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5화
조유선은 장소영과 먼저 인사를 한 후 태화와 인사를 나눴다.
“유선 씨. 어서 오세요.”
“네. 반갑습니다. 태화 씨.”
“사장님이 오늘 저한테 내린 임무가 유선 씨한테 일을 가르치는 겁니다.”
조유선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올 때 뭐라도 사 올 걸 그랬나 봐요.”
“아마 그랬으면 후회했을 겁니다.”
태화 말에 조유선이 눈을 크게 떴다.
“네? 그게 무슨.”
조유선은 눈이 꽤 큰 편이었는데 거기에 두 눈을 크게 뜨니, 마치 귀여운 강아지 같은 인상이 되었다.
“사장님이 FM대로 가르치라고 하셔서요.”
조유선은 FM이라는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 FM요?”
“네. 오늘 정신 차리고 절 따라다니면서 잘 배우세요.”
태화가 보기에 조유선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었다. 태화가 먼저 시범을 보이고 조유선이 따라 하는 방식으로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매번 거의 한 번에 해냈다. 그래서 태화도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무리 없이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다.
조유진은 선약이 있어서 카페 마감 때까지 있지 않았다. 어차피 카페 정리하는 일은 크게 배울 일도 없었기에 정소영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태화와 정소영은 카페를 마감했다. 장소영이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화 씨. 그동안 고생했어.”
태화는 정소영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저도 사장님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이왕 할 거면 꼭 성공해. 알았지?”
“네. 그럴 겁니다.”
“그럼 우리 기념사진이나 찍자.”
“기념사진이요?”
정소영이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 기능을 켰다.
“응. 나중에 태화 씨가 성공하면 이 카페는 영화감독 서태화가 데뷔 전에 일했던 카페가 되는 거야. 마케팅 관점에서 나쁘지 않잖아?”
정소영의 말에 태화는 미소가 절로 나왔다.
“역시 마지막까지 뽑아낼 수 있는 건 다 뽑아내시네요. 좋습니다. 사진 찍어요.”
“그럼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
‘민들레’ 카페를 나온 태화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태화는 씻고 나서 바로 침대에 누웠다.
태화는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침대에 눕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영감님. 피곤하네요.]
[그동안 고생 많았네. 잘 자게나.]
[영감님도요.]
태화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태화는 거대한 사하라 사막을 홀로 거닐고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에 태화는 땀으로 옷을 적셨다.
한참을 더 걸어가던 태화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사막의 모래에 쓰러졌다. 태화의 정신은 혼미했고 눈은 점차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태화는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칼칼해서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태화의 입에선 힘겹게 앓는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아. 아…….”
태화는 오전 7시 30분 정도면 잠에서 깬다. 서준상이 아침에 출근할 때 배웅하기 위해서다. 전미경은 태화가 시간이 되어도 방에서 나오지 않자 태화의 방으로 들어갔다.
“태화야. 일어나. 아버지 출근하신다.”
하지만 태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미경은 태화가 일어나지 않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태화를 다시 깨웠다.
“태화야. 일어나라니까.”
하지만 여전히 태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녀석이!”
전미경은 태화를 흔들어서 깨우기 시작했다.
“태화야. 일어나.”
태화는 그제야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으. 음.”
태화는 눈을 떴지만,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게다가 태화의 얼굴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태화를 상태를 본 전미경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태화야! 태화야!”
전미경은 손으로 태화의 이마를 짚었다.
“얘가 열이 불덩이네.”
전미경은 재빨리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여보! 여보!”
전미경의 부름에 서준상이 반응했다.
“무슨 일이야?”
“태화가 지금 몸이 불덩이야.”
“뭐?”
서준상은 재빨리 태화의 방으로 들어왔다.
“태화야! 태화야!”
서준상은 태화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짚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어. 미경아. 태화 좀 업게 도와줘.”
“알았어요.”
서준상과 전미경은 누워 있는 태화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 후 서준상은 태화를 자신의 등에 업고 재빨리 집 밖으로 나갔다.
#.
태화는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에 눈을 떴다.
[태화 군. 눈을 떴는가?]
[영감님. 여기는 병원인가요?]
[그렇네. 아침에 난리가 났었다네. 그런데 몸은 좀 괜찮은가?]
[꿈을 꿨어요. 거기서 저는 혼자 사하라 사막을 헤매고 있었고요. 전 거기서 지쳐서 쓰러졌는데.]
[개꿈은 아니었구먼. 아까 의사가 그러는데 자네 과로에 몸살이 겹친 거라고 하더군.]
[결국 이렇게 일을 치르는군요.]
[사실 자네 쓰러질 만했네. 피곤해서 잇몸도 다 부었었잖아.]
[그동안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네요.]
[뭐. 정신력이지. 자네 어제 카페 일 그만두고 긴장이 풀린 듯하네. 그래서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확 올라온 거 같네.]
[참. 내가 과로로 병원에 올 줄이야.]
[차라리 지금 터진 게 다행일세.]
[그러게요. 영화 촬영 시작하고 아팠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큰일 앞두고 액땜했다고 치세.]
[네.]
태화와 박도봉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미경이 태화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태화야. 깨어났니?”
“네. 엄마.”
“으이구. 이놈의 자식. 엄마가 아침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해요.”
“몸은 이제 괜찮니?”
“네.”
“참 그래도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뭐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태화 네가 과로로 쓰러질 줄이야.”
“엄마.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말입니까?”
“그럼 못할 건 또 뭐 있니?”
