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37화 (3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7화

영화 프로듀서(Film producer) 즉 영화 제작자는 영화의 기획과 제작에 종사하는 스태프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함께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제작 전체를 담당하는 스태프로 보통 영화 제작사 대표가 이에 해당한다.

주 업무는 총괄, 투자금 유치, 주요 스태프 선정과 고용, 그리고 배급자 섭외 홍보 등이다. 영화 프로듀서는 실제 현장에서 제작 실무를 책임지는 제작 책임자(Executive Producer)를 두어 영화 제작을 진행한다. 우리나라에선 제작부가 프로듀서의 업무를 맡아서 수행한다.

현재 태화는 자신이 영화를 기획하고 예산까지 만들어 놓은 상황이다. 즉 태화가 영화 프로듀서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화 군. 자네를 도와서 전체적으로 영화 진행을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네.]

[그렇겠군요. 다른 스태프도 선정해야 하고요.]

[그래서 이 역할을 맡을 사람은 자네처럼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절대 안 되네.]

[당연히 그렇겠죠.]

[게다가 프로듀서는 돈을 관리하고 집행하는 사람일세. 그래서 자네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네.]

[내가 신뢰할 수 있으면서 경험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군요.]

[조건이 까다롭네.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가?]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누군가?]

[영감님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네. 재영이요.]

[한재영 그 친구는 연출에 관심이 있는 친구 아니었나? 실제로 연출부로 일도 했고.]

[재영이는 제작일에도 관심이 있어요. 나중에 직접 영화를 제작할 꿈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가?]

[네. 재영이는 좋은 제작자가 되려면 연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녀석이에요.]

만약 한재영이 태화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한재영의 역할은 온전한 의미의 영화 프로듀서라기보다는 제작 책임자(Executive Producer)의 역할에 가깝다.

[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연출과 제작은 서로 긴밀한 관계니까 말일세.]

다른 스태프와 달리 연출부와 제작부는 영화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조직이 되어서 움직인다.

연출부에서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미술, 소품, 의상, 단역 및 엑스트라 등 촬영에 필요한 사항을 제작부에 전달하면 제작부에선 그에 따른 경비와 진행에 필요한 사항을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두 부서는 때로는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갈등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연출부와 제작부를 영화계에선 부부 관계에 빗대기도 한다.

[연출과 제작. 두 부서는 서로의 업무를 너무나 잘 알지. 그래서 연출부 출신이 프로듀서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제작부 출신이 감독이 되기도 하네. 나도 한재영이라면 신뢰가 가네. 그런데 한재영을 섭외할 자신은 있는가?]

[되도록 해야죠. 내일 시사회에서 만나니까 그때 섭외해야죠.]

#.

한재영은 10분 정도 읽다가 놀란 표정으로 태화를 바라보았다.

“이거 정말 네가 쓴 거 맞아?”

“그럼. 내가 썼지.”

“너 혹시 누구한테 과외받니?”

“뭔 소리야?”

태화는 대답하고 나서 속으로 살짝 찔렸다.

[태화 군. 한재영 저 친구 감이 녀석일세.]

[네?]

[자넨 지금 훌륭한 과외선생한테 개인지도를 받고 있지 않은가?]

[영감님. 지금 농담이 나옵니까?]

한재영이 물끄러미 태화를 바라보았다.

“뭐야? 왜 날 그렇게 봐?”

“과외받은 게 아니면 천잰가?”

“야. 뭔 소리야. 그냥 죽으라고 내가 몇 개월 동안 쓴 거야.”

“이거 재밌다. 태화야. 혹시 이거 내 메일로 보내 줄 수 있어?”

“그럼. 하지만 조건이 있어,”

“조건?”

“그래. 재영아. 이 작품 같이하자.”

“작품을 같이 하자고?”

“그래. 너 당분간 일 없다며.”

한재영은 영화에 관해서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순수함은 작품 욕심이기도 했다.

한재영은 시나리오가 재밌다고 판단하면 무조건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현재 한재영은 망설이고 있었다.

태화는 한재영이 왜 망설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재영아. 네가 만약 나랑 같이 이 작품을 한다면 난 네가 프로듀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프로듀서?”

“그래. 프로듀서. 그래도 네가 나하고 가장 친한 친군데 너보고 조감독 하라고 할 순 없잖아.”

한재영은 어쨌든 태화보다 경력이 위다. 그런데 만약 조감독으로 일을 맡게 되면 친한 친구라지만 직책상 태화 밑에서 일하는 모양새가 된다.

한재영이 아무리 태화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건 분명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다.

“프로듀서라.”

“물론 저예산 영화라서 스태프를 조촐하게 꾸려가야 하지만 네가 함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 같다. 사실 너도 나중에 영화 제작자 되고 싶어 했잖아.”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자.”

“뭐든지.”

“근데 제작비는 있는 거니?”

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정말? 얼마나 준비했는데?”

“천만 원 정도.”

한재영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뭐? 천만 원?”

“왜?”

“아무리 저예산이라지만 장편인데 너무 적잖아.”

“난 그 돈으로 가능하다고 보는데? 재영아. 처음부터 안 될 거로 생각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

“태화야 잠깐만.”

