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4화
석무열은 태화의 약점을 파고들었지만, 이 상황을 넘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태화가 영화 제작 경험이 없는 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준비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이군요.”
“그래요. 제작비를 지원해 주는 측으로선 가능한 제작 리스크가 없어야 합니다. 작품 제작이 이루어져야 하고 퀄리티도 어느 정도 담보가 되어야 합니다. 기껏 제작비를 지원해 줬는데 작품 제작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거나 엉터리로 제작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우리가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떠한 제작사도 초짜에게 장편영화 감독을 맡기지 않습니다. 서태화 씨.”
“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 부족 리스크. 어떻게 감당할 생각입니까?”
“그건.”
“서태화 씨가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말하죠. 나한테 아까와 같은 반반 논리는 안 통합니다. 가령 문제가 생기거나 그러지 않거나 이런 식의 답변은 아예 하지 마세요.”
태화는 석무열의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없었다.
“그럼. 잠시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하지만 너무 길면 답변 안 한 거로 간주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길지 않을 겁니다.”
태화는 석무열의 발언이 아프게 다가왔다.
[영감님. 갑자기 벽이 느껴지네요.]
[무열이 말에 틀린 건 없네. 지금도 영화감독을 꿈꾸는 수많은 영화학도가 말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며 몇 년 동안 연출부 일을 하는 것도 다 그 경험을 얻기 위해서네. 하지만 태화 군. 여기서 포기할 순 없는 거 아닌가?]
[여기까지 왔는데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봐야죠. 그런데 무슨 수라도 있는 겁니까?]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야 하네.]
[승부수요?]
[그렇네. 하지만 승부수를 던지려면 조건이 필요하네.]
[조건이요?]
[자네 말일세. 여기 면접장에 오기 전 심경과 지금의 심경이 어떤가?]
태화는 잠시 자신의 심경 변화를 되뇌어 보았다. 그리고 태화는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자신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음을 느꼈다.
[아까 함정 질문을 빠져나갈 때부터였을 거예요. 그때부터 전 이거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한테 이익이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한 순간 한계를 정해버리네.]
[그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요?]
[그렇네. 태화 군. 자넨 이제 여기 면접장에 오기 전 심경으로 돌아가야 하네.]
[안 돼도 상관없다는 심경 말인가요?]
[그렇네. 사람은 자신이 얻을 이익에서 멀어져야 자유로울 수 있네. 그래야 승부수를 던질 수 있어. 안돼도 상관없다는 말이 뭘 의미하겠나?]
[여기서 지원해 주는 제작비에 미련이 없다는 말이죠.]
[바로 그걸세. 그럼 그 말을 지금의 상황에 맞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
[미련이 없으니까. 만약 잘못된다면 제작비를 반납할 수도 있는 거죠.]
[그게 내가 말한 승부수네. 일이 잘못되면 받은 돈을 반납하겠다는데 그것만큼 리스크를 짊어지는 게 어디 있겠나?]
태화는 다시 생각할 것도 없이 박도봉 감독의 생각이 옳다고 판단했다.
[영감님 말이 맞네요. 그런데 제 말을 허세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니. 자네는 아까 무열이한테 도발했었네. 이런 자리에서 그것도 심사위원한테 도발하기란 쉽지 않네. 아마도 무열이는 자넬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을 걸세.]
[어쨌든 저의 그 도발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거군요.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는데요.]
[자네가 의도하지 않은 건 현시점에서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자네의 승부수가 잘하면 먹힐 수도 있다는 사실일세.]
[먹힐 수 있는 승부수라면 던져봐야죠.]
태화가 대답을 찾아낸 시점과 동시에 석무열이 태화에게 답변을 재촉했다.
“서태화 씨. 시간은 충분히 준 거 같은데. 이제 내가 했던 질문에 대답하세요.”
“만약 영화 제작 중 문제가 생긴다면 저는 지원받은 제작비를 모두 반납하겠습니다.”
“반납한다?”
“네. 그것만큼 제가 가지고 있는 리스크를 책임질 방법이 있나요? 당장 제가 어디서 경험을 사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석무열은 태화의 답변에 살짝 당황했다. 태화의 답변은 석무열 자신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준비를 더 철저히 한다거나 아니면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동정심에 호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받은 돈을 반납하겠다니……. 다른 사람이 저렇게 대답했다면 난 그냥 허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태화 저 녀석은 진짜로 그렇게 해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석무열은 태화에 대해서 또다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까 태연한 자세로 나한테 도발했던 건 배짱 없이는 분명 불가능한 행동이야. 그런 점에서 서태화는 분명 배짱이 있는 놈이다. 배짱이 있는 사람이 저렇게 발언했다면 당연히 그 말에 허세가 아니라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석무열은 태화에 관한 의문을 뒤로하고 태화에게 되물었다.
“서태화 씨. 방금 했던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오늘 여기서 한 발언을 들으신 분이 여기 다섯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증인이 이렇게 계신 데 제가 나중에 딴소리할 순 없죠.”
태화의 답변을 들은 석무열은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돈을 반납하겠다는데 더 물고 늘어지고 할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석무열의 질문이 끝나자 안정철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서태화 씨. 오늘 어려운 질문에 답변하느라 수고 많았어요. 면접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도 좋습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궁금한 게 뭐죠?”
