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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36화 (36/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6화

인제 와서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흑역사가 태화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물론 태화가 나중에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면 아주 재밌는 추억이 될 것이지만.

태화는 그날의 쪽팔림이 스멀스멀 세포를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잘생겼네.”

신창우의 이 발언은 태화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영화 재밌게 보고 가요.”

“네.”

말을 마친 신창우는 태화와 한재영이 있는 곳을 지나쳐갔다.

‘역시. 단역 배우까지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겠지. 혹시 기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내가 오버한 거야.’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재영아, 감독님이 날 기억 못 하네.”

“왜? 섭섭하냐?”

“그래. 섭섭하다.”

태화의 방금 이 발언은 분명 본심과 다른 말이었다. 하지만 한재영은 태화의 심정을 알면서도 슬슬 장난기가 발동했다.

“친구가 섭섭하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어쩌려고?”

“어쩌긴. 지금이라도 가서 알려주고 와야지.”

“뭐?”

“이 친구가 그때 그 오디션에 왔던 사람이다. 감독님이 기억하지 못해서 몹시 서운해하고 있다.”

말을 마친 한재영이 신창우 감독에게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행동했다. 태화 재빨리 한재영을 말렸다.

“아서라. 안 그래도 쪽팔려서 미칠 것 같다.”

“그러니까 뭐하러 신경 쓰냐?”

가끔 한재영은 태화보다 과감할 때가 있었다.

“알았어. 이제 신경 안 써.”

“그래. 들어가자 이제.”

#.

태화는 관객석 사이에 홀로 앉아서 영화를 감상했다. 한재영은 따로 마련된 스태프들 자리에 있었다.

한재영과는 영화 상영이 끝내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태화는 영화를 흥미롭게 보았다. 이는 단순히 영화가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시각이 이전과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전에 영화를 볼 땐 줄거리와 배우의 연기가 중심이었다면 오늘은 작품 연출을 앞둔 감독의 시각에서 영화를 보았다.

-나라면 저 장면에서 어떻게 연출했을까?

태화는 영화의 장면마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그려보았다.

예술에 정답은 없지만, 태화가 보기에 아쉬움이 남는 장면이 꽤 많이 보였다.

[태화 군. 소감이 어떤가?]

[아쉬운 장면이 꽤 있었습니다.]

[말해보게.]

[이 작품에서 아쉬운 장면들은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패턴?]

[네. 패턴이 있다는 건 특정한 성향이 있다는 거겠죠. 그 성향이라는 건 출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거고요. 신창우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배우들의 대사는 꽤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사에 너무 의존하고 있는 패턴을 보였습니다.]

[제대로 봤네. 역시 가르친 보람이 있구먼.]

[…….]

[어떤 영화든 흥행하려면 관객의 뇌리에 남는 장면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게 잘 안 보이네. 단지 대사만으로 그런 걸 남기긴 어렵지. 대사와 영상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 영상은 대체로 무난할 뿐이었네. 이건 신창우 감독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향이 작품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겠지.]

[영감님. 이건 나중에라도 고치기 힘들겠죠?]

[아마도. 감독이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고집하면 답이 없거든. 그런 면에서 보면 자넨 강점을 지지고 있네.]

[쓸데없는 고집이 없다고요?]

[그렇네. 자네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거기에 영감님의 가르침도 한몫했고요.]

[허허. 굳이 부정하진 않겠네.]

태화는 영화를 보면서 특정 장면을 더욱 주목해서 보았다.

그 장면은 바로 경찰관이 단속하는 장면이었다. 만약 태화가 경찰로 캐스팅되었다면 자신이 맡았을 바로 그 장면이었다.

-임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신분증을 제출해 주십시오.

이 장면은 주인공이 경찰의 검문에 잡힐 수도 있는 긴장된 장면이었지만 태화만은 그와는 다른 별도의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 이 장면에서 경찰관 역할이요. 제가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봤던 그 역할입니다.]

태화는 지금껏 박도봉 감독에게 자신의 마지막 오디션과 관련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 역시 그동안 태화에게 마지막 오디션에 관해서 굳이 묻지 않았다.

[어떤가? 심정이.]

[잠깐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만약 내가 저 역할을 따냈다면 어땠을까? 지금 연기하고 있는 저 연기자보다 잘 해낼 수 있었을까?]

[만약이라는 단어는 마법 같은 단어일세. 그 뒤에 온갖 상상을 더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내린 결론은 뭔가?]

경찰관 역할을 맡은 단역 배우는 30대 초반의 젊은 배우로 자신의 역할을 큰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이 연기자는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남성적인 이미지가 꽤 인상적이었다.

특히 차량 검문을 하면서 남자 주인공과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다. 비록 짧은 한 장면에 불과했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 연기자는 튀려고 하지 않고 있어요.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하고 있어요. 하지만 단역에서 끝날 배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역이지만 주인공과 함께 나온 장면에서 나름 존재감을 뽐내고 있습니다.]

[제대로 봤네. 배우는 자신이 아니라 배역이 빛나게 해야 하네.]

[맞습니다. 제가 저 배역을 따내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는 제가 저 역할을 맡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단역이라도 맡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고 하는 걸세. 하찮은 배우는 있어도 하찮은 배역은 없는 거니까. 근데 자네 저 배우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네. 제 시나리오의 남자 주인공인 박성욱 역으로 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태화는 작품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경찰관 역할을 한 배우의 이름을 스마트폰 메모 앱에 기록했다.