한재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태화도 한재영에게 말을 시키지 않고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솔직히 태화 녀석의 작품 하고 싶긴 하다.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재밌으니까. 게다가 나도 이번 기회에 프로듀서로 일할 기회이기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제작비다. 너무 적어. 과연 이 돈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을까?’

한재영은 속내가 복잡했다. 영화 제작비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가도 다시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지. 그동안 말도 안 되게 적은 제작비로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성과를 전혀 내지 못했던 것도 아니야. 아. 진짜 머리 아프다. 태화의 제안을 수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동안 태화와 한재영은 서로 대화하지 않았다. 한재영은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고 태화도 한재영에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이 모습은 마치 둘이 서로 싸우고 삐쳐서 말을 안 하는 것처럼 보였다.

[태화 군. 한재영은 지금 망설이고 있네.]

[망설인다고요?]

[아마도 자네 제안을 수락하거나 거절할 거였다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걸세.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망설이고 있다는 거네.]

[그럼 재영이는 왜 망설이고 있을까요?]

[사람이란 말일세. 열에 아홉이 좋아도 하나 때문에 망설일 때가 있네.]

[왜 그렇죠? 열에 아홉이 좋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반적이라면 자네 말대로 하는 게 맞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 열에 아홉이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 않는 가능성의 영역이고 나머지 하나가 눈에 보이는 확실한 단점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결국 제 영화가 성공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건 그 가능성의 영역이고 적은 제작비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단점이라는 말이군요.]

[그렇네. 한재영은 그것 때문에 망설이고 있네. 현재 그 단점을 너무 크게 보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영감님. 재영이는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나? 단순히 친구니까 그렇게 해줄 거로 생각하면 안 되네. 자네만 상처받을 뿐이야.]

[재영이가 시나리오를 읽고서 보였던 반응 때문입니다. 아까 저한테 시나리오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을 때 재영이의 표정과 눈빛. 거기엔 정말 읽어보고 싶어 하는 욕심이 보였거든요. 재영이가 제작자를 꿈꾼다면 그런 욕심이 나는 작품을 안 할 리가 없죠.]

[음. 자네 생각에도 일리가 있네. 불리한 여건에서도 작품을 만들어내도록 하는 게 제작자의 역할이기도 하니 말일세. 한재영에게 그런 도전 정신이 있다면…….]

[재영이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죠.]

[음. 그렇겠지.]

이윽고 한재영은 긴 침묵을 깨고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태화야.”

“왜?”

“나 너한테 하나만 물어보자.”

“얼마든지 물어봐.”

“너 이 작품 포기 안 할 거지?”

“응. 어떻게든 완성할 작정이다.”

한재영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야. 미쳐도 내가 미치지, 재영이 네가 왜 미치냐?”

“내가 너 때문에 쉴 수가 없잖아.”

“뭐? 쉴 수가 없어? 너 그럼?”

“그래. 인마 한번 해보자. 제작비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다.”

“그걸 이제 알았냐? 하여튼 시원하게 대답 못 해줘서 미안하다.”

태화는 한재영이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태화는 한재영이 더 고마웠다.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네가 시원하게 거절했으면……. 그게 더 끔찍하다.”

“단순히 너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어쨌든 이 작품은 나한테도 도움이 돼. 나도 저예산 영화에 꼭 한번 참여하고 싶었었거든. 게다가 넌 이 작품 포기 안 한다고 했잖아. 결국 내가 이 작품 안 해도 다른 사람이 할 거 아냐?”

“그렇지.”

“내가 또 그 꼴은 못 보지.”

“그렇게 생각했다니 다행이다.”

“태화야. 나 또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

“너. 혹시 <엘 마리아치>란 영화 알아?”

“알아. 그 영화도 봤고.”

한재영은 영화학도로서 영화 지식이 꽤 많은 편이었다. <엘 마리아치>도 그 영화 지식의 범주 안에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난 네가 왠지 그 영화를 봤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그 영화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 중 전설이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데 넌 그 작품을 보고 무슨 영감을 얻은 거야?”

“영감을 얻은 건 아니고 저렇게 저예산으로도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됐지.”

한재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일단 네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알게 된 걸 실천에 옮기는 게 어디 쉬우냐?”

“그냥 미친 짓 한번 해보는 거지. 이리저리 재다가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렇지. 일단 일은 저지르고 봐야지. 하여튼 못 본 사이 너 많이 변한 거 같다.”

“변해야 살지.”

“네가 나보다 나은 거 같다. 첫 작품이 장편 입봉이라니.”

태화는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태블릿을 챙겼다.

“메일은 내가 바로 보내 줄게. 그리고 시나리오 말고 하나 더 갈 거야.”

“하나 더?”

“응. 콘티북 보내 줄게.”

“뭐? 콘티북까지? 너 정말 준비 잘해놨구나.”

태화는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응시를 준비했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콘티가 준비되어 있다는 건 한재영 이후 추가로 섭외되는 스태프와 연기자들에게도 나쁠 건 없다.

“이 정도 준비는 해야 재영이 널 섭외할 거 아니냐? 그리고 너도 콘티를 봐야 어느 정도 계산이 설 거고.”

“그렇긴 하지.”

“재영아. 정말 잘해보자.”

“오히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기왕 했으니 극장 개봉까진 가야지. 안 그래?”

“당연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