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2화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1차 합격 발표일.
집에서 점심을 먹은 태화는 ‘민들레’ 카페로 출근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
[태화 군. 기분이 어떤가?]
[마음을 비웠다고 했는데 막상 오늘이 되니 기분이 묘해지네요.]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일세.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가닥 희망이라는 걸 걸면서 살아가는 존재니까.]
[근데 심사위원들 너무 뜸 들이는 거 아닙니까? 발표하려면 오전에 발표하지 아직 안 하고 뭐 하는 겁니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중요한 결정은 항상 사람들을 기다리게 만들고 안달 나게 만들지.]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닙니까? 사람 약 오르라고.]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나? 그만큼 심사숙고한다는 말이겠지.]
[그런 거 보면 심사위원들 큰 벼슬이라도 하시는 거 같습니다.]
[큰 벼슬까지는 아니어도 중요한 자리이기는 하네. 그들의 결정으로 누군가는 인생의 기회를 잡기도 하고 누군가는 또 놓치기도 하니 말일세.]
[전 놀아나고 싶지 않네요.]
[그래서 자넨 그동안 준비를 해온 거 아닌가?]
[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영감님이 그때 조언해 주신 게 맞았어요.]
[어쨌든 결과가 나오면 자넨 그냥 받아들이면 되네.]
[네. 준비는 되어 있으니까요.]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민들레’ 카페에 도착했다. 보통 이 시간대면 장소영이 카페에 나와 있겠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장소영은 오늘 개인적인 일로 평소보다 늦게 카페에 나올 예정이다.
[오늘 자네 혼자 몇 시간 카페를 봐야겠구먼.]
[뭐. 딱히 어려울 건 없잖아요. 해오던 일인데요.]
[그렇긴 하네만.]
태화는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는 장소영이 없었던 몇 시간 동안 큰 문제 없이 카페를 운영했다.
“태화 씨. 나 왔어.”
“지금 오세요? 개인적인 일은 잘 보셨고요?”
“응. 별일 없었지?”
“네. 없었습니다.”
“태화 씨. 잠깐 빈자리에서 쉬고 있어.”
“괜찮습니다.”
“내 말대로 해. 지금 태화 씨 얼굴 어떤지 알아?”
“제 얼굴이 어때서요?”
“지금 아주 피곤함에 절어 있다고.”
“그런가요?”
“그러니까 내 말 들어.”
“그럼. 저기 잠깐 앉아 있겠습니다.”
“그래. 쉬어. 퇴근 시간 때 되면 바빠지니까.”
“네. 고맙습니다.”
태화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빈자리로 이동했다.
[역시 사회 짬밥을 그냥 먹은 게 아닐세.]
[사장님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나름대로 배려심도 있고.]
[네. 좋은 분이세요.]
[그래도 자네 사람 복이 있구먼.]
[그러게요. 처음엔 그냥 돈이나 버는 게 목적이었는데요. 이상한 사람이 사장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결국 사람 사이 관계란 주고받는 거네. 자네가 일을 잘해왔으니까 사장도 자네를 배려하고 있는 걸세.]
[그럼. 배려받았으면 받은 대로 해야죠.]
태화는 편히 쉬기 위해서 의자에 등을 기대는 순간이었다. 장소영이 태화를 불렀다.
“태화 씨!”
“네.”
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소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태화 씨 휴대폰으로 자꾸 문자가 오는 거 같은데?”
“아. 그런가요?”
태화는 카운터에 놔두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서 문자의 내용을 확인했다.
-귀하는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1차 심사에 합격하셨습니다.
-2차 면접은 일주일 후에 있을 예정입니다. 구체적 시간과 장소는 추후 통보할 예정입니다.
태화는 문자의 내용을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영감님. 이거 진짜죠?]
[거짓이 아닌 진짜일세. 누가 이런 걸로 사기 문자를 보내겠는가?]
[그럼 진짜가 맞네요.]
태화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태화의 모습을 본 장소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태화 씨. 무슨 문자길래 그래?”
“네?”
“혹시 무슨 빚 독촉이야?”
장소영 입장에선 이렇게 판단할 만했다. 태화는 피곤함에 멍한 표정이 더해진 상태여서 마치 무슨 일을 당한 사람 같았다.
“아뇨. 아닙니다.”
“그럼 뭐야?”
“그냥 믿어지지 않아서요.”
“도대체 뭔데 그래?”
“그게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좀 길어도 돼. 바빠지려면 아직 시간 있어.”
태화는 장소영에게 자신이 저예산 영화 제작 지원 사업에 응모한 것과 저예산 영화 제작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럼 태화 씨 목돈이 필요한 게 영화 만들려고 했던 거야? 시나리오도 준비가 되어 있고?”
“네. 사장님.”
“그래도 참 기특하네.”
“아직 최종 합격이 결정된 건 아닙니다.”
“최종 합격이 안 되어도 영화 만든다며?”
“네. 만들어야죠. 그래서 목돈 만들려고 하는 건데요.”
“좋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위해서 뭔가 한다는 거. 태화 씨 다시 봤어.”
“사장님. 그래서 말인데요.”
“왜?”
“다음 주에 면접 때문에 하루 쉬어야 할 것 같아서요.”
태화는 면접 보는 시간만 뺄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태화는 면접을 위해서 온전히 하루를 투자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장소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이 있으면 쉬어야지.”
“고맙습니다.”
#.
면접 당일
1차 관문을 통과한 작품은 20개로 이 중 10개 작품은 탈락하게 된다. 면접 과정은 작품당 30분 정도로 진행된다.
