녀석의 묘한 매력 때문인 것 같더라 이 말이지.”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난 그거라고 봐. 뭔가 해주고 싶으니까 널 찾고 안부를 물어봤겠지.”
“그만해라. 낯 간지럽다. 나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
“당연히 모든 사람이 너한테 그럴 순 없지.”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맥주나 마시자.”
“근데 우리 아직 건배 제대로 안 했다.”
“그런가? 그럼 이제 하면 되지.”
태화가 자신이 들고 있던 캔맥주를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밤하늘에 떠 있는 초승달이 보였다.
“재영아. 저 초승달 말이야.”
“초승달 뭐?”
“초승달이 시간이 지나면 보름달이 되잖아. 뭔가 시작을 의미하는 거 같지 않냐?”
“서태화 오늘 감성이 아주 풍부하구먼. 그래 저 초승달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 이제 세상으로 나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