“우리 전미경 여사님. 어째 속이 시원하십니까?”
“뭐. 속이 시원? 이게 엄마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전미경은 손으로 태화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아파요.”
“그래도 아픈 건 아냐?”
태화는 장난치다 걸린 개구쟁이처럼 입을 쭉 내밀었다.
“태화야.”
“왜요?”
전미경의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졌다.
“엄마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
“태화가 이제 자기 일 찾아가는구나. 혼자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엄마는 너를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론 기뻤다.”
“…….”
“그런데 뭐? 속이 시원하냐고?”
“하하. 엄마 미안.”
“다시 그딴 소리 해봐. 그땐 가만 안 둘 거야!”
“알았어요. 안 하면 되잖아요. 엄마 근데 나 퇴원해도 되지?”
“왜?”
“답답해서. 이제 몸은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 퇴원할 수 있으면 하자.”
몇 시간 후 태화는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태화의 관심사는 퇴원이었다.
“선생님. 퇴원해도 되죠?”
“네. 서태화 씨는 아직 젊으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당분간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네.”
“잘 먹고 잠도 충분히 자고요.”
“네. 선생님.”
#.
며칠간 집에서 휴식을 취한 태화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 태화는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태화에게 오늘 약속은 특히 의미가 있는 약속이다.
태화의 단짝인 한재영이 연출부로 참여했던 작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 시사회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 홍보팀에선 스태프들에게 시사회 초대권을 몇 장 준다. 한재영도 그 입장권을 받아서 태화를 초대했다.
태화는 시사회가 열리는 종로 새울 극장으로 향했다. 태화가 시사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한재영이 참여했던 작품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세상>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인 40대 남자가 자신의 퇴직금과 대출금을 모아서 작은 가게를 열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자는 부동산 사기를 당하고 그의 가족은 삶의 위기에 몰린다.
주인공은 범인을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범인을 잡지 못한다.
이에 화가 난 주인공은 자신이 직접 범인의 응징에 나선다는 이야기다.
영화의 줄거리 이외에 또 하나의 특징은 남자 주인공이다.
이 배역을 맡은 배우 양의철은 오랜 기간 단역과 조연을 거치면서 연기의 내공을 다져온 연기자로 이 작품이 첫주연작이다.
이 작품은 태화에게도 꽤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바로 태화가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봤던 바로 그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전 같았으면 태화는 이 시사회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현재의 태화는 그때와 달랐다. 이제는 연기자가 아니라 감독으로 삶의 목표를 바꾼 상태다. 삶의 지향점이 바뀌자 과거를 보는 태도도 달라졌다.
‘굳이 이곳이 못 올 곳은 아니지.’
태화는 극장 입구에서 한재영을 기다렸다. 시사회 때문인지 몰라도 주변에 카메라를 든 사람이 꽤 많이 보였다.
[태화 군. 언론사에서 취재를 나온 것 같군.]
[그러게요.]
[감독으로서는 이 순간이 가장 긴장된 순간이면서 동시에 뿌듯한 순간이라네.]
[두 개의 입장이 공존하는군요.]
[시사회는 영화 개봉 전 관객들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벤트네. 감독이 만든 작품이 흥행하느냐 실패하느냐가 판가름 나는 자리이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네.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자리이기에 뿌듯하기도 한 것이지.]
태화는 시사회의 분위기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감정이 고조 되었다.
[저도 빨리 이런 자리에 서고 싶군요.]
[자극을 받은 건가?]
[자극을 받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하네.]
잠시 후.
태화는 한재영과 만나기로 한 극장 입구에 서 있었다. 한재영이 먼저 태화를 발견하고 이름을 불렀다.
“태화야!”
“재영아!”
“시간 맞춰서 왔네.”
“고생했다. 그리고 축하한다.”
한재영이 학부 졸업 후 상업영화에 처음으로 연출부로 참여한 작품이었다. 태화가 축하의 말을 건넨 건 진심이었다.
축하의 말을 들은 한재영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다.”
“얼굴에 살 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그런가?”
한재영은 양 볼에 살이 좀 있는 편이었다. 이 때문에 한재영의 인상은 꽤 귀여운 편이었다.
학부 시절에도 한재영의 귀여운 인상 때문에 여학생들, 특히 여자 선배들한테 꽤 인기가 있었다.
‘재영이 녀석. 고생 좀 했나 보네.’
한재영이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만졌다.
“그래도 나 좀 샤프해 보이지 않냐?”
“그래. 작품 하나 더 했다간 정말 샤프가 아니라 샤프심이 되겠다.”
“그럼 안 되지.”
“당분간 잘 먹고 하면 다시 찾아지지 않겠어?”
“그래야겠다.”
그때였다. 이 작품의 감독 신창우가 도착했다.
태화와 대화를 하던 한재영은 신창우를 보자 재빨리 반응했다. 속된 말로 군기가 든 거다.
한재영이 허리를 굽혀 신창우에게 인사했다.
“감독님! 오셨어요.”
한재영을 발견한 신창우는 살짝 웃으며 한재영의 인사를 받았다.
“어, 그래. 재영이 왔구나.”
“안에 들어가시면 스태프들 다 있습니다.”
신창우는 그제야 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알았다. 근데 옆에 누구야?”
태화는 신창우의 시선을 받은 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재영이 친굽니다.”
“그래요.”
태화가 기억하기에 신창우는 말투에 매너가 있었다. 그리고 태화와 대화를 나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신창우는 태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나를 기억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