그 배우의 이름은 바로 정원석이었다.

‘정원석. 기억해 두자.’

#.

극장 근처 카페.

태화는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놓고 카페 한쪽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종로 뒷골목에는 위치한 카페는 테이블이 10개 정도 있는 면적으로 그리 넓지 않았다.

카페 안에는 태화 외에 서너 명 정도의 손님만 있었다. 그래서인지 조용하고 아늑했다.

잠시 후 카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딩동.

태화는 소리를 듣자마자 출입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재영이 카페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재영아. 어서 와.”

한재영도 태화를 보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한재영이 태화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태화야. 미안하다. 내가 조금 늦었지?”

“괜찮아. 일 때문에 그런 건데 뭐.”

“역시 넌 베프야.”

“내가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사람은 아니지.”

한재영은 영화 상영이 끝나고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잡힌 바람에 바로 나오지 못했다.

감독과 다른 스태프들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한재영 혼자만 극장을 빠져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한재영이 몰래 빠져나왔다면 당연히 찍히게 마련이다.

“태화야. 영화는 재밌게 봤어?”

“그래. 나쁘지 않더라.”

“…….”

“근데 GV 반응은 어땠어?”

“일단 부정적인 것 같지는 않았어.”

“잘됐네.”

“두고 봐야지.”

그때였다. 커피가 준비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잠깐만.”

카운터에서 따로 주문해 놓았던 커피를 받아와 한재영에게 건넸다.

“마셔. 이거 맞지?”

태화는 한재영이 단 걸 좋아해서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했다.

“오케이. 잘 마실게.”

한재영의 말투는 들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어쨌든 영화 현장으로 와서 스태프로 처음 참여한 작품이지 않은가.

태화도 한재영의 기분 좋은 상태가 좋았다.

“재영아. 시원섭섭하겠다.”

“글쎄다. 지금은 그런 감정보다는 그냥 쉬고 싶을 뿐이다.”

“많이 힘드냐?”

“뭐. 뻔한 거 아니냐? 솔직히 내 밑보다는 위가 많잖아. 특히 감독님도 성격이 만만치 않고.”

“신창우 감독. 성격 괜찮아 보이던데? 매너도 있어 보이고.”

“그건 맞는데. 사람이 좀 예민해.”

“예민?”

“감독님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잖아. 그래서 그런지 대사에 관한 사랑이 남다르다.”

태화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어서 그리 놀라진 않았다. 태화는 놀라움보다는 일단 궁금했다.

“남달라? 얼마나 그러기에?”

“토씨 하나만 틀려도 난리가 난다. 어떤 날은 한 컷에 테이크만 열 번 넘게 간 적도 있다.”

“진짜? 혹시 주연배우인 양의철이 그런 거야?”

“차라리 그랬으면 덜 억울하지. 양의철이 그럴 배우냐?”

“연기경력으로 본다면 그럴 배우가 아니지.”

“그러니까 내 말이. 어떤 단역 배운가 그랬는데 나중에 그 배우 초주검이 됐다. 내가 그 배우 표정 봤는데 멘탈 완전히 나갔더라. 솔직히 그 장면 그렇게 힘을 주는 장면도 아니었는데. 이 정도면 집착 아니냐?”

태화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 그래도 네가 모신 감독님인데 이렇게 말해도 돼?”

“뭐. 스태프들 귀에만 안 들어가면 되지. 태화 네가 굳이 소문내고 다닐 놈도 아니고. 안 그러냐?”

“그렇긴 하지. 내가 또 의리는 지키는 놈이잖아. 크크.”

“그렇지. 근데 태화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연출 파트에서 일하려면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할 텐데.”

“준비해야지.”

“시나리오는 있고? 혹시 쓰고 있는 거라도 있어?”

“응.”

“진짜? 야. 서태화 대단한데? 시나리오도 다 쓰고.”

태화는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재영이 너 당분간 뭐 하냐?”

“뭐.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이제 다음 작품 찾아봐야지.”

“그러니까 당장 일이 있는 건 아니지?”

“그렇지. 근데 왜 그걸 물어보냐?”

태화는 자신의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냈다.

“방금 네가 시나리오 있냐고 물어봤지?”

“그럼. 태블릿에 네 시나리오가 있는 거야?”

“그렇다.”

“정말? 잠깐 봐도 돼?”

“그럼. 얼마든지.”

태화는 태블릿에서 <내 복권 내놔!> 시나리오를 찾아서 한재영에게 건넸다.

“이야. 서태화 기대되는데?”

한재영은 시나리오의 제목을 보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내 복권 내놔!> 이거 제목 확 땅기네.”

“그렇지?”

“확실히 머릿속에 남는다.”

한재영은 몇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야?”

“응.”

“이거 여기서 읽기 뭐한데?”

“그럼 일단 앞부분만 봐.”

“오케이.”

한재영은 <내 복권 내놔!>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갔다. 태화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한재영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하루 전.

태화와 박도봉 감독은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을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영감님. 제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영화 프로듀서 역할을 할 사람을 섭외해야 하네.]

[영화 프로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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