“면접 결과는 언제쯤 나옵니까?”
“면접 결과는 그리 길지 않을 겁니다. 1차 심사는 지원한 작품이 많아서 몇 개월이 걸렸지만, 면접 심사 대상은 20개 작품입니다. 일주일 정도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네.”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태화는 면접 일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힘드네요. 이런 면접 한 번만 더 했다간 사람 말라 죽겠습니다.]
[태화 군. 수고했네.]
[영감님도요. 오늘 영감님의 조언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것도 무려 두 번씩이나.]
[자네에게 적절한 도움을 주는 게 바로 내 일 아닌가?]
[영감님. 이번에 확실히 느꼈습니다.]
[뭘 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작품 만들어야겠다고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면접을 계기로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제게 영화 이력 한 줄 없다는 게 이렇게 높은 벽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게 바로 진입장벽이네. 뭐든 처음이 힘든 법이지. 자네의 첫 작품. 반드시 만들어야 하네.]
[네. 이제 면접도 끝났고 슬슬 작품 준비를 해야죠.]
[뭐부터 할 생각인가?]
[일단 주변 정리부터 해야죠. 일단 카페 알바 그만두려고요. 이번 달까지 하면 일단 제작비는 마련됩니다.]
[이번 달이면 한 보름 남았구먼. 카페 사장이 아쉬워하겠어. 자네 때문에 매출이 상승한 것도 사실이니 말일세.]
[저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럼 웨딩 촬영 일은?]
[당분간 그건 할 생각입니다. 주말에만 하는 거라 아직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어요. 당장 영화 제작 준비하는 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요.]
[좋은 생각일세. 예비 자금을 조금이라도 더 마련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
태화는 다음 날 카페에 출근하자마자 장소영이 태화를 반갑게 맞았다.
“어머. 태화 씨. 하루 못 봤더니 더 반갑네.”
“저도 그렇습니다.”
“근데 어제 면접은 잘 본 거야?”
“본다고 봤는데 잘 모르겠어요. 워낙 변수가 많아서.”
“면접 점수가 그렇지. 아무리 공정하게 한다고 해도 면접관의 주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으니까. 근데 언제 발표야?”
태화는 굳이 일주일 후 발표라는 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지원작에 선정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면 안 밝히는 게 차라리 나았다.
“몇 주 걸린다네요.”
“그래? 됐으면 좋겠다.”
태화는 장소영의 이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화는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부담감이 몰려왔다.
‘아. 관두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태화가 카페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려면 지금 해야 했다. 요즘 카페에 손님이 많이 늘어난 상황이어서 카페를 오픈하고 나서 말하기엔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영업이 끝나고 정리할 때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날짜만 오늘이지 내일 말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 특히 일을 그만두겠다는 메시지는 빨리 말해줄수록 좋다. 그래야 장소영이 이후 대비를 빨리할 수 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차라리 빨리 말하자. 그게 낫다.’
태화는 카페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장소영에게 전했다.
“사장님. 이번 달까지 일하고 관둬야 할 것 같아요.”
태화의 말에 장소영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앞으로 일정상 더는 카페 일 못 할 거 같아서요.”
장소영이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만간 관두겠다고 말할 거 같더라니.”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대충 월급 나갔던 거 계산해 봤지.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네.”
“빨라요?”
“응. 난 태화 씨가 다음 달쯤 말할 거로 예상했지.”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한 박자 빨랐군요.”
“태화 씨는 한 박자 빠르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난 대여섯 박자는 빠른 느낌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좀 빨라서.”
“죄송할 게 뭐 있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찾아서 가는 건데.”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휴. 그나저나. 이따가 알바 공고 올려야겠네.”
#.
보름이라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보름 사이 태화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일주일 전 있었던 면접 결과 발표였다.
-이번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의 2차 면접 전형 결과 탈락하셨습니다.
태화는 면접을 잘 본 편이어서 혹시 기대했지만, 결과는 역시 탈락이었다.
[태화 군. 심사위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능성보다는 역시 눈에 보이는 이력을 보고 판단했네. 심사 결과가 아쉽구먼.]
[별수 없잖아요. 결과가 아쉽긴 해도 제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됐네. 아쉬운 마음은 빨리 떨쳐내야 하네.]
[네.]
마지막으로 카페에 출근한 태화에게 장소영이 인사를 건넸다.
“태화 씨. 오늘이 마지막이네.”
“네.”
“오늘 알바할 사람 새로 오니까 태화 씨가 잘 알려줘.”
“그럴게요.”
“FM으로 부탁해.”
태화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새로 ‘민들레’ 카페에서 알바로 하는 사람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장소영도 남성 알바를 선발하려고 했지만, 막상 면접해 보니 태화만 한 사람이 없었다.
장소영은 여성을 유인할 만한 남성 알바를 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같은 여성으로 하는 게 마케팅적으로 낫다고 판단했고 장소영은 여성 알바를 채용했다.
최소한 알바가 같은 여성이면 여자 손님들이 카페에서 발길을 돌릴 가능성이 그나마 낮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후 새로 채용된 알바가 도착했다. 태화도 전에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낯이 익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유선. 나이는 태화보다 4살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