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3화
태화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석무열을 향해 발언했다.
“그럼 석무열 심사위원님은 제가 봤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군요.”
“하하. 그렇다니까.”
“아무래도 제가 잠시 착각한 거 같습니다. 석무열 심사위원님은 그 사람과 달리 상식적이고 공정하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석무열은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저 녀석이 진짜.’
석무열은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쨌든 태화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서태화 씨.”
“저도 당연히 그러실 거로 생각합니다.”
태화가 석무열에게 이렇게 도발한 건 단순히 빚을 돌려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태화 군. 이런 행동을 한 의도가 뭔가? 자네한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네. 심사위원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은 건 없네.]
[석무열이라는 사람에게 저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각인이라. 음. 자네 의도가 뭔지 알 것 같네. 자넨 무열이와의 만남이 오늘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구먼.]
[역시 영감님과는 대화가 통한다니까요. 맞습니다. 저와 영감님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벌어진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인물이 바로 석무열 저 사람이지 않습니까? 분명 어떤 시기가 되면 석무열 저 사람은 저에 관해서 판단하게 될 겁니다.]
[맞네. 무열이는 사람들한테 많은 상처를 받았던 인간이네. 그래서 사람에 관한 판단이 신중할 수밖에 없지. 무열이는 자네가 그냥 밋밋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굳이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을 걸세.]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한 단계 성장했음을 느꼈다. 태화는 지금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석무열을 상대로 정치적 수를 던지고 있었다.
[결국 미래에 관한 포석이군. 하지만 오늘 사건을 벌인 건 너무 리스크가 컸네.]
[하지만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저를 각인시킬 기회가 오늘밖에 없잖아요.]
[자네는 자네가 가져갈 수도 있는 이익을 포기하고 한 거네.]
[그 정도는 해야 석무열이라는 사람이 저를 뭔가 남다른 사람으로 기억하겠죠. 솔직히 제가 오늘 이런 행동을 안 했다고 최종 합격까지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태화는 자기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도 태화의 이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자네 말에 일리가 있네. 불확실한 이익보다는 자네에게 주어진 조건을 쓰겠다는 거군. 어차피 결과와 상관없이 작품 준비도 되어가고 있으니.]
[네. 영감님. 좀 여유 있게 가느냐 아니면 배고프게 가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죠.]
한편 석무열은 태화에 대해서 짜증이 아닌 새로운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호기심이었다.
‘이거 저 녀석한테 한 방 먹었네. 근데 저 서태화란 녀석,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녀석이야? 굳이 심사위원인 내 심기를 건드리면서까지 그때 일을 꺼낼 필요는 없었는데……. 서태화. 넌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 놈이냐 아니면 뭔가 의도가 있는 거냐?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
잠시 후 태화에게 양해를 구했던 안정철이 입을 열었다.
“서태화 씨.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그럼 면접 시작하겠습니다.”
“네.”
#.
면접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진행됐다. 전반부는 심사위원들이 시나리오와 관련된 질문을 했고 태화도 큰 문제 없이 그 질문에 대답했다.
후반부는 실제 제작과 관련한 질문으로 진행됐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이동수가 태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서태화 씨. 전 시나리오 아주 재밌게 본 사람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작품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면 감독의 연출이 있어야 하고 그 연출을 뒷받침할 좋은 연기자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시나리오에선 캐릭터의 개성이 강해서 연기자의 캐스팅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동의합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서태화 씨는 능력 있는 연기자를 어떻게 캐스팅할 겁니까?”
“오디션으로 선발할 계획입니다.”
“오디션 좋죠. 그럼 오디션만으로 연기자를 섭외할 수 없다면 그땐 어떻게 캐스팅할 겁니까?”
태화는 이 질문이 나올 거로 충분히 예상했다. 그래서 답변도 준비된 상태였다.
“우선 메이저가 아닌 중소 연예기획사로 찾아가 제 시나리오를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획사에 소속된 연기자들을 상대로 오디션을 본 후 캐스팅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태화의 답변은 꽤 합리적이었다. 대형 연예기획사는 저예산 영화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중소 연예기획사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중소 연예기획사는 자금력 때문에 소속 연기자들을 제대로 선보일 기회가 대형 연예기획사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다.
저예산 영화라도 주연급으로 캐스팅되고 그 영화의 성과가 나온다면 중소 연예기획사는 소속 연기자들을 업계에 홍보할 수 있게 된다.
실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상업영화에 캐스팅되는 중소 연예기획사 출신 연기자도 종종 있다.
심사위원 이동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연기자의 출연료는 어떻게 할 겁니까? 알다시피 저희가 지원하는 지원금은 많지 않아요. 아무리 중소 연예기획사라도 자신의 연기자를 싸게 돌리고 싶지는 않을 텐데요?”
“미래에 대한 투자로 설득하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 그걸로 가능하겠습니까?”
“당장 출연료를 많이 지급해 줄 수는 없지만, 성과가 나오면 나중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설득해 보겠습니다.”
“역시 생각은 좋아요. 그런데 뭔가 확실한 카드는 없는 거군요. 그렇죠?”
“확실한 카드라뇨?”
“서태화 씨가 답한 방안은 아직 현실화하지 않은 그저 머릿속 생각일 뿐이잖아요. 혹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거나 그런 연기자 없어요?”