면접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4개 작품,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6개 작품에 관한 면접이 이루어진다.
면접은 이틀간 하루에 10개 작품씩 진행하기로 되어 있다. 어제 10개의 작품에 관해서 면접을 보았고 오늘 10개의 작품에 관해서 면접을 보면 면접 전형이 끝난다.
태화는 오늘 오후 4시 30분부터 30분간 면접을 보기로 되어 있었다. 순서로 보면 가장 마지막 순서다.
태화보다 앞서 면접을 본 사람이 면접장의 문을 열고 나왔다. 태화는 면접을 본 사람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면접자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영감님. 표정이 안 좋네요.]
[아마도 그럴 걸세. 심사위원들은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의 약점을 치고 들어오거든.]
[그럼. 저 사람은 거기에 대한 대비가 없었을까요?]
[당연히 대비했겠지. 예상 질문도 준비했을 거고.]
[그렇다면?]
[내 생각엔 허를 찔린 거 같네.]
[허를 찔렸다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았거나 그런 건가요?]
[그렇네. 심사위원들은 그런 걸 잘 찾아내거든. 어차피 이번 면접은 웬만하면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면접자를 떨어뜨리기 위한 과정이니까.]
[떨어뜨리기 위한 과정이라. 그래서인지 전 더 악착같이 붙고 싶긴 하네요.]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진행요원이 다음 면접 대기자인 태화를 불렀다.
“서태화 씨!”
“네.”
태화는 문을 열고 면접 장소로 들어갔다. 면접 장소엔 총 5명의 심사위원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그들 앞에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바로 면접을 보는 사람의 자리다.
“안녕하세요. 서태화입니다.”
태화는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가장 왼쪽에 자리 잡고 앉은 심사위원인 안정철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서태화 씨. 마지막 순서네요.”
“네.”
“심사위원들이 좀 지쳐서 그러는데 잠깐 기다려 줄 수 있죠? 물도 좀 마실 겸.”
안정철의 말처럼 심사위원들은 확실히 지쳐 보였다.
“면접 시간은 걱정하지 마세요. 30분 시간은 보장해 드릴 테니까.”
“네. 전 괜찮습니다. 편하게 하십시오.”
태화는 이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영감님. 이거 오디션 느낌이랑 비슷하네요.]
[어떤 면에선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오디션이 연기력에 대한 검증이라면 이번엔 자네의 감독으로서의 검증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말일세.]
[어쨌든 긴장이 되긴 하는군요.]
[긴장하지 말게. 내가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네. 영감님이 함께 있는 게 도움이 되네요.]
태화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심사위원들의 얼굴을 한 명씩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으로 시선을 옮기며 바라보았다.
태화는 시선을 옮기던 중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는 면접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감님. 저 사람은 그때 장례식장에서 봤던 석무열 그 사람 아닙니까?]
[음. 그런 것 같네.]
[혹시 저 석무열이라는 사람이 심사위원인 걸 영감님은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전혀 몰랐네.]
[근데 어떻게 저 사람이 여기에.]
[무열이는 독립영화재단에서 이사를 맡고 있네.]
[독립영화재단이요?]
[무열이는 기존 상업영화판에 환멸을 느꼈었네. 그래서 독립영화재단으로 간 거네.]
[혹시 영감님과 이영진의 일과 상관있는 겁니까?]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네. 그때 그 일이 벌어질 당시에 상업 영화계에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거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B급 영화감독과 떠오르는 영화감독. 누구 편을 들겠나? 다들 시류에 편승한 거지.]
[그럼 독립영화재단 이사 직책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심사위원으로 있단 말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커. 저예산 영화하고 독립영화하고 상관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무열이는 이런 자리에 오는 거 좋아하지 않았는데.]
[좋아하지 않는데 하필 이 시기에 왔다는 거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상황이 좀 묘하구먼.]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죠.]
[즐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저 사람한테 갚아야 할 빚이 있지 않습니까?]
[빚? 자네 혹시?]
[갚아줘야죠. 그 빚.]
[태화 군. 그거 안 하는 게 좋을 듯싶네. 하지 말게.]
태화는 시선을 석무열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석무열은 물을 마시고 나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석무열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순간 태화와 석무열의 눈이 마주쳤다. 태화는 애써 석무열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만약 태화가 석무열의 시선을 피한다면 훔쳐보는 모양새가 될 것이고 그게 게 더 이상하게 보일 게 뻔했다.
“서태화 씨.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요?”
태화는 석무열의 표정을 보았다. 석무열의 표정엔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석무열은 태화를 아직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뇨. 근데 전에 봤던 누군가하고 좀 닮아서요.”
“닮아요? 내가?”
“네. 되게 무례한 사람이었어요.”
“무례한 사람?”
“제가 어떤 분 장례식장에 조문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무례한 사람이 저보고 다짜고짜 가라고 하더라고요.”
순간 석무열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제야 석무열은 태화가 생각났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긴 했는데. 그때 그 녀석이 서태화. 바로 저 녀석이란 말이야?’
석무열을 제외한 다른 심사위원들은 순식간에 석무열에게 주목했다. 그들은 딱히 발언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뻔했다.
-방금 저 말이 사실이야?
석무열 입장에선 태화의 말을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됐다. 심사위원의 위치를 떠나서 이건 망신살이 뻗칠 일이었다.
“위원님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석무열은 태화가 말한 사실을 부인하고 나서 태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석무열은 현 상황에서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그때 있었던 일을 목격한 사람이 심사위원 중에는 없었기 때문이다.