태화는 순간 질문의 방향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영감님. 이거 질문이 좀 이상한데요?]
[태화 군. 저 질문에 그대로 대답해선 안 되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함정 질문이네.]
[함정 질문이요?]
[저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도 자넨 코너에 몰리게 될 걸세.]
[코너에 몰린다고요?]
[그렇네. 자네가 아는 연기자가 없다고 한다면 자네의 현재 부족함을 인정하는 꼴이 되네.]
[반대 경우는요?]
[그 연기자의 연락처가 있느냐부터 시작해서 여기서 실제 그 연기자와 통화가 가능하냐는 식으로 자네를 몰아붙이게 될 걸세.]
[아마도 검증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하겠죠. 만약 내가 통화하지 못한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고요.]
[그렇네. 음……. 면접 과정이 쉬울 거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 만만치가 않구먼.]
[그럼 제 앞에 면접을 봤던 그 사람도 지금과 같은 함정 질문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군요. 그래서 표정이 안 좋았던 거고요.]
[그렇다고 봐야지.]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이곳에 지원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게 마련이네. 어쨌든 기회를 잡는 거니 말일세. 그 과정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네. 이 질문은 그걸 가려내기 위한 과정일세.]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 하죠?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상대가 파놓은 함정에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네. 대신 저 질문의 잘못된 점을 공략해야 하네.]
[질문의 잘못된 점이요?]
[저 질문은 자네가 제시했던 방식을 아예 부정하는 방법으로 자네를 몰아가고 있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오디션도 그렇고 중소 연예기획사를 접촉하는 방식도 모두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가정하고 있었어요.]
[태화 군. 내가 전에 말했던 적이 있지. 반반 싸움.]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말한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아. 그렇군요. 이런 건 되든가 아니면 안 되든가 둘 중 하나죠.]
태화가 한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이동수가 태화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서태화 씨. 제 질문에 답변하세요.”
“심사위원님은 아까 제가 제시했던 오디션이나 중소 연예기획사를 접촉해서 성공할 가능성이 각각 얼마라고 보십니까?”
이동수는 태화에게 역으로 질문을 받자 살짝 당황했다.
“네?”
“그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되든가 아니면 안 되든가. 반반 아닙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네요.”
“저와 친한 연기자가 있습니다. 그럼 그 연기자가 저의 캐스팅에 응할 가능성이 얼마라고 보십니까?”
“…….”
“그것도 응하든가 아니면 응하지 않든가. 반반입니다. 심사위원님. 어떤 연기자가 저와 친하다고 해서 저의 캐스팅 제안에 100% 응할 거라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동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근거는 없죠.”
“그럼. 저와 친한 연기자는 확실한 카드가 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이동수는 태화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서태화 씨. 좋은 답변이었습니다.”
#.
이동수의 함정 질문 이후 면접은 비교적 무난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무열의 질문이 남은 상태였다.
“서태화 씨. 영화 이력이 전혀 없네요.”
“네.”
“솔직히 서태화 씨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시나리오 때문이에요.”
“잘 알고 있습니다.”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아도 감독이 연출을 잘못하면 그 영화는 쓰레기가 됩니다.”
“네.”
“감독한테 연출 경험은 훌륭한 자산입니다. 하지만 경험 없는 감독은 작품을 만드는 데 가장 위험한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석무열의 이 발언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영화감독은 영화 제작에서 최고 결정권자다.
최고 결정권자가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그 작품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
“서태화 씨. 이 리스크를 어떻게 극복할 거죠?”
여기서 신인의 패기로 극복한다거나 몇 배 더 노력해서 극복한다는 답변은 통하지 않는다. 무언가 실체를 내놓아야 한다.
태화는 자신의 가방에서 제본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게 제 답변입니다.”
“그게 뭐죠?”
“콘티북입니다.”
“콘티북이요?”
“이 사업에 지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몇 개월 동안 콘티를 만들었습니다.”
“그럼. 이 사업에 본인이 될 거로 생각했던 겁니까?”
“아뇨. 이 시나리오를 꼭 영화화시켜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볼 수 있을까요?”
“네.”
태화는 자신이 만든 콘티북을 석무열에게 건넸다. 석무열은 태화가 건넨 콘티북을 몇 장 넘겨보았다.
“서태화 씨. 그림에 소질이 있어요? 꽤 퀄리티가 괜찮은데?”
“아뇨. 그림은 못 그립니다.”
“그럼 어떻게 한 거죠? 누가 대신 그려 준 건가요?”
“아뇨. 제 태블릿에 스토리 보드 앱을 설치해서 그걸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보여드린 콘티북은 그걸 출력한 거고요.”
“알겠습니다.”
석무열은 콘티북을 다시 태화에게 건넸다. 그러자 태화는 콘티북을 받지 않았다.
“제출용으로 가져왔습니다.”
“제출하겠다고요?”
“네. 어차피 원본 파일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콘티북을 나중에 좀 더 상세하게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태화는 콘티북을 제출하고 나서 다시 자신이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석무열의 발언이 바로 이어졌다.
“서태화 씨.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촬영 현장은 준비한 대로 그리고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때로는 그 때문에 영화 제작 진행이 안 될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